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회
윌리엄 트레버 지음, 김하현 옮김 / 한겨레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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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단편소설인 줄 모르고 목차 간의 이어지는 연결선을 찾기위해 집중했던 윌리엄 트레버의 '밀회', 왠지 책 제목에서 느껴지는 이미지는 인간 본연의 어두운 느낌이 가득할 것 같았다.

일단 표지에서 느껴지는 여인의 비밀스러운 뒷모습이 호기심을 자극하며 코랄톤의 핑크색으로 새겨진 '밀회' 제목은 왠지모를 사랑스러운 향기를 풍기는 책의 앞모습이었다.

'윌리엄 트레버', 이 작가분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노벨 문학상 후보로써도 몇 번 거론되었던 분이라고 한다. 소설가의 소설가이며 우리 시대의 체호프라고 불리는 이 분이 써내려가는 가상의 세계는 어떤 매력이 있을까? 라는 질문을 품고 한작품 한작품 읽어 내려간다.


첫 작품 '고인 곁에 앉다' 부터 왠지 집중해서 내려갔던 것 같다. 23년동안 함께 생활했던 남편과 사별한 '에밀리' 그리고 미혼의 '제라티 자매'가 나누는 대화와 심리묘사가 인상깊었다.

특히 미혼의 자매와 사별한 과부를 대조하게 되는 줄거리는 더욱 결혼이 가져다주는 '함께'의 의미를 더욱 '고통'이라는 주제와 같이 생각해보게 된다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요." 에밀리가 말했다. "이런 때에 지나간 일 얘기를 늘어놓으려던 건 아니었어요.

캐슬린이 충격 때문이라고 말했다. 죽음의 충격은 모든 것을 바꿔놓는다고, 아무리 예상된 죽음이었어도 죽음은 언제나 충격이라고 했다.

"제가 남편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자매는 당황했다. 캐슬린은 무릎을 꿇고 벽난로에 토탄을 넣었고, 노라는 자기 찻잔에 우유를 따랐다. 결혼하지 않은 이 여자들이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에밀리는 생각했다. 슬픔도 애석함도 없다 할지라도 세상을 뜬 저 남자에게 얼마간의 사랑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저들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25P



죽음 앞에 갈라선 부부. 그리고 남은 한 쪽이 하는 과거에 대한 회상은 부정적인 메시지들도 가득하지만 그 또한 사랑이라고 말하는 듯한 메시지를 통해 사랑은 결국 고통을 수반한다는 말이 떠오른다. 그리고 미혼인 자매가 등장함을 통해 더욱 소설 속에서 극적으로 표현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외에 인상깊었던 또 다른 단편 '저녁외출', 소개 받기로 한 듯한 남녀, 에벌린과 제프리가 서로에 대한 순수한 애정보다 현실적이고 계산적으로 서로를 관찰하는 듯한 묘사가 냉정하게 보이기도 하였으며 도시적인 현대인의 모습이 투영된 것 같아 기억에 남았던 단편이었다.

'윌리엄 트레버', 나는 이분의 소설을 처음읽지만 매료되었다는 백수린 소설가의 추천서가 기억나는건 왜 그런지 설명할 순 없지만 이해가 될 것 같다.

이 작가분의 단편소설에서 드러나는 모습은 굉장히 관찰력이 섬세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가상 속 인물들인데 그 인물들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 마냥 세세하게 캐릭터를 표현하기에 깊이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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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것도 부른다면 - 박보나 미술 에세이
박보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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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미술이란 것이 그렇다. 보고있으면 작가가 숨겨논 메시지를 해석하기 위해 작품을 뚫어져라 관찰하게 된다.

미술작품이란 것의 매력이 그런 것 같다. 요리보고 이렇게 해석하다가 저리보고 저렇게 해석해 본다. 작가가 남긴 작품의 의미는 하나일지 몰라도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이름들로 불리게 된다. 결국 사람들의 관점에 따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어떤 사람인지 역시 가늠해보게 된다.

