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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엑시트 - 불평등의 미래, 케이지에서 빠져나오기
이철승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5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독후감입니다.]
이철승의 『오픈 엑시트』는 지금 한국 사회가 직면한 구조적 불평등을 역사적·문명론적 기원에서부터 진단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사회적 상상과 실천의 경로를 제시하는 책이랄 수 있겠다.
저자는 "벼농사 체제"라는 문명적 구조가 어떻게 오늘날의 인구 위기, 노동시장 경직성, 이민 배제, 그리고 정치적 양극화까지를 이끌어 왔는지를 규명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엑시트"의 길을 찾는다.
저자는 우선 동아시아 문명의 근간을 형성해온 벼농사 체제를 서구의 밀농사 체제와 비교함으로써 한국 사회가 가진 독특한 사회구조를 조명한다.
밀농사 체제가 상대적으로 건조하고 개방적인 자연환경에서 사적 토지 소유와 가족 단위의 자율성을 강조하며 발전해온 데 반해, 벼농사 체제는 고도의 협력과 국가 주도의 수리체계, 혈연 중심의 공동체 의존을 낳았다.
이 구조는 국가와 가족이 개인 위에 군림하는 문화적 토양이 되었고, 지금의 노동시장, 교육제도, 가족정책에까지 깊게 뿌리내려 있다.
이 구조가 초래한 불평등은 세 가지 영역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첫째는 인공지능과 자동화에 의한 노동시장 재편이다.
벼농사 체제에 뿌리를 둔 한국의 노동시장은 경직적이고 폐쇄적이며, 새로운 기술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유연성을 결여하고 있다.
노동자는 이 체제에서 스스로 빠져나갈 수 있는 자율적 ‘엑시트’의 통로를 갖지 못한 채, 가족과 기업, 국가에 종속된다.
저자는 이러한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노동 시장의 경직성을 해소해야 하고, 평생학습과 생애 전환을 보장할 수 있는 조건이 필요하다고 본다.
둘째는 초저출산 문제다.
한국 사회는 결혼과 출산을 여전히 이성애 가족 내에서만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케이지 구조’를 고수하고 있다.
이 구조는 비혼자·무자녀자에게는 사회적 자원과 휴식의 기회를 제공하지 않고, 오히려 출산과 육아의 부담을 여성과 가족 단위에 전가한다.
저자는 이를 사회적 보험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컨대, 육아휴직과 동등하게 ‘비출산자 휴직’을 보장함으로써, 가족이든 비가족이든 모두에게 삶의 여유와 생애 전환의 권리를 주자는 것이다.
이는 돌봄의 부담을 개인화하지 않고 사회화하는 하나의 전략적 전환을 뜻한다.
셋째는 이민과 이민자의 문제다.
한국은 여전히 민족 단일성 신화를 강하게 유지하며, 외국인을 ‘노동력’으로만 바라보는 협소한 시각을 지닌다.
그러나 저자는 인구 감소와 고령화, 기술 변화가 겹치는 상황 속에서 이민자야말로 한국 사회의 새로운 시민으로 포함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를 위해선 이민자에게도 정치적 권리를 부여하고, 공동체 구성의 주체로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결국 정치로 귀결된다고 생각한다.
내 기준에선 한국 정치가 여전히 벼농사 체제의 가족주의·권위주의 문화를 답습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 구조 속에서 국민의힘이나 민주당이나 모두 기득권적 질서를 유지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다고 본다.
또 저자는 미국의 트럼프주의처럼 한국에도 문화적 보수주의가 점차 확산될 가능성을 경고하면서, 그 대항선으로 새로운 시민성, 새로운 공동체 정치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를 위해선 문화적 평등과 경제적 자유를 동시에 구현할 수 있는 ‘시민 주도적 엑시트’가 정치적 의제로 떠올라야 하며, 기존의 좌우 프레임을 넘는 사회적 상상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더불어 노동 시장에서의 엑시트 옵션의 증대는 저자의 주장과 같이 양 날의 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동의한다.
종국엔 "개인과 조직의 수준에서는 가장 혁명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지만, 사회 전체적으로는 불평등을 확대할 수 있다." (p347) 것에 대한 말이다.
저자가 줄곧 비판해온 기업 내의 연공 서열의 존재는 1990년 대 국내에 도입된 연봉제가 여전히 호봉제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과 결을 같이 하지 않을까 싶다.
저자가 지적하듯 협업을 중시하는 벼농사 문화 체제의 우리로서는 칼로 자르는 듯한 직무 평가 조차 어려운 것이기도 하고, 그 놈의 정情은 연공 서열을 넘어선 지배층의 학연, 혈연, 지연이라는 연緣의 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그 연緣들에의 아웃사이더들끼리의 암묵적인 방어책이었기에 더더욱 이어지고 또 이어졌던 것이 아닌가 싶다.
게다가 엑시트 옵션의 증대란 결국 한 발 더 긱gig경제로의 진입을 의미하기도 하려니와, 최근에 읽은 <모두를 위한 자유>에서 언급된 노동 시간의 단축에 따라 확보된 개인의 자유 시간마저 여가가 아닌 개인 역량 확대, 확장 및 성장에 투입해야 함을 말하기도 한다.
여기에 더해 학교 교육에서 지적되던 교육 혜택의 불평등은 계속 이어진다는 말이기도 해서 계급, 계층 불평등의 격차는 확대될 수 밖에 없다는 말인게다.
과연 엑시트 옵션의 증대가 보통의 사람들에게 필요하고 유용한 것이긴 하는 것일까?
저자의 주장을 되새겨보면 전통적 좌파나 우파의 이념 틀에 잘 들어맞지 않는다.
노동시장에서의 엑시트, 가족제도의 유연화, 젠더·이민 정책, 기본소득적 상상력 등은 좌파적이다.
반면, 노조 비판, 문화적 보수성과의 접점, 자율성 강조는 우파적 요소도 내포한다.
그의 사상은 중도 또는 제3지대적 성향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내 기준에서는 보수 우파에 더 가깝다. (그렇다고 보수 우파가 잘못되었다거나 틀렸다는 말은 아니다. 정치적 성향이 혹시 이쪽이 아닌가 싶다는 말이다.)
다르게 말하면 엑시트 옵션의 다양화, 확대라고 말하지만 그 옵션에의 접근성이 떨어지는 사람들에게는 눈뜨고 코 베이는 현실의 확장이라고 밖에 안보인다.
약자를 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강자가 더 강해지는 마당을 더 견고하게 다지고 있는 것, 그 자체라는 말이다.
"내가 너무 멀리 나갔다."
모든 사람이 약자는 아니고, 그 약자 중에서 강자로의 도전을 성공적으로 이루어가고 있는 사람들도 있으니...
여하튼...
『오픈 엑시트』는 우리 사회가 케이지를 부수고 열려 있는 탈출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책이다.
그리고 그 탈출은 단지 개인의 탈출이 아닌, 사회 전체의 질적 전환을 뜻한다.
이 책은 오늘날 한국 사회의 문제를 문화적·제도적 기원을 통해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싶은 독자에게 꼭 필요한 사유의 지도이며, 동시에 정치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담론의 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