철학, 죽음을 말하다
정동호 외 지음 / 산해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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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일생에 단 한번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처음으로 죽은 자의 얼굴을 보았다.

죽은 할머니의 얼굴은 마치 잠들어 있는 것처럼 편안하고 자연스러워보여 나는 삶과 죽음을 갈라놓는 경계가 어디서부터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때 나는 슬프지도 않았고 눈물이 나지도 않았다.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내가 슬프다고 느낀 것은 어느 날 문득 할머니가 보고 싶었을 때 아! 이젠 더 이상 볼 수가 없구나. 라고 느낀 순간이었다.  그 순간 할머니의 죽음은 현실로 다가왔고 나는 가슴을 찌르는 통증을 느꼈다.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할머니가 더이상 내가 있는 이곳에 없다는 자각 - 어딘가 내가 알 수 없는 곳으로 사라져 버렸다는 자각 - 그 단절의 느낌이 죽음에 대한 나의  첫 자각이었다.

죽음 - 인간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죽어보지 않는 한 죽음에 대해 알 도리가 없다. 그러나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인간은 다만 죽음에 대해 생각하거나 혹은 생각하지 아니하거나 먼 훗날의 일로 제쳐두거나 무서움과 공포심으로 바라보거나 피라고 싶은 것으로 여기거나 할 뿐이다.

그러나 죽음은 인간을 제압하기도 하지만 때론 인간이 죽음을 뛰어넘기도 한다. 그 차이는 아마도 죽음과 대면하는 각자의  방식에 있을 것이다.

철학에 있어 죽음은 가장 근본적인 주제 가운데 하나다. 역사상 많은 철학자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죽음에 대해 고민하고 나름의 이해를 넓혀왔다. 그들의 고민과 성찰을 들여다보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 될 것이다.

이 책은  서양의 소크라테스, 플라톤에서 동양의 장자와 공자까지 모두 12명의 철학가의 죽음관을 담고 있다.

그 중에는 죽음을 통해 삶의 무상함을 인식함으로써 삶의 고통을 치유하고 삶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본 쇼펜하우어가 있는가 하면, 죽음을 육체로부터의 영혼의 해방으로 본 플라톤도 있다.

하이데거는 죽음에 대한 불안에서 도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죽음을 넘어서고자 했고, 야스퍼스는 죽음은 인간의 한계상황이므로 죽음과의 성실한 실존적 대결을 통해 죽음의 공포를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

죽음에 대한 자신의 생각대로 삶을 마감한 철학자도 있다.  자살이야 말로 인간이 자기 삶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결단이라고 본 들레즈는 결국 자신의 주장대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삶과 죽음을 평등한 것으로 본 장자는 부인의 죽음 앞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았고,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신념대로 독배를 마셨다.

짧은 글 속에서 한 철학가의 죽음에 대한 성찰을 깊이 있게 들여다본다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묻고 고민하는 철학자들의 모습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동일한 고민을 읽을 수 있다.  그들의 고민은 결국 나의 고민이기도 한 것이다.

죽음의 의미를 묻는다는 것은 곧 생의 의미를 묻는 것과 같은 것이다.  결국 철학자들이 죽음에 대해 사유하고 고민하는 것은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성찰에 다름 아닐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죽음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다.

어린시절엔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고 종교라는 테두리 속에 있었을 때는 죽음은 또 다른 차원의 삶으로 인식되었다.

죽음 뒤에 또 다른 삶이 있다고 보는 것이 모든 종교의 공통적인 믿음인 듯 하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이 가져다주는 공포와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종교를 선택하는 이유가 바로 그러한 믿음에 있다. 나는 그러한 수단으로 종교가 이용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 고민은 언제나 삶속에 있어 왔다.

무엇이 제대로 사는 것인지 잘은 모르겠으나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찾고 내가 살아가는 이유를 묻는 것은 의미 없이 숨만 쉬는 삶이 죽음만 못 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일 거다.

죽음보다 중요한 것이 삶이고 삶보다 중요한 것이 도라고 말한 공자의 말이 가볍게 들리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일 거다.

