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위한 자유 - 일의 미래, 그리고 기본 소득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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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독후감입니다.]


1700년 대의 산업 혁명 이후로 우리네의 삶은 많이 변했다.

하지만 유지되고 있는 것도 있으니 그 중 하나는 "일, 노동, 근로, 직업" 이런 단어가 가지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저자는 동의하지 않는 것 같지만 노동은 여전히 생계 수단이자 자존심이며, 인정받는 수단이며, 내가 하루를 생활하는 데 있어 근간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 대해 저자는 노동labour와 일work는 같지 않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뭘까? 저자의 주장을 따라가 본다.

기계가 대신하고 생산성은 나날이 치솟아 이 세상은 생산되자 마자 쓰레기로 버려지는 풍족함으로 가득찬 시대가 되었다. (물론 어딘가의 누구들은 굶주리고 빈곤하게 살아가지만 그것은 분배의 문제이고 생산된 물건과 먹거리는 버려지는 양이 어마어마한 것이 현실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노동의 시간은 줄어들었다.

이제는 주5일 근무를 넘어 주4일 근무제를 말하는 시대다.

그렇게 우리는 노동 시간이 줄어들었는 데 그만큼의 여가와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있을까?

노동 시장의 구조적 문제인지 아니면 더딘 경제 성장의 여파 때문인지 일자리를 갖지 못한 사람들은 계속 늘어나고 질나쁜 일자리만 넘쳐나서 투잡, 쓰리잡에, 보다 보수 좋은 일자리로의 이직을 위한 자기 역량 강화에 내 시간을 온통 쏟아붓고 있으니 그것이 과연 여가 시간이고 자유 시간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저자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더 이상 생존을 위해서만 일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회적 소속감을 추구하려고, 그 속에서 인정을 받으려고,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노동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생업 노동과 성과 사회는 점차 <의미 사회>로 전환되고 있으며, 물질적 번영과 양적 성장보다는 일의 질과 조건, 자유로운 삶을 중요시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작가는 주장한다.

저자가 말하는 의미 사회란, 전통적인 생존 중심 사회에서 벗어나 인간이 삶의 목적과 가치, 존재의 이유를 근본적으로 묻는 새로운 사회형태라고 할 수 있다.

과거 산업사회에서는 노동이 곧 정체성이었고, 노동을 통한 생산성과 효율이 사회적 가치를 구성했다.

그러나 인공지능과 자동화 기술이 노동을 대체하면서, 더 이상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보다 ‘왜 그것을 하느냐’가 중요해지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러한 전환 속에서 저자는 노동의 의미 변화를 주목한다.

그는 노동이 인간의 존엄을 구성하는 핵심이라고 보았던 전통적인 인식이 기술사회에서 무력해지고 있다고 말한다.

미래에는 단순 반복 노동이나 기계적 업무는 기계에 의해 대체될 것이며, 인간이 수행할 수 있는 일은 감정, 창의성, 관계와 같은 ‘비계량적 가치’를 중심으로 재정의될 것이라 주장한다.

즉, 돌봄 노동, 예술, 교육, 철학과 같은 활동이 중심이 되는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는 예측이다.

이러한 변화는 노동시장의 대규모 구조조정을 의미하며, 필연적으로 소득 불균형과 대량 실직 문제를 동반한다.

저자는 여기에 대한 해법으로 기본소득을 제안한다.

그는 기본소득을 단순한 복지 수단이 아니라, 인간이 삶의 의미를 추구하고 자율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존재적 조으로 본다.

기본소득이 보장된다면 사람들은 생계를 위해 억지로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고, 각자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치 있는 일에 몰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디지털 기술이 인간의 사고방식과 사회 구조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며, 기술의 발전이 인간 소외로 이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철학적 성찰과 윤리적 통제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결국 저자가 말하는 의미 사회는 기술적 진보가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술을 통해 삶의 질과 자율성, 내면적 충만을 실현할 수 있는 방향으로 재편되어야 함을 뜻한다.

