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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14년이라는 시간을 살아오면서 본능적으로 한 것 이외에 3000번이라는 횟수나 시간을 채운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저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가는 도중에도 여러 과정이 있었고 3000배도 너무 힘들었지만 재미있었고 성취했다는 기쁨이 컸다. 비록 1000배와 2000배 사이에 시간을 조금 가졌었지만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흔하냐며 스스로를 위로를 하긴 했지만.

 9월 1일부터 3000배를 하기 위해 저녁마다 부모님과 함께 108배를 매일 했었다. 힘들다기 보다 매일 10분씩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 상당히 귀찮았지만 내가 절을 하면서 깨끗해지는 느낌이 들었고 내 미래가 좀 더 좋아질거란 생각에 마냥 귀찮기만은 않았다. 이번에는 검도 심사와 백련암에 가야하는 날짜가 겹쳐서 관장님께 부탁해서 서류로 합격을 했다. 서류심사는 다른 관원들에게 해주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두번째라 너무 죄송해서 3000배라도 성취하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굴뚝같았다. 그리고 저번에 성공하지 못했던 것은 내가 단지 1000배만 하려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3000배를 하지 못했다, 나는 하면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라는 변명도 하고 싶었다. 온갖 기합을 다 넣고 내일 가서 해야 할 절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데 외삼촌에게서 전화가 왔다. --------------------------------------

고심원     관음전

 

 시간도 모자라고 절을 하기 전에 기운을 뺄까봐 해인사에서 백련암까지는 택시를 타고 갔다. 저녁에 사람들이 모여 절을 할 관음전 옆 탈의실에서 절복으로 갈아입고 관음전에는 미리 자리를 잡아 두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 고심원에 도착하여 성철스님 상 앞에 경건한 마음으로 촛불과 향을 밝히고 절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절안에 들어가서 향을 밝힐때 잠깐잠깐 굉장히 짧게 정신이 휙-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0.2초 정도의 느낌이랄까? 절에와서 이런 적은 없었는데 긴장해서 그랬던 것일까?

 약간의 긴장을 가지고 절을 하니 컨디션이 좋았다. 100배를 하고 엄마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시 100배를 계속하다 400배에서 10분 휴식을 하였다. 컨디션은 정말 좋았다. 고심원을 나와서 잠깐 그 주위를 걸어다니다 다시 들어와 400배를 시작했다.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단지 지루했던 것 같다. 지금은 지루하다는 느낌이지만 나중에는 한배 한배가 너무 힘들지 않을까, 지레 겁이 들기도 했다. 1000배는 수월했다. 저번에 내가 1200배 가지고 뭘 그리 힘들어했는지 모를 정도였다. 정혜륜 아줌마와 딸 민소를 고심원에서 만났다. 공양시간이 되자 같이 내려가 밥을 먹는데, 어흑, 너무 맛이 없었다. 그래도 점심도 못먹고 배가 너무 고파서 허겁지겁 먹었던 것 같다.

 6시가 되자 공양간을 나와 이를 닦고 관음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가끔가다 만나는 엄마의 도반들께 인사를 드리고 콩닥콩닥 뛰는 가슴으로 앉아있었다. 엄마는 사람들과 인사하러 다닌다고 나 혼자만 앉아있었다.   6시 30분. 절을 시작했다. 아까 1000배를 해서 다리가 조금씩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저번과는 달리 이번엔 3000배를 성공시키고야 말겠다는 투지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힘들다는 생각이 점점 머리에 차오르기 시작할때 쯤 다시 투지가 불타오르자 힘이 불끈 솟아올랐다. 500배 까지는 힘들었지만 이번에도 엄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 기뻐하실 할머니, 내가 성공한다는 꿈을 꾼 오빠, 불명을 받고 싶은 마음들이 나를 지탱시켜주었다. 700배째를 시작하자 짜증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여기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거지? 왜이렇게 힘든 일을 하는거지? 여기 있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으로 하는거지? 이번은 포기할수 없는데..'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나서 몸이 잠깐씩 부르르 떨렸다. 그런 짧은 시간동안 그토록 강한 분노를 느낀건 참 오랜만이란 생각이 들었다. '학교 다닐땐 화가 나는 일이 많았는데. 요즘은 별것도 아닌것에 화가 나고 혼자 참는다고 애썼구나. 사춘기라고 난 화를 정당화 시키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런 생각조차도 화가 나서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이를 뿌득뿌득 갈며 1000배를 끝내고 돌아온 휴식. 몸에선 땀이 뻘뻘 났고 짜증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아직 1000배나 남았구나. 정말 끔찍해. 그토록 각오 하고 왔는데 이렇게 화가 날수가..' 그렇지만 앉아서 사람들을 바라보고 이것저것 먹을거리를 먹으며 앉아있자 30분은 그리 빨리 지나가지 않아서 다행이다 싶었다. 엄마는 내가 1000배를 몰아서 했던 것에 대해 놀란 눈치였다. 처음엔 1000배를 다 할 생각은 없었지만 하다보니 지금 1000배하면 일찍 들어가서 잘 수 있겠구나 싶어서 이를 악물고 끝까지 해냈다. '저번에 했던 1000배는 도대체 뭐지? 그때는 스스로도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왜그렇게 힘들었던 거지? 역시 마음먹기 달린 일이었나?'