나는 지금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하고 있다. 단순히 사색에 그치는 차원이겠지만 문득 죽음이 궁금해졌다.  내 삶을 돌아보고 정리할 시간도 없이 순식간에 죽음이 찾아올지도 모르고, 예상하지 못했던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목격해야 될지도 모른다.

내가 내 앞에 펼쳐져있는 삶에만 신경 쓰고 내 바로 뒤에서 항상 나를 따라오고 있는 죽음에 대해 너무 소홀했다는 자각이 문득 들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삶의 의미를 다시 물어야 할지 모르겠다. 죽음의 의미를 다시 물음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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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의 사람들
M. 스콧 펙 지음, 윤종석 옮김 / 비전과리더십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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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인간의 가장 어두운 면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부제가 '인간악의 치료에 대한 희망' 이라고 붙어있다. 인간의 악에 대해서 다루겠다는 말이다.

인간악이라니 무척 거창한 주제다. 사실 악이란 개념은 보는 시각에 따라 상당히 다르게 해석될 수있는 개념이다.

악의 본질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악에 대한 대처방법이나, 저자의 주장대로 악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악이란 것이 과연 존재하기나 하는 것인 지에서부터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악이란 개념은 사실 매우 종교적인 개념이다. 이미 악이란 단어 속에 악과 대립되는 선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이란 보통 종교에서 신의 영역이다.

따라서 종교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인간악을 논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워보인다.  가치중립적인 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스캇 팩은 과감히 과학적인 입장에서 인간악을 논할 수 있다고 한다. 저자는 악을 하나의 질병으로 본다. 악이란 증상이 있고 치료가 필요한 마음의 병이란 것이다.

저자는 과학적 입장에서 인간악에 대한 이해와 치료방법의 모색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크리스천으로서의 자신의 종교적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한계가 분명한 책이다.

특정한 종교적 가치관을 벗어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내게는 한계로 비쳐지는 이 부분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해답으로 방향으로 비쳐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관점의 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이란 것이 있건 없건, 악이라고 부르든 다른 이름으로 부르든, 아니면 하나의 심리적 질병으로 인식하든, 인간내면에 어두운 면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라고 볼 때 스캇 팩이 바라본 인간악의 실체는 무서우리만큼 진실에 다가서 있다.  

스캇팩은 악의 본질이 자신의 잘못을 직면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에게 잘못을 전가하고 스스로는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나르시시즘에 있다고 본다.

"악이란 자신의 병적인 자아의 정체를 방어하고 보전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정신적 성장을 파괴하는데 힘 을 행사하는 것이다."

"악의 본질적 구성요소는 자신의 죄나 불안전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의식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드는 점이다."

"우리는 자신으로부터 숨으려할때 악하게 된다."

저자가  정의하는 악의 개념에 동의하든 안하든 도둑질을 하고 살인을 하는 것을 악이라 규정하지않고 자신의 불완전함이나 죄를 정면으로 대면하지 않으려 하는 것, 오히려 자신의 죄를 타인에게 전가하고 은폐하려는 모습을 악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그의 통찰력은 예리하다.

"악한 자들이 가장 참을 수 없는 고통은 자신의 양심을 직시하는 고통, 자신의 죄성과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고통이다."

저자는  심리치료가 자신을 들여다보도록 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정말 악한 사람은 그늘 속에 숨어 밖으로 나오려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치료를 받으러 오는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마음이 건강한 사람인 경우가 많다. 적어도 그들은 자신이 무언가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고 고쳐보려는 의도를 가지고 오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저자가 악을 질병으로 보는 이유가 그것이 심리치료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치료도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자는 악을 두 가지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하나는 인간적이 악이고 다른 하나는 악마적인 악이다. 인간적인 악은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심리치료를 통해 어느 정도 치료할 수 있다.

그러나 악마적인 악은 그 실체가 성서에 나오는 사탄 혹은 악령이라는 것이다. 사탄은 외롭고 약한 인간의 내면에 침투하여 그 인간의 정신적 성장을 막고 영혼을 파괴한다.