'박보나 미술에세이: 이름 없는 것도 부른다면'

참 흥미로운 미술에세이였다. 미술작품에 대한 매력은 알고있지만 가슴깊이 느끼지는 못한다. 그림이나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봐도 난 모르겠으니 말이다. 그냥 옆에 작품을 해설하시는 분이 말해주시면 '아 그렇구나!'라는 깨달음을 수동적으로 발견해버리는 나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 나름대로 재미있다. 작품해석에 대한 관찰력과 섬세함은 떨어지더라도 누군가 해석해주는 것을 읽어내려가는 재미가 있었던 미술에세이. '이름 없는 것도 부른다면'

아마 나 혼자 뚫어져라 사진만 감상한다면 '이게 뭐 어쩌라고'라는 단순한 생각만 반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박보나님의 해석을 통해 바라보는 작품의 세계에서 드러나는 것은 우리의 삶에 주목해야 할 부분들을 명확하게 바라보게 만들기도 하기에 의미 깊다.



한국의 미술가 조은지(1973~)는 우리가 눈 감아버린 동물들을 작업 속에 담는다. 퍼포먼스 <개농장 콘서트>에서 작가는 개 농장의 뜬장 위에 갇혀있는 개들 앞에서 노래를 부른다. 2004년 복날 하루 전날과 2005년 설날에, 작가는 잘 차려입고 개들에게 <백만송이 장미>를 불러준다.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그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라고 작가가 노래하면, 개들은 목청껏 따라 짖는다. 사랑은 커녕, 생명으로서 한 번도 존중받아 본 적 없는 개들의 구슬픈 울부짖음이 너무 미안하다

73P


그녀의 풍부한 생태계 감수성부터 작품에 대한 섬세한 관찰력이 돋보이는 해석이 담긴 에세이를 통해 미술작품에 대한 시야를 수동적으로 확장시킬 수 있었던 독서 시간.

작품 하나가 태어날 때 작가들이 얼마나 고뇌하였을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한겨레출판 서평단 하니포터1기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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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생의 마지막 도전 - 황혼이 깃든 예술가의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분투기
윌리엄 E. 월리스 지음, 이종인 옮김 / 책과함께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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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단순하게 예술가로만 알고 있었지만 건축가로써 활약하는 멋진 모습도 구체적으로 읽어내려가게 되는 책 '미켈란젤로, 생의 마지막 도전'

1540년대 그 당시에 70~80대로 산다는 것은 그 시대의 기대수명을 훨씬 윗도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백발의 미켈란젤로는 그만큼 오래 살면서 경험한 것과 노년의 지혜로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을 담당하는 책임자로써의 활력있는 삶을 지탱해 나간다.

자신의 삶에 많은 것들을 공유한 '벗'과 지인들의 죽음으로 인해 괴롭고 상실감이 극에 달하였을 , 그 시절 자신 앞에 주어진 일들을 성실히 해나가는 그의 모습을 읽다보면 아직 내 삶의 빛 역시 꺼지지 않았음을 괜시리 실감하게 된다.

그 외에 다른 일들에도 미켈란젤로는 직접 신경을 써야 했다. 파울루스 3세는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최대한 많이 활용하려는 마음을 자제하지 못했다. 후원자와 예술가는 함께 협력하여, 그냥 놔두었더라면 평범한 건축물이 되어버렸을 파르네세 궁전의 설계를 크게 향상시키는 여러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그리하여 길고 넓은 내부 통로에다 아름다운 비례를 지닌 비상한 평면형 아치를 추가하여 장식적 효과를 냈다. 테베레강 위에다 다리를 놓아 파르네세 궁과 그 주변의 저택인 파르네시나와도 연결했다. 또 두 점의 고대 유물, 즉 <파르네세 헤라클레스>와 새로 발견된 <파르네세 황소>를 궁으로 가져와 통합된 정원 구상안의 일부로 편입시켰다.