그는 우리 사회가 이제 "어떻게 더 많이 생산할 것인가"에서 벗어나, "무엇이 좋은 삶인가",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라는 질문을 중심에 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이런 프레히트의 철학은 단지 미래의 예측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삶의 방향성과도 맞닿아 있다.

기술이 아닌 의미가 중심이 되는 사회, 즉 <의미 사회>는 더 이상 공상적인 비전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앞에 놓인 현실적인 과제가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다.

오늘날 모두를 위한 번영에 속하는 것은 산업 사회의 역사에서 일찍이 없었던 더 많은 자유다.

1950년대와 달리 번영은 이제 순수 경제적인 개념이 아니라 건강한 몸과 마음의 문제이자 온전한 환경, 평화로운 공존, 문화적 혜택, 감각적 욕구 충족의 문제다.

p14~15, '들어가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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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영감에 관하여 - 천천히 사유할 때 얻는 진정한 통찰의 기쁨
머리나 밴줄렌 지음, 박효은 옮김 / 다산초당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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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산만함을 좋지 않은 것이라고 배운다.

집중은 미덕이고, 산만함은 그 반대라는 말이다.

하지만 Marina Van Zuylen의 이 책 <창조적 영감에 관하여 (원제 : 『The Plenitude of Distraction』>는 이런 상식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산만해도 괜찮다'는 말을 넘어, 산만함이야말로 깊은 사유와 창의적 발상의 출발점일 수 있다는 그녀의 주장이 은근하고도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저자는 현대 사회가 효율성과 결과 중심의 가치에 매몰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우리는 늘 뭔가를 해내야 하고, 집중해야 하며, 성과를 내야 한다.

산만함은 이 리듬을 흐트러뜨리는 장애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녀는 이 장애를 하나의 '틈'으로 보는 듯 하다.

그리고 이 틈을 통해, 우리는 오히려 사유의 여백과 감정의 느슨함, 창조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주장은 저자가 여러 고전 철학자들의 주장에 대해 고민하고, 몽테뉴와 데이비드 흄을 통해 산만함에 대한 자신의 논지의 바탕을 풍부하게 제시한다.

몽테뉴는 자신의 수상록에서 일정한 흐름 없이 주제를 넘나들고, 스스로의 생각을 끊임없이 뒤집는다.

집중 대신, 그는 산만함의 형식을 글쓰기의 미학으로 승화시켰다.

저자는 이 점을 짚으며, 산만함이 단지 주의력 결핍이 아니라, 자기 반성적 사유의 한 방식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흄 또한 ‘자아’를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인상과 감각의 다발로 보았고, 인간의 사고는 감정과 연상작용에 의해 산만하게 흘러간다고 보았다.

집중이 아니라 흐름과 연상, 이것이 사고의 진짜 모습이라는 점에서, 흄의 철학은 저자의 주장과 절묘하게 닿아 있다.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그녀가 산만함을 '만족 지연'과 연결시키는 대목이다.

현대의 주의력 위기 담론은 산만함을 즉각적인 자극 추구와 동일시하지만, 저자는 오히려 산만함이 만족을 미루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하나의 생각에 몰입하지 않고 머뭇거릴 수 있는 힘, 결론을 유보하고 다른 길로 새는 용기, 바로 그 유예의 순간이야말로 창의성과 사유의 가능성을 여는 문인지도 모른다.

이 지점에서 창작 과정에서 겪는 ‘막힘’이나 ‘돌아섬’이 단순한 회피가 아니라 무의식적 사유가 작동하는 창조의 배경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고 저자가 무조건적인 산만함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말하는 산만함은 깊은 사유와 연결된 지연의 미학이지, 아무 데로나 튀는 집중력 저하 상태가 아니다.

그녀는 산만함이 “escape”가 아니라 “delay”라고 말하고 있다.

현실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핑계가 아니라, 어떤 생각을 더 오래 숙성시키기 위해 걸음을 늦추는 선택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특정한 결론으로 독자를 밀어붙이지 않는다.