이러한 사탄이나 악령은 구마 (마귀를 내쫓음)나 축사(사악한 기운을 물리침)를 통해 인간 밖으로 내쫓음으로서 벗어날 수 있다.

저자는 사탄이라 불리는 악의 실체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저자의 경험 속에서 어떤 악은 인간적인 악을 벗어나 보다 근원적이고 사악한 실체에 의한 악으로 보이는데 그러한 실체를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을 그가 믿는 종교적인 테두리안에서 찾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이 부분은 저자가 가지고 있는 종교적인 한계일 수도 있고 저자의 개인적 신념이나 믿음의 문제일 수도 있다.

이 부분은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 같은 종교인이 아니라면 상당히 불편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이 책엔  저자가 상담한 여러 사람들의 상담사례가 실려 있다. 그 상담사례를 읽다보면 온 몸이 옥죄어오고 떨려오는 두려움이 느껴진다.

자신의 영혼뿐만이 아니라 상대의 영혼까지도 파괴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무서운 건 그것이 그들만의 모습이 아닐 수도 있다는 자각 때문이다. 내 안에도 그들과 같은 모습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내안에도 악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문득문득 숨어있는 내 어두운 내면이 들여다보일 때마다 나는 악에 대한 스캇 팩의 경고가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님을 깨닫는다.

저자의 종교적이고 개인적인 관점을 떠나서 이 책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 책에서 주장하는 악의 모습이 도처에 널려있는 인간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나 자신의 모습을 비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선과 악의 중간에서 수없이 좌우를 오가며 살아간다.  선과 악의 극단에 서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선과 악의 경계에서 내가 악의 축으로 기울어져있다고 판단되는 순간 선의 방향으로 다시 돌아설 수 있는 힘이 있는 인간이라야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그 힘은 과연 어디에서 올까?  저자의 지적대로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에서부터 올까?

수많은 생각들로 긴긴밤을 지새우며 이 책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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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들의 섬 밀리언셀러 클럽 3
데니스 루헤인 지음,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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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생각하며 읽어야 할 책을 앞에 두고 잠시 숨을 고르려고 집어 들었다.

세계적인 추리문학상인 앤소니 상 및 배리 상 수상, 아마존 닷 컴의 베스트 셀러.

이 정도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범죄를 저지른  정신병자들만을 수용한  병원이 있는 한 외딴섬.  어느 날  환자 한 명이 사라진다.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두 명의 보안관이 섬으로 파견된다.

환자들과 병원관계자들을 조사하면서 주인공은 이 병원에 뭔가 감춰진 비리와 비밀이 숨어있다는 확신을 같게 된다.

사실 주인공은 이 병원에서 정신병 환자들을 대상으로 약물 실험과 불법 시술이 벌어지고 있다는 단서를 잡고 그 증거를 찾기 위해 일부러 섬으로 왔던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불어 닥친 폭풍에 섬은 혼란에 빠지고 주인공은 예상하지 못한 위험에 빠진다.

............................

둘째 날까지 이야기가 책의 거의 절반이 된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사실 평범하다. 어디서 많이 본듯한 이야기구성은 할리우드 영화를 생각나게 한다.  당연이  뭔가 반전이 있을 듯하다. 

이쯤에서 슬슬 반전이 시작되지 않으면 이 책이 다른 수많은 스릴러 소설들과  특별이 다른  점을  발견할 수가 없다.  그러니 반전이 있을 거라는 예상을 하게 되고 예상되는  반전은 너무 뻔하다.

이 책은 그게 문제다.

이미 식스센스나 유즈얼 서스펜스, 뷰티플 마인드,디 아더스등과 같은 영화에서 극적인 반전을 여러 번 경험해 본 독자라면 어렵지 않게 이 책의 반전을 예상할 수 있다.  의심해 볼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기 때문이다. 

덕분에 책의 나머지 절반은 내가 예상한 반전을 확인하는 것이 되 버렸다.

정신병을 소재로 하는 소설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병명이 다중인격장애와  정신분열이다.