물론 이런 작업은 성 베드로 대성당에 집중해야 하는 시간을 어느정도 빼앗아갔다. 하지만 이 공사들은 만족도가 아주 높았다. 새 대성당과는 다르게, 그것들은 예술가와 후원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 완성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파울루스가 오래 살수록 - 실제로 그는 아주 장수한 교황이었다 - 미켈란젤로가 맡아야 할 공사 수는 늘어났다.

162-163P

기대수명이 늘어난 오늘날에도 보통 정년은 60세를 넘는 경우를 찾기 힘들다. 하지만 약 500년 전에 활발히 일을 하고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뽐내는 듯한 미켈란젤로와 그런 그를 신뢰하고 일을 많이 맡기는 파울루스가 그에게 가진 듯한 커다란 신뢰감.

이 둘 사이도 그런 의미에서 인상깊었다.

그리고 자극을 받게 된다. 아직 30대 창창한 나이고 앞으로 쌓아갈 수 있는 지혜와 지식들이 널려있는 시기기에 열심히 살자고 말이다.

그와 함께 지인들의 죽음으로 인해 무너질 듯도 한데 자신의 일을 찾으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미켈란젤로'의 에너지 원천은 종교가 아니었을까? 란 질문도 던지게 된다.

미켈란젤로의 만년에 가장 중요한 종교적 영감의 원천인 성 바울은 ' 성 바울이 말하기를' '성 바울에 의하면' '성 바울이 증명하기를' '성 바울이 가르친 바에 의하면' '성 바울이 확인하기를' 같은 말들을 통해 <은혜>의 독자들에게 간접적으로 말했다. 성 바울은 만토바의 베네데토의 입을 거쳐 가르치고 확증할 뿐만 아니라 권면한다. "성 바울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성 바울은 이렇게 확증합니다." "성 바울은 이렇게 명령합니다." 성 바울은 또한 위로를 건네기도 한다. "성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친 바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구약성경은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르치지만 신약성경은 사랑하시는 하느님, 믿음에 의한 의화에서 오는 정신적 행복을 가르친다

87-88P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읽어내려가니 500년 전의 인물이 왠지 조금 더 가깝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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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의 계획 VS 안중근의 반격 - 교과서가 다 담지 못한 안중근 의거
류은 지음, 이강훈 그림 / 책과함께어린이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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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에서 일어난 '안중근 의거', 막연하게 십 몇 년 전 역사책에서 단편적인 사건으로만 기억하고 있는 내게 스토리텔링을 쫘악 나열해주는 이 책이 왠지 반가웠다.

나의 역사지식은 어린이 수준의 이해력을 가지고 있기에 이런 내 수준과 비슷한 분들이 읽기에 딱 맞는 쉽고 재미있는 역사책 하나를 소개하려고 한다. 그리고 뿐만 아니라 아이를 양육하면서 바른 역사관을 재미있게 심어주고 싶은 부모가 있다면 역시 추천하는 역사책 한권

이름하여 '이토 히로부미의 계획 VS 안중근의 반격', 책 내용을 살펴보면 중간중간 눈에 확들어오는 일러스트는 국제정세 비유를 찰떡같이 소화시켜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리고 책 속에서 일제시대를 들려주는 이야기체 형식으로 풀어가기에 왠지 부모님께서 잠들기 전 아이들에게 책 속 그림을 보여주면서 문체 그대로 읽어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청','대한민국','일본','러시아' 다양한 국가들의 정세에 대해 이야기로 풀어내면서 들으니 역사가 딱딱하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물흘러가듯이 읽어 내려가게 된다.

그리고 또한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흐름들을 살펴볼 때 겉으로 보여지는 것, 그 이면의 의미에 대한 해석을 통해 더욱 역사를 깊이 있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잘못 끼운 첫 단추, 불평등 조약

문제는 조선이 국제법을 전혀 모른다는 데 있었어. 협상은 일본이 이끄는 대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지. 조선은 일본이 요구한 조약 내용을 대부분 받아들였어. 강화도에서 체결되어 흔히 '강화도 조약'이라고 불리는 이 조약의 정식 명칭은 '조일 수호 조규'야. 조약의 주요 내용을 살펴 볼까?

