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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그림자 1 ㅣ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며칠간 나를 사로잡았던 책의 마지막장을 덮으려 하니 아쉬운 한숨이 나온다.
읽는 재미에 푹 빠져 한동안 정말 행복했다.
그런 종류의 책이 있다. 읽다가 잠시 책을 덮게 만드는 책. 빨리 읽어 버릴까봐 무서워서 천천히 음미 하며 읽게 되는 책. 바로 뒷장의 얘기가 미치도록 궁금하면서도 될 수 있는 한 시간을 끌며 책장을 넘기게 되는 책. 이 책은 내게 그런 종류에 속하는 책이었다.
"나는 아직도 아버지가 잊혀진 책들의 묘지로 나를 처음 데리고 갔던 그 새벽을 기억한다." 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첫 문장에서부터 비밀스럽고 신비스런 공간으로 독자를 이끈다.
1945년 어느날 새벽, 헌책방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단 둘이 살고 있는 10살 소년 다니엘은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잊혀진 책들의 묘지'라는 고서점 을 방문한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책들, 시간속에 길을 잃은 책들이 언젠가는 새로운 독자 새로운 영혼의 수중에 들어가길 기다리며 영원히 살고 있는 곳' 인 이곳은 첫 방문 시 자신만의 책을 한 권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말해선 안 된다는 규칙이 있다.
소년 다니엘은 홀리한 카락스라고 하는 무명작가의 바람의 그림자라는 책을 고른다.
이제부터 그 책이 소년 다니엘의 인생에 가져다줄 엄청난 사건들을 짐작하지도 못한 채 다니엘은 단숨에 책에 매료되고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수소문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작가는 의문에 휩싸인 채 오래전에 죽었고 그가 쓴 책은 누군가에 의해 철저하게 수거돼 불태워져버리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된다.
게다가 쿠루베라는 알수 없는자로부터 다니엘이 가지고 있는 바람의 그림자가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남지않은 홀리안 카락스의 소설이라며 내놓으라는 협박을 받는다.
이후에 소설은 소년 다니엘이 홀리안에 대한 비밀에 조금씩 다가가면서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해가는 이야기와 하나씩 밝혀지는 홀리안 카락스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교차되면서 수많은 인물들이 서로 얽히는 복잡한 구조로 발전해간다.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중의 하나는 살아 움직이는 소설 속 등장인물들에 있다.
그들은 바람의 그림자라는 소설속에 또하나의 작은 이야기를 이루며 각기 다른 인생의 측면들을 보여 주고 있다.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에 몸부림치며 자신을 잃어가는 홀리안의 처절한 사랑이야기, 누리아와 니겔의 외로운 사랑 이야기, 첫사랑에서 환멸을 느끼고 새로운 사랑에 눈떠가는 다니엘의 사랑이야기, 홀리안과 니켈의 우정과 신뢰의 이야기, 전쟁에 상처입은 사람들의 부재와 상실의 이야기, 홀리안을 쫓는 잔인한 푸메로경위의 질투와 증오의 이야기 등은 그 하나하나가 독립적으로 살아 움직이면서도 전체 이야기와 맞물려 촘촘히 짜여진 거대한 이야기의 그물을 이룬다.
그들의 인생속에서 우리는 모든 인간이 한번쯤은 맞닥뜨릴 인생의 수많은 갈등과 문제들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는 결국 나의 이야기가 되고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되고 만다.
이 소설의 성격을 뭐라 딱 한가지로 규정하기는 힘들다. 연애소설인가 하면 추리소설 같기고 하고 한 소년의 성장소설 같기도 하면서 스릴과 긴장감이 넘치는 스릴러물같기도 하다.
게다가 작가가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솜씨는 정말 탁월해서 소설읽는 재미의 묘미를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즐거웠던 것은 아름답게 빛나는 문장을 음미하는 일이었다.
스페인어로 읽었더라면 그 감동이 더했겠지만 이 책엔 두고 두고 음미하며 생각해볼만한 아름다운문장들로 가득차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커다란 기쁨을 선사해 준 책이다.
이렇게 써 놓고 보니 이 소설의 장점만 나열해 놓은 것 같다. 단점은 없을까?
우선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이라는 스페인 작가가 낯설다.
스페인내전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으면 시대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어렵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새로운 작가를 만났으니 되었고 스페인이라는 나라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으니 단점은 또다른 장점이 될수도 있으리라.
"이곳은 신비한 곳이야, 다니엘. 일종의 성전이지. 네가 보는 책들, 한 권 한 권이 모두 영혼을 가지고 있어. 그것을 쓴 사람의 영혼과 그것을 읽고 살면서 꿈꾸었던 이들의 영혼 말이야. 한 권의 책이 새 주인의 손에 들어갈 때마다, 누군가가 책의 페이지들로 시선을 미끄러뜨릴 때마다, 그 영혼은 자라고 강인해진단다."
'진정으로 마음을 열어준 첫번째 책처럼 한 독자에게 그토록 많은 흔적을 남기는 대상은 거의 없다.'
'사람은 기억되는 동안에는 계속 살아있는 것이다.'
책을 덮고 이 글을 쓰는 동안 나를 사로잡았던 많은 문장들이 그리워진다. 이글을 마치면 다시 열어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