오히려 책 자체가 산만함의 형식을 닮았다.

서술은 유려하지만 일직선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다양한 철학자와 문학가의 사유를 참조하면서 지적 유영을 유도한다.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며 한 부분을 읽고 나서 다음 장을 넘길 때 뜬금없는 사진들을 보며 딴 생각에 빠지곤 했던 것 같다.

이런 것도 저자가 의도했던 바였을까?

아이러니하게도, 그 ‘산만한’ 독서 경험이 이 책의 주제를 더 깊게 체험하게 만들었다.

이른바 '유익한 산만함'을 통해서라는 말이다.

더불어, 이 책과 저자의 주장들은 산만함에 대한 죄책감을 거두어낸다.

오히려 그 산만함을 인간다운 사고의 조건으로 보게 만든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다음 번 집중이 흐트러지는 순간이 꼭 실패처럼 느껴지지는 않을 것같다.

어쩌면 그때가, 새로운 사유가 싹트는 순간일지도 모르니까.

우리의 사고방식을 재정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유연하고 복잡하며 창의적인 사고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는 지난한 노력이 요구되지만, 지금 우리가 탐구하고 있는 '유익한 산만함'이라는 독특한 경험은 우리를 틀에 박힌 사고에서 벗어나게 하면서 분명 우리를 또 다른 세계로 안내할 것이다.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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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성에 집착하는 시대 - 창의성은 어떻게 현대사회의 중요한 가치가 되었는가
새뮤얼 W. 프랭클린 지음, 고현석 옮김 / 해나무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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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독후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창의성을 거의 신념에 가깝게 믿는다.

창의성은 경쟁력을 높이고, 혁신을 가능케 하며, 문제 해결의 핵심 자원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새뮤얼 W. 프랭클린은 『창의성에 집착하는 시대(The Cult of Creativity)』에서 이런 믿음이 결코 중립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특정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발명되고 숭배되기 시작한 문화적 산물임을 짚어낸다.

그는 특히 냉전기의 미국 사회,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심리학의 도구화가 맞물려 창의성이 체제 우월성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동원되었음을 언급한다.

창의성은 자유, 개인주의,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지만, 실은 자유시장과 경쟁의 가치관을 주입하는 기제로 기능했다.

오늘날의 창의성 개념은 이와 같은 기원을 잊은 채 사회 전반에 숭배의 대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저자는 이 숭배의 세 가지 우려를 말한다.

첫째, 창의성이 예술에서 ‘새로움’이라는 단일한 기준으로 정립되며, 과거의 기법이나 유지·재현의 노력은 예술에서조차 비창의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둘째, ‘새로운 아이디어’의 생산 자체가 창의성의 핵심으로 간주되면서, 과정, 관계, 반복, 숙련과 같은 요소는 창의성의 바깥으로 밀려난다.

셋째, 창의적인 직업과 그렇지 않은 일을 분류하는 사회적 위계가 만들어지며, 돌봄, 청소, 정비 같은 유지의 노동은 비창의적인 저가치 노동으로 취급된다.

이에 덧붙여 저자는 창의성이 윤리와 공존을 위한 역량이어야 하며, 돌봄의 노동, 관계를 회복시키는 기술, 느린 변화와 같은 요소들도 창의성으로 인식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듯 싶다. (내가 너무 앞서 간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ㅠㅠ)

어떤 면에서 2025년형 창의성은 ‘기발한 아이디어’가 아니라 ‘관계적 전환’과 ‘공동체적 재구성’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여하튼 저자의 지적처럼, 현재의 창의성 숭배가 지속되는 한 이런 창의성에 대한 생각은 보완과 수정이 필요해보인다.

이 책은 단지 창의성이라는 개념을 역사적으로 따라가본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무엇을 가치 있다고 믿고 있는지, 그 믿음이 어떤 위계와 배제를 낳고 있는지를 묻고 있다고 보인다.