 또다시 절을 시작했다. '자신을 다른 사람앞에서 몸을 낮추는 행위를 3000번이나 하다니. 도대체 무슨 의미지? 자신을 뽐내기 좋아하는 인간이 아무리 대단하다지만은 지금은 형체조차 보이지 않는 사람을 존경해서 이런 수고를 하는건가? 뭣땜에? 난 뭣땜에 엄마가 가자고 했을때 선택권이 있는 상황에서 간다고 했을까? 엄마는 왜 할까? 다른 사람들은 뭣 땜에 하는거지? 왜 엄마한테 3000배가 좋다고 권하는거지? 뭣땜에?? 좋은 일이 생긴다고? 욕심 때문인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내 머릿속에서 헤메기 시작했다. 이번은 800배를 해야했는데 무릎에 힘이 주어지지 않기 시작했다. 400배를 하고 쉬려고 했는데 200배를 하고 주저앉아버렸다. 엄마도 같이 쉬었는데 나를 무척 자랑스러워 하셨다. 어떻게 절을 끝낼까 상의하는 도중에도 사랑스럽다는 눈빛을 보내는 엄마. 우스웠다. 그렇게도 나와 3000배가 하고싶으셨던 걸까. 진작 못해드린게 아쉬울 정도였다. 나를 휘감던 분노는 일찌감치 사라졌고 얼마남지 않은 절을 채우고 싶었다.

 다시 200배를 하면서 무릎은 너무너무 아파왔다. 이제는 무릎만의 힘으로 앉고 일어설 수가 없어서 손을 먼저 짚고 절을 했다. 손목도 아파왔다. 뻣뻣해져서 다른 방향으로는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구부러졌다. 그때는 조금 무서웠다. 무릎이 어떻게 되는건 아닐까, 하고. 그렇지만 엄마는 괜찮을거라고, 하고나면 오히려 건강해질거라고, 의학적으로는 무리가 간다고 안좋다고 하지만 기도의 힘으로 괜찮을거라고. 그리고 하시는 말씀, 부처님은 아직 못믿어도 엄마는 믿지? 하하 날 꽤뚫어본 듯했다. 평소에는 부처님을 어떤 장애물하나 없이 믿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힘들어오자 난 조금씩 의식했던 것 같다. 원망도 하고. 기독교처럼 조금 쉽게 하는 방법은 없나요? 꼭 이렇게 힘들게 종교생활을 해야하는 건가요? 하고. 그렇지만 난 엄마는 믿는다. 의견대립이 생기긴 했지만 엄마니까. 우리 엄마는 나에게 항상 믿음을 줬으니까.

 800배 쉬는 시간에 난 400배를 남겨두고 있었다. 엄마는 다른 분들과 이야기하시며 자랑하셨다. 말붙여보고 싶은 분들이 많았는데 아쉽게도 난 온전한 상태가 아니였다. 뭐랄까, 마약을 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들뜨고 정말 힘들지만 뭔가가 굉장히 기쁜 기분. 세상은 몽롱하게 보이고 내 생각에만 100%빠져드는 느낌.

 나머지 400배는 힘들었지만 빨리 끝내고 싶었던 조바심이 더 힘들었던 것 같다. 마지막 100배를 끝내고 중간에 빼먹었던 것 같은 10배를 하고 뒤를 돌아 쉬고 있던 엄마에게로 갔다. 엄마도 활짝 웃으며 날 끌어안았다. 그런데 끝나는 그 순간부터 난 내가 뭣땜에 그렇게 힘들어했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1시였다. 엄마는 아빠에게 전화해서 내가 드디어 해냈다고 말씀드렸다. 아빠는 무척기뻐하셨다. 아빠는 월요일 공부를 빼주신다고 하셨다! 아하하하, 첫번째 보람이구나.

 방으로 들어가니 이미 한분이 누워계셨다. 저번에는 잠들지 못했는데 이번은 눕자마자 따뜻한 방바닥과 한몸이 되면서 금방 잠이 들었다. 6시에 일어나는 것이 힘들정도로 개운하게 잤다.

 7시에 불명을 나누어 주신다는 말을 듣고 혼자 이닦으로 세면대로 갔다. 드디어 불명이구나, 아하하 내 꼴이 정말 말이 아니다. 땀으로 범벅된 머리가 엉망이었다. 그렇지만 이번은 신경쓰지 않을 것 같다. 차가운 방에서 30여명 쯤 되는 사람들과 스님을 기다렸다. 저번에 엄마와 따로 들은 이야기를 1시간 정도 하시고 불명을 나누어주시는데 어라? 왜 난 없지? 몇번 뵈어서 내 얼굴을 익힌 스님께서 겸연쩍은듯 웃으셨다. "아가씨 것은 없네. 나중에 어머니하고 같이 저한테 오세요." 엄마를 이끌고 방으로 가서 스님을 기다리니 스님이 착각하셨다고 웃으셨다. 밑에 있는 내 이름을 못보셨던 가보다. 불명을 주시는데 정말 이 이름에 세상이 담겨있는 느낌이 들었다. "無有行" 없고 있음을 행하라. 와~ 엄마도 정말 멋지다고 하셨다.