제1조 조선은 자주국으로서 일본과 동등한 권리를 누린다

제4조 조선은 부산 외 두 곳을 개항하고, 일본인이 와서 통상하는 것을 허가한다

제7조 조선 바닷가의 섬과 암초를 조사하지 않아 매우 위험하므로 일본이 자유로이 해안을 측량하게 한다.

제10조 개항장 안에서 일어난 일본인의 범죄는 모두 일본 관원이 심판한다

일본은 조약을 맺기까지의 과정뿐 아니라 조약의 내용조차도 대부분 미국에게 당했던 그대로 따라했어.

얼핏 보면 제1조 내용 때문에 강화도 조약이 일본과 평등한 관계에서 이뤄진 것처럼 보일 수도 있어. 그러나 조선이 자주국임을 유독 강조한 것은 청의 간섭을 미리 막고자 하는 의도였을 뿐 결코 조선의 권리를 지켜 주려 한 것이 아니었어.

이 조약에 근거하여 일본은 이제 조선에서 마음껏 무역 활동을 벌일 수 있게 되었어. 또 조선 해안에 접근하여 군사 기밀을 포함한 여러 정보를 거리낌 없이 얻을 수 있었지. 일본인이 조선에서 범죄를 저질러도 아무런 처벌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이러한 불평등 조약은 당시 서구 열강이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장악하면서 쓰던 수법이었어. 일본은 그들처럼 식민지를 차지하려고 안간힘을 썼어. 1876년에 맺은 강화도 조약은 조선을 식민지로 삼기 위한 첫걸음이었지

32-33P


흥선대원군이 펼쳤던 쇄국정책이 무너지고 그 이후로 계속되는 강대국들과의 조약, 그 당시 약한 나라로써의 설움이 한가득 느껴지는 불평등한 조약의 연속들을 읽어내려가면서 과거 학창시절 역사시간에 얼핏 들어 안개처럼 희미하게 둥둥 떠다니던 단어, 개념들이 연결되기 시작한다.

어린시절 간간히 봤던 역사드라마 '명성왕후','경성스캔들' 등이 떠오르기도 한다.

또한 이 책의 내용 중 흥미로웠던 부분은 그 당시 역사 속 인물간의 생각차이에 대해서도 나타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동학농민운동을 주도한 '전봉준'과 '안중근', 비슷한 색을 가진 역사 속 인물처럼 보이지만 안중근 부자는 동학농민운동을 '조정에 대한 반란'이라고 평가하였다고 한다


그 무렵 곳곳에서 동학당이 벌떼처럼 일어나 외국인을 배척한다면서 관리들을 죽이고 백성의 재산을 약탈하였다. 보다 못한 아버지는 사람들을 모아 동학당에 맞섰다.

-<안응칠 역사> 중에서

<안응칠 역사>는 안중근이 의거를 일으킨 뒤 감옥에서 쓴 자서전이야. '안응칠'은 그의 어릴 적 이름이지


뭔가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 안에서 다양한 이해관계와 관점을 읽어내려갈 수 있어서 흥미롭게 보았던 역사책 '이토 히로부미의 계획 vs 안중근의 반격' 이었다.




#서평책 #책추천 #어린이역사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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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의 집 - 불을 켜면 빵처럼 부풀고 종처럼 울리는 말들
안희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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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의 집', '불을 켜면 빵처럼 부풀고 종처럼 울리는 말들' 참 책 제목부터 부제까지 마음에 든다. 안그래도 요즘 글쓰기 모임을 하면서 '나는 어떻게 예쁜 단어들을 모아 체계적으로 정리해야 하는 걸까?' 라는 질문이 마음에 드러앉아 나가질 않는다.