저자는 "창조하는 능력은 중요하지만, 창의성이라는 개념은 자본주의 외부에서 존재하지 않았으니, 혁명적 힘의 원천이라는 생각은 내려놓는 것이 타당할 것"(p328) 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곧 창의성이라는 말 자체를 무력화하자는 뜻이라기 보다는, 그 개념을 둘러싼 신화를 걷어내고, 다시 정립하자는 제안이라고 읽힌다.

돌봄 노동이 ‘창의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저평가받고, 반복과 유지의 일이 ‘혁신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보이지 않게 되는 현실의 우려는 우리가 창의성이라는 개념을 대면할 때의 생각을 다시금 하게 만드는 것 같다.

창의성은 발명의 능력이 아니라, 보살핌과 책임의 감각일 수도 있다.

그럴 때, 창의성은 다시 ‘살아있는’ 힘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좀 낭만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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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마음 - 도시는 어떻게 시민을 환대할 수 있는가
김승수 지음 / 다산북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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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독후감입니다.]


전주라는 도시에 가본 적이 있을까?

일 때문에 주변 완주, 봉동읍까지는 다녀봤지만 사실 전주라는 도시 속으로 들어간 적은 한번도 없었던 것같다.

아직 난 우리나라에서 안가본 곳이 너무나도 많다는 이야기다. ㅡ.ㅡ

저자는 2014년부터 8년 간 전주 시장을 지낸 정치인이자 도시 혁신가라고 소개되어 있는 것을 본다.

저자는 정치인과 도시혁신가라는 둘 중에서 어느 쪽을 자신의 본캐로 생각할까?

책은 저자가 전주 시장으로 취임해서 전주라는 도시를 정의하고, 그에 맞춰 도시의 한 부분을 바꾸어나간 과정과 결과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책의 도시, 전주

책이 삶이 되는 책의 도시, 전주

p336

언젠가 읽었던 유현준 교수의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이 떠올랐다.

그때는 유현준 교수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잘모르면서 저자가 말하던 "거리 (골목)"에 눈이 갔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의 '무엇'은 결국 도시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 관계, 사회적 상호작용, 문화적 맥락을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고, 도시의 생명력은 이런 비가시적인 것들에서 비롯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관계가 생기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욕망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과거와 연결된 공간을 존중해야 한다."

"도시는 ‘시간의 구조’도 고려해야 한다."

"건축가와 정책 입안자가 사람의 ‘생활’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더불어 건축과 도시 공간은 기능이 아니라, 관계와 삶을 담는 그릇이라는 것이 그 책이 주는 메세지였다는 생각이다.

이번 책 <도시의 마음>은 저자가 유현준 교수의 생각을 현실에 그대로 실현시켜 놓은 과정이 아닌지 싶을 정도로 닮았다.

도시의 가치는 시민들의 평범한 삶을 지키는 데 있습니다. 평범한 삶은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균열 없는 일상이 응축되어 평범해지고, 그렇게 삶의 균형이 내재화될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다움'입니다. (...)

도시의 기본은 평범한 삶을 비범한 삶으로 도약시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일상을 지켜서 평범에 이르게 하는 도시가 좋은 도시입니다.

p29-30

저자가 말하는 도시의 가치가 이러한데 현실의 도시는 '시민은 없고 고객만 남은' 휴먼 스케일의 도시에서 자본 스케일의 도시로 향해 가고 있다.

저자는 주장한다.

자본사회가 잉태한 경쟁과 승자 독식의 세계에서 이와 같은 것들을 중재하고 완화하며 어울어지도록 할 수 있는 도시 내 '공공장소'가 필요해졌다고 말이다.

그 '공공장소'를 만들어가는 일이 그의 앞에 주어졌다는 말이다.

도시는 '사람을 담는 그릇'이니, 사람이 사용할 그릇, 사람이 살아갈 도시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는 사람들의 힘이 모여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선 방향의 설정이 필요하고, 이 방향의 좌표가 되어주는 것이 관점과 안목이며,

관점은 연대와 변화를, 안목은 깊이를 이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런 관점의 공유는 방향성에 대한, '왜'라는 질문에 대한 인식의 공유가 된다.