 이렇게 나의 백련암 3000배는 끝났다. 하지만 내 일생에서 가장 힘든 밤이었으므로 잊기는 정말 힘들것 같다. 매일매일 108배 하시라는 스님 말씀에 그래도 일주일에 5번씩 절을 하고 있다. 나 스스로를 많이 알게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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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별 2006-09-21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 다시 밀려오는 감동의 도가니~~^^ 엄마가 얼마나 기뻤는지 아니? 엄마는 그렇게도 힘들고 외롭고 두려운 마음으로 했던 3000배를 내 딸이 거뜬히 해내는걸 보았을 때....너의 인생은 좀 더 환하고 성취하고 깨달아가는 보람찬 삶, 그리고 그것을 남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리라는 믿음을 가졌단다. 게다가 주말 빼고 매일 엄마 아빠랑 함께 108배를 하겠다고 흔쾌히 승낙할 때도 오우~ 정말 너의 앞날에 서광이 비침을 보았단다. 사랑한다. 딸아~!

흐르는 강물 2011-08-09 0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 좋은 부모님을 만났군요, 댁의 따님은 ^^
 

 9.11테러. 평범한 사람들이 희생되었던 사건이었다.

 9.11 테러가 생겼던 당시, 난 초등학교 저학년이었고 여름방학이 막 끝났던 시기였던 것 같다. . 새벽에 어수선한 소리에 깨어 거실로 나가보니 엄마와 아빠가 뉴스를 보면서 걱정스럽고 한편으로는 충격적인 표정을 지었다. TV화면에서는 헐리웃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었다.- 거대한 비행기가 무역센터에 부딪혀서 엄청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당시에는 건물 안에 있을 사람들이나 비행기에 타고 있을 사람들에 대해선 전혀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 저런일이 실제로 벌어져도 영화와 똑같이 보이구나- 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다음날 아침 학교로 가니 내 생활은 평상시와 다름없었다. 그 사건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나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못하면 이해하기 어려웠던 나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일주일 쯤 뒤, 선생님이 우리들을 향해 꾸짖듣이 질문하셨다. "우리반에서도 빈라덴에 관한 노래를 부르는 학생있니?"  난 처음듣는 이야기라 호기심이 생겨 옆 짝지 한테 물어보니 그 노래를 작게 소근거려주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우습기도하고 끔찍하기도 한 것 같다. 몇몇 학생들이 나가서 선생님께 훈계받는동안 난 '그 사건이 뭐길래'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후, 오랜만에 미국에 사는 오빠들을 만났다. 테러 사건 이후 더 엄격해진 보안검색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는 이야기를 하다 오빠들의 친구들의 부모님도 그 9.11 테러 때문에 많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제서야 그건 정말 끔찍한 사건이었구나 싶었다. 나라의 높은 사람들도 아니고 단지 평범한 가족들의 부모님들이 그 사건에 휘말려 들었다니, 그 사건은 나에게 굉장히 가까운 곳에 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플라이트 93은 그런 생각을 더욱 굳혀주었다.

 테러범들이 하이제킹을 하고 난 뒤 몰래 휴대전화로 가족들에게 전화하는 승객들의 모습은 너무나도 마음이 아팠다. 설마 이 비행이 자신이 마지막이 되었을지 누가 알았을테고, 마지막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었을 가족들과의 이별은 나를 너무 슬프게 했다. 차라리 이 만남이 마지막이다, 라는 생각을 하면 조금이라도 더 소중한 시간을 보내려고 했을텐데. 사고는 너무 갑작스레 찾아오는 것 같다.

 승객들은 용감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으니 부딪혀보겠다는 의지가 다른이들의 희생을 막았다. 테러집단들을 쓰러뜨리고 다시 조종석을 잡았을때, 그들이 살아나기를 빌었으나 고도가 너무 낮은 바람에 비행기는 추락하고 말았다..

 테러집단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증오가 자신의 생명의 소중함보다 강했던 걸까, 억지로 한 일이었을까. 가족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는 그들이 모습도 마음이 아팠다. 다른 평화적인 방법은 없었을까. 죄없는 사람들을 다치게 하고 죽게 하는 것을 알라신이 허락하고 자랑스럽다고 생각했던 걸까.

 사고는 너무나도 급작스럽게 찾아온다. 그 순간은 언제일지 모르는 상황에서 하루하루를 의미 없게 보낸다는 것은 마음아픈 일이다. 평소에 충실한다면 죽는 그 순간이 조금이라도, 아주아주 조금이라도 가볍게 느껴지지 않을까. 그렇다면 죽기 싫다는 마음은 여전하더라도 그렇게 겁에 질리지는 않고 조금이라도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한다면 살아갈 길이 열리지 않을까. 테러집단을 조금이라도 빨리 습격하였다면 그들은 살 수 있었을텐데. 그렇지만 그들을 매우 용감했다.

 9.11 테러 사망자들의 명복을 빌고 다시는 그런 끔찍한 일들이 생기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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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 4월에 배웠던 스쿠버를 이제야 다녀왔다. 그 동안 가려고 했어도 계속 뜻하지 않은 이유로 미뤄졌던 것이 내 마음이 '부딪히자!'라고 생각하자 말자 스쿠버를 가게 되었다. 계속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 한다는 것도 부담이 컸지만 스쿠버를 배우고 나니 무서워졌다. 배우고 나서 시간이 흐르고 나니 이론도 기억이 잘 나지 않고 마지막 해양 실습때 이퀄라이징이 잘 되지 않았던 것이 생각나자 두려워졌다. 그런데 이번엔 가서 부딪히고 멋진 사람들 사겨서 뽀대나게 굴어보자는 생각으로 강사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태종대 해양실습하러 가는 사람들과 함께 가게 되었다. 전화 한 바로 그 다음 날이었다. 내가 생각을 바꾸기 전이었다면 굉장히 불안했을 테지만 이상하게 기대만 되었다.