이러한 병들은 심한 정신적 외상을 입은 사람이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소외되어 있는 사람의 내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또 그들을 통해 바로 내 안에 있을지도 모르는 그러나 스스로 대면하기를 두려워하고 있을 지도 모르는 상처와 두려움을 바라보게 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재미 이상의 것을 준다.

때론 정상인과 비정상인의 차이에 대해서 때론 너무 빈약한 토대위에 서 있는 인간의 의식에 대해서 철학적인 고민을 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이 책 또한 과거에 받은  정신적 충격으로 갈가리 찢어진  주인공의 내면세계를 통해 인간의 영혼을 갉아먹는 공포와 두려움의 실체를 보여주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뭔가 부족하다.  바닥까지 닿지 않은 느낌이다.

책이 재미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책은 충분히 재미있다.  같은 얘기도 풀어나가는 사람의 재담에 따라 재미가 달라지는 법이니까.

다만 독자들이 점점 더 똑똑해져 가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아무래도 스릴러 소설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나 보다.

누군가 이런 소설은 일단 재미있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한다면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겠다.

그렇다면 이 책은 성공이다.  재미는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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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자들 환상문학전집 8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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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혀지지 않는 책이었다.  처음에는 인내심을 가지고 읽었고 다음엔 많은 생각과 더불어 읽었고 마지막엔 감동과 재미로 읽었다.

SF로 분류되는 책이긴 하지만  어둠의 왼손도 그랬고 이 책도 역시 마찬가지로 단지 배경을 우주라는 공간으로 삼았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는 언제나 나 자신,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어슐리 K 르 귄의 책들은  나로 하여금 자꾸 생각하게 만든다.

아나레스와 우라스는 세티 행성계에 있는 쌍둥이 행성이다.  아나레스의 하늘엔 우라스라는 달이 떠 있고 우라스의 하늘엔 아나레스라는 달이 떠 있다. 그들은 서로 바라보고 있지만 벽으로 단절되어 있다.

주인공 쉐벡이 살고 있는 아나레스는 먼 옛날 우라스에서 온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적 이상주의 세계이다. 황폐한 땅에 모든 것이 척박하기만 한 별이지만 정부도 계급도 남녀 차별도 없고 소유도 없다.  모든 사람들은 공동체속에서 상호 협력하며 자발적 동기로 움직이며  소유 대신 나눔과 평등의 가치를 실현해 나가는 곳이다.

그러나 이런 사회에서도 벽은 존재한다.  뛰어난 물리학자인 주인공은 벽을 허물기 위해 우라스로 간다.

우라스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자연 환경을 가진 별로 아나레스와 비교하면 천국과도 같은 곳이다.  그러나 우라스는 국가와 권력자가 모든 것을 소유하는 곳이며 소유한 자 밑에 빼앗긴 자들의 불평등이 존재하는 사회다.  주인공은 여기서도 사방의 벽을 경험한다.  벽은 어디에도 있었다.

결국 주인공은 그의 별로 돌아온다. 그 곳에서부터 다시 벽을 허물기 위해..

책은 스토리만 놓고 보자면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처럼 유토피아 세계를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우리에게 보다 이상적인 사회체계로 소유와 계급과 불평등이 존재하는 우라스쪽 보다 아나키즘적인 아나레스쪽을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나레스 역시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 보이고 있긴 하지만.

그러나 내겐 이 책이 그렇게 단순하게 읽히지 않는다.

이 책은 유토피아에 대한 책이다. 그러나 한편 인간의 마음과 사회속에 있는 몰이해와 단절의 벽에 관한 이야기다. 그 벽을 허무는 이야기. 이건 작가의 또 다른 책 어둠의 왼손에서도 일관성있게 드러나고 있는 주제다. 그리고 인간 본성에 뿌리박혀 있는 소유와 권력에 관한 철학적 고찰이 담겨있는 책이기도 하다.  