저자가 "책의 도시"를 만들어가기 위해 공을 들인 부분이다.

시장으로서의 저자가 생각한 '공공장소'는 도서관이었다.

저자의 재임기간동안 시작되고, 계획되고, 완결된 많은 도서관들을 책을 통해 보여준다.

그 도서관 하나 하나에 저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땀과 고민과 수고가 들어갔고, 그것들을 우리는 책을 통해 절절하게 느낄 수 있다.

저자가 들려주는 전주의 도서관들은 책을 통해 전달받는 것에서 멈추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기분이다.

시간을 내서 그 한 곳 한 곳을 둘러보며 그 마다 마다의 장소가 가진 풍경과 분위기와 느낌을 공유하고 싶어진다.

이렇게 도서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읽고 있으면, 저자가 고민했을 '공공장소'라는 개념의 정의와 역할에 대한 생각은 한발 물러서게 된다.

그래도 공공장소가 적당한 성공을 뛰어넘어야 하는 이유가 있으니 그것은 '사회적 설득'이라는 말에는 고개를 끄덕거리게 된다.

우리나라는 인구의 많은 숫자가 도시에 몰려산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도시는 도시로서의 가치를 구현할 수 있는 무언가를 통해 존재의미를 살려야 하고, 도시에 사는 사람들을 통해 경험적 확장을 이어가야 한다.

이런 도시의 확장은 결국 시민 삶의 확장이 될 것이다.

우리는 과거를 거쳐 현재를 살고 미래를 살아갈 것이다.

도시 역시 미래에도 사람들의 삶의 현장으로서 존재하고 이어질 것이다.

"새로운 세상에는 새로운 종류의 인간이 필요합니다." (p332) 라는 말을 저자는 인용해서 들려준다.

계속 변화, 발전해나가는 도시에는 어떤 새로운 종류의 인간이 필요할까?

"변화된 공무원 집단"이 그 중 하나라고 저자가 말하는 듯 싶다.

나아가 "새로운 종류의 인간이란 새롭게 태어난 인간이 아니라 자각하는 인간" 이며, "관점과 안목이 내재화된 성실함을 가진 인간"이라고 말하며, "이 새로운 인간이 도시의 안정된 다른 힘" (p336) 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런 새로운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있는 도시는 미래에도 도시가 사람들의 그릇이 되도록 지켜낼 것이고, 관계가 유지되는 그런 공간으로 만들어 갈 것임을 믿는다.

저자가 자랑하는 전주, 책의 도시 전주로 찾아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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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병과 마법사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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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독후감입니다.]


SF 판타지 소설이다.

이쪽 장르의 소설은 워낙에 서양쪽이 강세라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냥 술술 읽힌다. 금방 읽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받자 마자 다 읽었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뭐랄까 흡입력이 있었다.

오늘... 재미있는 소설과 그 소설을 쓴 작가를 찾았다.


기병과 마법사...

혹자는 제목에서 칼을 든 남자 병사와 마법사 여자와의 로맨스를 떠올릴 지도 모르겠다.

또 다른 누군가는 검은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의기투합한 원 팀을 떠올릴 지도 모르겠다.

둘 다 맞다.

시대적 배경은 마치 광활한 만주 벌판을 앞마당인 양 주름잡던 고조선과 고구려를 떠올리게 하는 그런 시대다.

성군聖君이었다가 제 성격찾은 폭군暴君이 있어 아양을 떨거나 숨죽이고 살아가야 하는 나라가 있었다.

그런 왕의 조카인 영윤해는 야인野人들의 위협에 맞서 싸우는 변경 지방으로 유배아닌 유배를 떠난다.