 6시 반에 일어나서 역으로가 기차를 타고 구포역에 도착하였다. 8시 30분까지 오라고 하셨는데 기차가 연착하는 바람에 벌써 20분이었다. 서둘러 지하철을 타고 도착하니 이럴수가, shop이 문이 닫혀있었다. 조금 기다리니 윤섭 아저씨가 가게 문을 여셨고 강사님도 오시고 다른 사람들도 한두명씩 오기 시작했다. 오자마자 고무장갑 어쩌고 하는 특이한 아저씨와 한국말을 잘 못하는 재일교포 언니와 대학을 졸업했을 나이로 보이는 언니 둘이 모이자 서로 교육을 같이 하면서 친해졌는지 재잘거렸다. 나 혼자 이질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친해져보자는 생각에 발딱 일어나 사람들한테 먼저 인사도 건네고 한 두마디씩 말을 붙이니 마음이 좀 놓였다. 태종대로 가는 차안에서 두 언니와는 이미 친해져서 점점 재밌게 느껴졌다. 태종대에 도착해서 다른 언니가 차에 탔다. 롯데에서 일하는 카지노 딜러(!)라고 한다. 특이한 직업이라 말을 붙여보고 싶었는데 인상이 안좋아서 포기해버렸다. 다들 내가 대학생인지 알았다. 항상 듣는 이야기지만 역시 들을 때마다 쑥쓰럽다. 시계가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장비를 꺼내서 바닷가에 다 가져다 놓고 나니 시간이 꽤 지나간 것 같았다. 탈의실로 가서 슈트를 입고 -다음부터는 한 치수 큰 슈트로 빌려달라고 해야겠다- 장비 앞으로 가서 조립을 시작했다. 가기 전날 밤에 이미지로 기억을 떠올리니 별 문제 없이 조립을 했다. 핀과 스노클, 마스크를 착용하고 부표가 떠 있는 곳으로 스킨으로 헤엄쳐갔다. 날이 더우니 물에 들어가는 춥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랜만에 바다에 와서 재밌는 사람들과 함께 논다고 생각하니 무척 유쾌해졌다. 친구들은 서로 모여 바다에 가거나 개울로 놀러가는 일이 많다고 하는데 난 친구랑 놀러간 적은 없어도 더 멋진 사람들과 어울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몸도 풀고 이젠 BC를 착용하고 부표쪽으로 헤엄쳐갔다. 납과 공기통이 너무 무거워서 혼자 일어나지를 못했다. 핀을 신고 그 큰 자갈 위를 걸어가는데 안넘어진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운동을 좀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부표로 헤엄쳐가서 그때부터 레귤레이터를 입에 물고 대기하고 있었다. 사부님이 먼저 내려가시고 윤섭 아저씨가 우리를 차례로 내려가게 했다. 이퀄라이징 안 될것 같은 불안도 있었지만 이내 떨쳐버리고 내려가니 걱정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기분좋은 소리를 내며 압력평형이 되었다. 맨 밑으로 내려가서 다른 사람들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며 앉아있는데, 이럴수가, 너무 춥다. 다들 너무 추워서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거기 그대로 앉아서 수영장에서 했던 여러가지 필수 기술들-마스크 물빼기, 레귤레이터가 입에서 빠졌을때 찾는 것과 입에 넣어서 물빼는 것 등등-을 연습하고 드디어 움직이게 되었다. 9m 정도를 내려간 것이라 물 무게가 조금 느껴졌다. 스쿠버는 위험을 대비해 항상 2인 1조로 움직이는데 나는 아직 미성년자라 그런지 강사교육과정을 받고 있는 아저씨가 내 손을 꽉 잡고 다니셨다. 여기저기 다니니 물이 무척이나 더러워도 물고기나 성게, 불가사리가 제법 보였다. 다이빙은 20분 정도 했는데 그새 강사님이 문어를 잡아서 망에 넣으셨다. 불법이긴 하지만 음.. 그맛에 스쿠버를 하지 않나 싶다.  상승하여 뭍에 도착해서 핀을 빼려는데 공기통이 너무 무거워서 도저히 발이 손에 닿지 않았다. 윤섭 아저씨가 겨우 도와주셔서 공기통을 벗고 핀을 빼서 들고 갔다. 먼저 올라와 있던 사람들과 함께 장비를 정리해 놓고 교포언니가 싸 온 도시락을 먹었다. 문어도 해병대에 가서 삶아오고 초고추장도 얻어왔다. 불법인데 참 잘 가서 이야기 한다 싶었다. 햇볓이 뜨거웠지만 아침도 제대로 못 먹고 갔던지라 무척 맛있었다. 그렇지만 문어만은 못먹었다. 물이 너무 더러워서 정말 밥맛떨어지려는데 다른 사람들은 잘도 먹었다. 사먹는 생선들도 그렇다지만 도저히 알고는 먹을 수가 없었다.

 식사를 끝내고 교포언니가 화장실을 간다길래 같이 따라가 주었다. 한국에 온지 5년이나 되었지만 아직 한국말이 서툴어서 혼자 돌아다니는 것을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같이 다니면서 어디 사냐고도 물어보고 내가 생각하는 일본과 일본 운동 검도를 배운다고도 이야기 해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혼자 떠들었던 것도 같다. 샤워를 하고 차에 가서 장비를 실은 다음 필기 공부를 위해 shop으로 갔다. 원래 라이센스를 받으려면 필기 시험을 쳐야한다고 한다. 어떤 이유에선지는 모르겠지만 난 라이센스를 그냥 받았다. 나중에 쳐야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오싹해져서 같이 공부하기로 했다.