그런 나의 마음 상태를 생각할 때 단어로 차곡차곡 문장이라는 집을 쌓아 아름담게 문장을 부풀리며, 마음의 종을 울리는 말들에 대한 산문들이 실려 내 마음을 사로잡을 것 같다는 예감을 준다.

안그래도 아직 나의 미숙한 글쓰기 실력을 되돌아보며 조금 더 글을 활기차게 만들 수 있는 팁을 얻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서평 신청한 책. '단어의 집', 읽어내려가면서 뭔가 그런 부분이 좋았다.

소소한 일상에서 지나칠 수 있는 부분을 세심한 관찰력을 통해 보이지 않는 세계를 해석해낸다. 그리고 그 해석은 작게만 느껴졌던 나의 일상이, 삶이 나에게 보내는 암호메시지를 풀어낸 듯한 환호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암호메시지가 풀어지는 순간. 아무생각없이 앞으로 나아갔던 내가 생각을 사유하며 앞으로 나가기에 더욱 발걸음에 힘이 실리는 느낌이다.


과학적으로 틀린 설명이라 해도 상관없다. 모든 현상을 과학적, 논리적으로만 설명하려 들면 세상 모든 신비는 몸을 틀어 삶의 반대편으로 떠나버릴 테니까. 신비가 아니라면 씨앗이 품고 있는 독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 안의 가장 여린 마음에까지 독이 스며 있다는 사실을. 그때의 독은 악이 아니다. 안간힘이고 사랑이다. 인간이 제아무리 약하다 해도 인간은 저절로 강한 면이 있다. 씨앗이 품은 독이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리라. 무력한 인간을 번번이 일으키는 일. 주저앉아도 일으키고 주저앉아도 또다시 일으키는 일

우리는 모두 찢기기 쉬운 피막을 가지고 있다. 어느 누구도 다른 이의 피막에 함부로 막대기를 꽂아 휘저을 수 없다. 대단한 무엇이 파괴되어서가 아니다. 한 인간을 둘러싼 피막이 손상될 때 인간은 죽는다. 아주 작은 찢김으로도 상한다. 그러니 겪고 뒤척이면서 두터워지는 수밖에 없다. 이 여름, 이 겨울을 지나면 또 한 겹의 피막이 생겨나겠지. 이 사랑, 이 터널을 빠져나가도 또 한 겹의 피막이 생겨나 있을 것이다. 그 시간을 믿으며 가야겠다.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

78-79P



그리고 바쁘게 직장일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만 집중하다보면 '스피드'에 집중하는 내 자신을 내려놓고 마음에 따뜻한 공백을 채우며 여유를 선물하는 느낌이 들어 왠지 이 책을 읽는다는 게 기분이 좋아진다.



시간이 우리를 아주 먼 곳으로 데려다 놓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 자신이 그럴듯하게 라벨링 돼 진열대에 올려진 와인 같다는 생각이. 오래되고 희귀할수록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점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제아무리 고급 케이스에 담겨 기쁜 날 선한 선물로 건네진다 하더라도 한 그루 포도나무였던 시절, 포도밭에서의 시간을 떠올리면 눈시울이 붉어지기 마련이다. 짓밟고 망가뜨릴 심산으로 포도나무를 기르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모두 정성과 사랑으로, 길러진 존재들이다. 포도밭의 태양, 포도밭의 평화를 떠올리면 삶에 찢기고 벌려진 상처가 소독되는 기분이다. 슬픈 말이지만, 우리는 모두 그 시간으로부터 와 여기에 있다.

125P

그와 함께 과거를 회상할 때 찾아오는 애잔함 역시 깊게 묵상하게 된다. 참 묘하다. 기쁨과 슬픔 등 다양한 감정을 읽어내려가며 마주하는 안희연의 산문은 일년을 되돌아보는 연말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겨레출판 서평단 하니포터1기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단어의집 #하니포터 #도서리뷰 #산문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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