변경의 슬룸고리에 도착한 윤해는 자신의 꿈에 나타나는 못알아듣는 말을 하는 여자와 소만큼 커다란 몸집의 곰개의 정체를 밝히려 그 벌판 어딘가에 위치한 거대한 장벽, 거문담을 찾아간다.

잠을 잔다는 것은, 꿈을 꾼다는 것이고, 꿈을 꾼다는 것은 윤해가 그 꿈이 자신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이제 윤해는 그 꿈 속에서 자신은 마법사이자 예언자이며, 세상의 종말을 가져올 파괴자가 나타날 그 때에 그 파괴자를 막아내야 할 사명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1021년의 주기를 가지고 세상에 나타나는 파괴자는 윤해와 기병대장 다르나킨이 주변의 모든 병력을 모아 대비하고 있던 그 곳에 나타난다.

드디어 세상을 지키기 위한 기병과 마법사가 파괴자에게 맞선 싸움이 시작되었다.


소설을 읽어가는 중에 뜬금없다고 해야할 숫자가 나타난다.

"1021"

소설 속 천문을 연구하던 관리는 이것을 세상에 무언가가 나타나거나 발생할 주기라는 것을 파악했고, 그 정확한 시기를 윤해에게 알려준다.

1021...

작가는 이 숫자를 어떤 의도로 쓴 것일까?

소수, 정중한 수, 거울수, 회문수라는 관계까지는 어찌 어찌 억지로라도 찾아낼 수 있지만 그 이상은... ㅡ.,ㅡ;;

흠... 나는 모르겠다.

왠지 무언가 특별함이 있을 것같은데 하는 의심만 남았다. ㅡ.ㅡ

윤해는 파괴자에게 대항할 수 있는, 그녀에게 특별히 주어져 있는 그 무언가를 마침내 발견하고 결국 파괴자를 물리친다.

윤해에게 주어진 그 특별함이란 자신 스스로가 다른 세상과 연결하는 문門이 되는 것.

그 문을 통해 윤해는 다른 세상으로부터 파괴자를 함께 물리칠 수 있는 협력자들을 불러들이게 된다.

그 협력자의 마지막 구성원은 미래의 윤해.

여기서 작가의 의도를 생각해본다.

왜 미래의 윤해가 포함되어 있는 것일까?

현재의 윤해가 있는 데 왜?

그리고 협력자의 누군가가 말한다.

꼭 이 순서대로 협력자들을, 다른 예언자들을 이 세상, 이 세계로 불러들여야 파괴자를 물리칠 수 있는 고리가 완성된다고.

그 순서를 밝혀낸 것이 대단하다고.

그 순서를 밝혀낸 자... 미래의 윤해...

그렇다면 1021년의 주기가 반복되면서 세상은 종말을 맞이했다는 말이다.

미래의 윤해가 이 파해법을 밝혀내기 전까지...

수 많은 평행 우주가 있어 그 세상들이 지금의 윤해가 불러들일 지금 이 시간, 어느 SF 소설에 나오듯 행성이 일렬로 정열하듯, 평행 우주가 서로 연결되어 이 문과 저 문을 통해 고리를 형성하는 예언자들이 오가게 되는 지금 이 시간까지...

파괴자와의 싸움은 처절하게 계속되었다는 말이다.

이제 파괴자는 거문담의 저 깊은 어딘가로 가두어져 버렸다.

이 시간 이후에는 1021년의 주기는 반복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다음 주기가 올 때까지 우리에게 1021년 이라는 시간이 다시 주어진 것일까?

여하튼 세상은 종말적 위험에서 벗어났다.

그렇다면 이제...

기병과 마법사는 로맨스를 시작할 수 있을까?

마로하는 윤해 바로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뒤편으로 사라졌다. 문을 지나듯, 윤해가 문이 되어 마로하를 자기 세계로 보내주었다.

윤해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

그래도 윤해는 외롭지 않았다. 윤해에게는 이제 삶의 초원을 함께 살아갈 사람이 있었다. 혼자 버려진 윤해를 도와 날개가 되고 말이 되어준 사람.

p379~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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