 별로 어려운 것은 없었지만 교포언니를 이해시켜야 하는 바람에 시간이 3시간정도 걸렸던 것 같다. 아빠한테서 자꾸 전화가 와서 초조하기도 했고 해가 지기 시작하니 나중에 지하철로 가는 길이 걱정되기도 했다. 그래도 집중해서 듣고 나니 뿌듯했다. 버스를 타고 구포역에 도착하여 기차를 탔다. 가는 내내 다음주 수요일에 있을 필기 시험을 위해 받은 교재를 계속 읽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스쿠버는 무척이나 재밌는 스포츠라 여겨지면서 왜 내가 그렇게 무서워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비록 책에 나와있는 병들이 무서울지라도 규칙을 잘 지킨다면 그런 일이 생기지 않고 즐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집에 도착하니 너무 피곤했다. 그렇지만 오늘 너무 즐거웠고 교포언니한테서 휴대폰 번호를 따서 문자를 주고받는 것도 재밌어서 즐거웠다.

 내일 있을 시험에 대비해 열심히 공부도 했다. 이젠 즐길 일만 남았다^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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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보 각시>는 이번 밀양연극제 중 가장 내 감성을 자극하는 연극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라이브 음악만으로도 신이 났었는데 자리까지 정 중앙이라 배우들과 눈이 자주 마주쳤고 배우들의 기량도 그저께 보았던 <밥>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컸다.

 <바보 각시>가 처음 무대에 오른 곳은 부산 가마골 소극장이었다고 한다. 그 소극장은 무척이나 작아서 말도 못하게 더웠다고 한다. 하지만 그 고생을 귀히 여겨 지금까지도 작은 무대에서 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100명 이하의 작은 무대에서만 <바보 각시>를 선 보일 것 이라고 한다. 나도 너무 큰 무대보다는 작은 무대를 좋아한다. 오페라 같은 것은 유명한 만큼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내가 앉아있던 곳에선 겨우 사람 형체가 보이기 때문이다. 연극에서 관객과 배우의 공감도 중요한데 표정조차 보이지 않으니 내가 공연을 보러온 듯한 느낌이 들지 않다는 생각이 가끔 들기 때문이다. MVP 석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작은 무대가 훨씬 정이 가는 것 같다. 이 무대는 얼마나 작은지 말 그대로 배우들이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관객들이 있었다. 유명한 연극이라 그런지 자원봉사들도 많이 앉아서 관람하고 있었다.

 노래의 선율도 너무 곱고 아름다웠는데 그 노래는 가마골 소극장 시절 한 관객이 감명깊게 보고 유학을 떠났는데 한국으로 귀국하여 서울 음대 교수가 되어 <바보 각시>의 노래를 작곡했다고 한다. 피아노와 기타를 치는 사람들 옆에서 앉아 있었다. 그런 인연으로 시작하여 자신이 감명깊게 본 연극의 작곡을 했다니 정말 멋지다. 한 분야에서 성공하면 자신이 자랑스러워 할 수 있다니 그것만을 위해서라도 성공하려 노력할 수 있을 것 같다.

 처음 배경은 지하철 신도림 역이었다. 그 곳에 누더기 옷을 입은 장님가수가 부드럽게 노래를 시작했다. 판소리도 동요도 아닌 따뜻한 음색은 마음을 편하게 했다. 노래를 너무 멋지게 불러서 2시간 내내 그 노래만 듣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느낌이었다.

 배경이 바뀌어 지상으로 올라왔다. 정말 포장마차 아줌마처럼 생긴 바보각시가 자신을 꼭 닮은 인형을 포장마차에 걸어놓고 장사를 시작했다. 바보각시는 처음부터 너무 착했다. 돈 없는 사람들한테 그냥 밥을 주기도 하고 철없이 객기 부리는 꼬마와 앵벌이 소년에게도 진심으로 웃어주었고 취해서 가누지도 못하는 여자한테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아니, 말을 아예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 한 것은 연극 중간중간에 너무나도 애처로운 목소리로 길게 뽑았다. 인형을 입에 물고 말을 하자 인형의 입이 같이 움직였다. 그 인형이 바보각시인 것 같았다. 너무나도 처량하고 마음이 아픈 목소리였다.

 바보각시에는 한국의 예술이 모두 나와있었다. 전통 소리와 가면, 인형, 탈춤, 전통악들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섞여서 곳곳에 나왔다. 그런데 그 탈은 너무 징그러웠고 나중에 바보 각시에게 그 탈들을 주는데 그게 무슨 뜻일까. 배우들 모두 자신의 탈을 바보각시에게 주지만 앵벌이 소년만 늦게 기어와서 가면을 주려하지만 바보각시는 가버리고 만다. 주는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너무 마음이 아팠다.