또 한가지 내겐 언어로서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것을 새삼 생각하게 해준 책이기도 하다.  같은 단어를 서로 전혀 다르게 이해하고 사용하고 있을 때 느껴지는 괴리감은

내가 느끼는 벽이기도 하다.  이 책에는 우라스와 아나레스에서 서로 다르게 이해되고 사용되는 단어, 혹은 한 쪽에는 다른 쪽 말을 표현 할 수 있는 단어가 없는 경우들에 대한 설명이 상당히 많이 나온다.  언어에 대한 고찰은 무척 철학적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이상적인 공동체를 꿈꾸어 왔고 시도해 왔지만 언제나 벽에 부딪쳐 왔다.

언제나 인간의 소유욕이 문제가 되어 왔다.  소유욕은 항상 나에게 필요한 것 이상을 요구하는 특징이 있다.  없는 자와 나누기 보다는 가진 것 위에 더 얹고 싶어지는 것이다.

아직도 나는 알 수 없다. 소유욕이 인간의 본성에 해당하는 건지. 그것은 극복할 수 있는 어떤 것인지 아닌지.  다만 이제까지 극복되지 않았다  하여 미래에도 그러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주인공은 물리학자로서 성취한 업적을 만인과 더불어 나눈다. 그것으로서 누군가의 위에 군림하거나  권력의 도구로 사용하거나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고자 하지 않고.

 바람직한 공동체의 바람직한 인간상은 어떠한 것인지  다만 한낱 꿈에 불과한 것인지 여러 생각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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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열두 방향 그리폰 북스 3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용준 옮김 / 시공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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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어슐리 K르 귄의 열 일곱편의 단편소설을 묶어놓은 책이다.

10여 년간에 걸쳐 쓴 단편을 대충이나마 연대순으로 엮었다고 저자가 말했으니 저자의 사고의 흐름을 엿볼 수 있을 듯도 하다.

그래서 순서대로 읽어 나간 책이기도 하다.

사실 단편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다가   단편집을 집어 들더라도 무작위로 읽고 싶은 제목의 글부터 읽어 나가는 쪽이다.  이 책을 순서대로 읽자니 조금 답답하기도 하였다.

사실 어떤 것 부터 읽어도 상관없긴 했다.

열 일곱편의 단편들은  전체적으로 상당히 사색적이고 초현실적인 느낌을 주었는데  어느 것은 신선했고 어느 것은 모호했고 어느 것은  우스웠으며 어느 것은 아름다왔고 어느 것은 쓸쓸했다.

SF라기보다는 동화나 환타지를 읽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작품들이었다.

사실 장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르 귄의 작품들은  특정 장르를 벗어나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것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가장 재미있게 읽은 글은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였다.

오멜라스의 주민들은 모두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오멜라스엔 어떤 폭력도 칼도 경찰도 없으며 모든것이 풍요롭고 아름다우며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기쁨이 넘쳐나는 곳이다.

그러나 이러한 오멜라스의 모든 것은 한 낡고 어두운 지하실방에 감금되어 추위와 굶주림 속에 내 던져진 한 아이의 고통의 대가이다.

즉 누군가 한 아이만 지독한 고통을 당하고 있으면 오멜라스의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이다.  절대로 이 아이를 도와주거나 말을 걸거나 따뜻하게 해 주면 안된다. 이 아이가 고통속에서 벗어날 때 오멜라스의 모든 사람들의 삶은 슬픔과 고통과 비참함이 공존하는 삶으로 돌아간다.

우리들의 선택은 어떠할까?  자신의 풍요와 안락을 다른이의 고통과 바꿀 수 있을까?

다음으로 재미있게 읽은 것은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였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벽, 나와 다른 것에 대한 벽, 그 벽을 넘어서려는 사람들의 이야기..그녀의 한결같은 주제이기도 하다.

 혁명 전날에서는 혁명가의 고독한 내면을 담담하고 쓸쓸하게,  파리의 4월에서는 인간의 고독을 유쾌한 어조로, 명인들과 땅속의 별들에서는 새로운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현실의 권력 앞에 고뇌하는 과학자의 이야기를 섬세하고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셈레이의 목걸이와 겨울의 왕은 단편이지만 장편 이상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으면서도 완결성이 뛰어난 작품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몇 몇 작품은 난해했고 모호했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문장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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