 주된 이야기는 바보각시가 세상으로 내려와 사려고 하지만 임신을 하게 되자 남자들한테 버림을 받아 자살을 한다는 이야기다. 죄책감을 느끼는 남자들은 바보각시 시체 속에서 울고 있는 아기를 꺼내려 하지만 한 남자가 말려서 결국은 꺼내지 못하고 모두가 신도림역에서 기차에 받혀 죽고 만다. 그 아기는 맹인가수에 의해서 나오게 되는데 아기는 화해와 희망의 상징, 미륵이라고 한다. <바보 각시>는 살보시 설화를 바탕으로 한 연극이고 설화속의 분신 보살은 바보 각시라고 한다. 세상에 부대껴 살아보려고 했지만 세상은 그리 만만찮은 곳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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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각시

이윤택 작/이윤택 연출/ 연희단 거리패

(등장인물)
각시
맹인가수
걸식소년 미카엘
(맹인가수와 걸식소년 역은 한 인물로 표현될 수 있다.)
취객
파출소장
실직청년
밤처녀
(소외자 뒤에 종말론 교주가 됨)
우국청년
앵벌이
춤추는 꼭두
노래하는 꼭두

[경] 1경

아름다운 사람을 기다리며

((무대는 신도림역전 풍경이다. 신도림은 新都林으로 그 뜻은 수풀 속에 난 새로운 길이다. 수풀 속에 난 새로운 길, 상당히 의미심장한 상징을 내포하고 있는 지금 여기 신도림역 일대는 서울의 도시 빈민 밀집지역으로 주의로 구로공단을 끼고 서울과 주변 위성도시를 연결하는 교통의 중계지로서 지금 여기 신도림은 유난히 종말론이 성행하고 온갖 야바위꾼이 들끓는 서울의 오지이다.))

((공연 시작을 알리는 안내방송))

[안내방송] 지금 열차가 도착하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은 위험하오니 안전선 밖으로 한 걸음 물러나 주시기 바랍니다.

((숨가쁘게 지나가는 열차의 소음, 시간궤도를 따라 흐르고 하모니카소리 ---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황혼을 배경으로 무대에 등장하는 두 그림자, 맹인가수와 걸식소년 미카엘이 신도림역전의 밤을 연다.))

[걸식소년] 아버지

[맹인가수] 왜

[걸식소년] 나 매일 밤 꿈을 꾼다.

[맹인가수] 어떤 꿈?

[걸식소년] 바보각시가 하얀 돛배를 타고 저 어둔 하늘을 가로질러 오는 거야 .

[맹인가수] 바보각시는 죽었어.

[걸식소년] 아냐, 꿈은 안 죽어.

((맹인가수, 희게 웃는다. 우울하게 빛나는 맹인가수의 차고 단단한 치아, 낮게 깔리는 우울한 기타 선율))

[맹인가수] 바보각시는 이제 여기 오지 않을 거야.

[걸식소년] 왜?

[맹인가수] 아름답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기 힘든 세상이니까.

[걸식소년] (밤하늘 별자리를 보며) 이 세상은 여전히 아름다워. 저길 봐, 하늘은 밝은 별들로 가득 차서 손가락 하나만 이렇게 튕겨도 (짧고

[페이지] 003

눈부신 인트로 메조) 별의별 아름다운 사연들이 다 쏟아질 것 같애.

[맹인가수] 나는 안 보여.

[걸식소년] 마음이 어두워서 눈이 멀었다. (걸식소년 노래한다)

걸식소년의 노래/

등불 하나 켜들고 그대 있는 곳으로 가리라.

등불 하나 켜들고 지지배배 새소리

흘러가는 물소리를 실어오리라.

여기 하늘 아래 땅 위에

등불 하나 켜놓고 나는 기다린다.

아름다운 사람아

마침내 세상은 위험으로 가득 차서

우리 마음은 저 깜깜한 밤 안개

그러나 세상이 슬픈 바다라 할지라도

등불 하나 켜들고 그대 있는 곳으로 가리라.

등불 하나 켜놓고 나는 기다린다.

아름다운 사람아

((걸식소년 미카엘의 서곡--- "등불 하나 켜들고 그대 있는 곳으로"의 고운 선율을 타고 등장하는 바보각시의 포장마차 신도림역전 어둔 밤하늘을 배경으로 등불 하나 켜놓고 앉은 바보각시. 어둠 속 휘파람 소리 휘파람 소리 따라 하나 둘 등장하는 신도림 사람들. 취객, 걸식소년 미카엘의 동냥그릇에 백동전 하나 딸랑 던져 넣어주면서 (서곡이 끝나고) 대한일보오--- "앵벌이 소년의 필사적인 외침 그리고,))

[취객] 내 모습이 삐딱하게 보입니까? (관객에게) 이해하십시오. 불행하게도 나는 이 세상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험한 세상 삐걱거리는 다리가 되어 이렇게 흔들리고 있습니다만, 사실 난 발을 빼고 싶거든요. 이 세상이 넌더리가 나서 발을 빼고 싶단 말입니다. 발목 잡혀 사는데

[페이지] 004

왜 세상은 튼튼하게 날 물어주지 않는 거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물러난다) 틀렸다. 다 틀렸다! 무너질꺼야. 난 무너져 버릴꺼야. (관객에게) 후회하지 마 인간들아.

((취객, 포장마차에 당도한다. 우리 시대의 소외자가 바보각시에게 엉뚱한 수작을 걸고 있다.))

[소외자] 저는요, 따뜻한 콩나물국이 먹고 싶거든요. (바보각시, 웃으며 따뜻한 국물 한 그릇내어 놓는다) 그리고요, 당신하고 한 번 하고 싶은데요.

((옆에 서서 듣고 있던 실직청년이 소외자의 면상에 주먹을 한 방 날린다. 소외자, 맞고 서서 실직청년을 노려본다.))

[실직청년] 별 미친놈 다 봤네. 가, 임마

((소외자, 서러운 표정으로 사라지고 실직청년이 바보각시에게 지하철 열차칸에서 만났던 전 세계 챔피언 홍수환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실직청년] 전 어제 신도림역에서 홍수환을 만났습니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하던 전 세계 챔피언 홍수환 말이에요. 참 딱하더라구요. 사업에 실패해서 고생한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아, 글세 전 세계 챔피언이 지하철 표를 끊으려고 줄 서 있지 뭡니까, 바로 내 뒤에 서 있었다구요. (빙긋) 흥분되던데요. 전 세계 챔피언이 내 뒤에 서 있었다구요. (다시 생각해도 즐거운 함박웃음) (정색) 그런데 참 이상한 건요. 아무도 4전 5기의 신화를 낳은 홍수환을 알아주지 않는 거예요. (가볍게) 내가 너 언제 봤니? 모두 이런 상판때기로 죽어라 앞만 보고 줄 서 있는 거예요. 딱한 세상이죠, 네. 4전 5기의 신화를 낳은 인물인데 말이예요.

[취객] (시큰둥) 요새 신화 그거 모두 가짜야.

[페이지] 005

((실직청년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동안 밤 처녀는 턱을 괴고 앉아 취객을 쳐다본다. 그러다가 실직청년이 이야기가 끝나자 실없이 깔깔거린다. 실직청년은 그만 김이 빠지고, 취객은 자신을 쳐다보는 밤 처녀에게 시비를 건다.))

[취객] 왜 웃어?

[밤 처녀] (저 혼자 지껄인다) 글세, 배추 두 포기를 주물러 김치란 걸 담아 놓고 나니 갑자기 세상 살아갈 자신이 생기지 뭐예요. 내가 김치를 담을 수 있다는 사실 말이예요. 나두 김치를 담을 수 있다구요. 내가 시집 갈 수만 있다면, 그리하여 오십통쯤의 김치를 담게 된다면, 난 너무 행복해서 기절을 할지도 몰라요. (유쾌하게 다시 한 번 깔깔거리고 나서, 눈을 새초롬하게 뜨고 각시를 본다)

[취객] 별 미친년 다 봤네.

((포장마차에 모여 있던 사람들, 처음엔 서로의 이야기들에게 관심을 가지다가 이내 시들해진다. 우국청년이 들어와 모두에게 전단을 돌린다.))

[우국청년] 이 전단은 여러분에게 불화를 퍼뜨릴지도 모릅니다. 요즘 같은 시국에 불화를 조장한다는 비난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아마 양쪽에서 돌이 날아오겠죠. 그러므로 이 전단을 받으신 시민 여러분은 다음 사항을 유의해서 읽어 주십시오. (구호조) 여러분은 이 전단을 소시민적으로 읽으십시오. 여러분은 이 전단을 비민중적인 입장에서 이해하셔도 무방합니다. 내 말이 말 같잖게 들리면 전혀 감동 받지 않으셔도 무방합니다. (침을 꿀걱 삼키고 절실한 느낌으로 말한다.) 대망의 90년대는 이름 그대로 큰 망조가 들고 말았습니다. 우국 청년들의노력이 말짱 도루묵이 되어 버렸습니다. 압제자를 백담사로 보낸 장본인은 누구였습니까? 총장 머리를 삭발했던 우리들 아닙니까! 우리들 우국의 십일조는 누굴 위해 쓰여지고 있습니까?

[취객] (박수) 옳소, 국회로 보냅시다.

[우국청년] (사람들 사이 헤집고 들어와) 그들에게 우리의 GNP와 가계부 형편이 왜 그토록 차이가 나는지 질문하십시오.

[취객] 잘났다. 잘났어.

[우국청년] 폭등하는 교통혼잡에 대해서도 대책을 요구하십시오.

[취객] 니 똥 굵다카이.

[우국청년] (흥분했다) 우리의 십일조로 살찐 돼지들을 잡으러 갑시다!

[취객] 나 돼지고기 안 먹어 임마!

[우국청년] (취객을 노려보며 악을 쓴다) 이 분배 불평등의 세상에 선전 포고를 내립시다. 깨어나십시오. 여러분은 지금 의식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취객] 내가 연탄가스를 마셨니, 의식이 없게?

((우국청년, 그만 분통을 터뜨리며 품속에 최루가스가 든 깡통을 끄집어낸다.))

[페이지] 006

[우국청년]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적은 당신 같은 소시민들의 냉소주의입니다.

((펑! 삽시간에 화염병이 터지고 포장마차는 최루가스 가득 찬다. 호루라기 소리 이어 밤 처녀의 적막을 깨는 외침 속에 사람들 기침을 하고 눈물을 흘리며 흩어진다. 자욱한 안개 속 바보각시만 동그마니 남았다. 각시, 정신을 차리고 안개 속의 세상을 빤히 내다본다. 조심스럽게 세상을 두드리는 각시의 언어, 이 언어는 하늘 아래 첫 동네 음계로 표현된다. 각시, 안개 속의 세상에 앉아 '정든 땅 언덕'을 노래한다. 각시의 노래는 맹인가수에 의해 되불려진다.))

맹인가수의 노래/

정든 땅 언덕 시냇물 따라 길 떠난 세월

내 영혼 집을 찾아 헤매이네

이 세상 작은 집

나의 삶터 나의 희망

나의 몸 바쳐 여기 살리

((밤처녀, "택시이--- "를 외치며 무대 앞으로 나선다. 취객, 비틀거리며 밤처녀의 다리를 잡고 늘어진다.))

[밤처녀] 왜 이러세요, 짐승처럼

[취객] 짐승? 그래, 난 짐승이다. 오월이 오면 짐승이다. 먼 옛날 옛적 5월, 나는 광주에 없었으므로 짐승이다.

[밤처녀] 도대체 날 뭘루 보구 이러느냔 말예요, 난 양심숙이예요.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취객] 양심이 밥 먹여주냐.

((취객, 밤처녀 스커트 밑으로 손을 집어넣고 밤 처녀, 으악! 비명을 지르며 손가락을 갈퀴처럼 뻗어서 취객의 머리털을 닭털 뽑듯이 뜯는다. 취객, 화냥년! 하면서 밤 처녀의 스커트에 박치기를 하고 밤 처녀는 손에 들린 하이힐로 취객의 이마를 찧는다. 피를 흘리면서 일어서는 취객, 그 모습을 본 밤 처녀, 슬슬 포장마차 쪽으로 피해 숨는다. 얼굴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취객의 독백))

[페이지] 007

[취객] 그래, 치욕이다 치욕! 살아 있는 게 치욕이다. 이 치욕의 세월을 닦아내고 짐승으로 환생하고 싶다. 짐승으로

((취객, 흐느끼며 포장마차에 온다. 우국청년, 다시 무대에 뛰어 오른다.))

[우국청년] 우리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우리만이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해 낼 겁니다. 갑시다. 백두산까지 한라에서 백두까지

((사람들 우--- 야유를 던진다 시민들의 야유에 거꾸러지는 우국청년 홈--- 런--- ! 홈런입니다--- 흥겨운 프로야구 중계방송과 함께 등장하는 울리 시대의 소외자. 그는 이 시대의 황당무계한 가짜 메시아(교주) 로 둔갑한다.))

[교주] 그래, 내가 오마고 신약에서만 삼백회 이상 약속하고 승천한 지 이천년이 다 되도록 소식이 없었다손 치더라도 영적 신랑인 날 잊고 배짱 편하게 살 줄 알았더냐. 꼴 좋다. 자업자득이다. 너희들이 나한테 지은 죄가 어떠했는데 뻔뻔하게 사는 걸 원하느냐.

[앵벌이] 너희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제?!

[교주] (중지 손가락으로 힘차게 하늘을 찌르며) 종말은 공중에서 온다. 내 사랑하는 원수들이 더 이상 이 땅에서 죄 짓고 사는 걸 원치 않기 때문에 내 친히 팬텀기 편대를 이끌고 삼팔선을 넘으리니 영변 핵공장부터 박살내고 살아 남은 동포들을 먼저 하늘융단에 태워서 보낼터이니 너희들도 하늘문이 닫히기 전에 때를 놓치지 말지어다.

[앵벌이] 믿습니다!!

[교주] 내가 이렇게 목젖이 붓도록 외쳐도 당최 표정이 없는 저 인간들. 선교전단 공짜로 나눠줘도 창 밖만 바라보는 저, 저, 저, 저 몰상식한 인간들아--- 창밖에 뭐가 보이냐? 천국이 거기 있더냐? 내 새끼 네 여편네가 인신매매 당해도 속수무책 창 밖만 쳐다봐라.

[페이지] 008

[앵벌이] 아버지---

[교주] 그래서 이 도시의 실종자들은 다 내 새끼들이다. 가자, 내 새끼야, 일어나라.

((교주, 앵벌이 머리끄뎅이를 잡아 올린다.))

[실직청년] 저 기적이야, 기적.

[취객] 저거 모두 가짜야.

((앵벌이, 교주를 따라가고, 밤처녀도 살며시 뒤따라간다. 영광영광 할렐루야--- 노래하며 가는데, 파출소장 곤봉을 빙글빙글 돌리며 가짜 메시야의 행렬을 바라본다.))

[파출소장] 너 일루 좀 와 봐라.

[교주] 왜요.

[파출소장] 너 인신매매범이지?

[교주] 체, 같은 값이면 좀 고상하게 말하시오. 하늘융단 태워서 천국 보내는 것도 인신매매요?

[파출소장] (교주의 팔을 비틀어 꺾는다) 가자, 천국보다 닭장차가 네놈한테는 안성맞춤이다.

[교주] 이거 놔! 왜 팔을 붙들고 지랄이야 지랄이.

[파출소장] 요놈 시키. 네놈 행동이 하도 수상해서 내가 사흘 밤낮을 얼쩡거렸다.

[교주] 좋아, 가자구.

[파출소장] 가자!

[교주] 가자!

[파출소장] 가자!

[교주] 가자!

[파출소장] 빨리 가자!

[교주] 에이, 가만 있어봐라.

((교주, 파출소장을 따라가는 척 하다가 슬그머니 돈을 쥐어준다. 돈을 받아 넣은 순경, 잘 가라--- 하며 사라진다 소외자 (교주) , 앵벌이, 밤처녀 '내게 강 같은 평화--- ' 노래하면서 나간다.))

[맹인가수] 그렇습니다. 저는 심심해서 노래를 부릅니다. 인간들은 저 혼자 죽기 두려워서 신화를 만들고 심심해서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외로운 인간들을 위하여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혔고 공단 오거리에서 놀던 건달은 심심해서 부활을 꿈꿉니다. 못 믿으시겠지만 이게 진실입니다.

[페이지] 009

내가 왜 노래하지? 나는 이제 이 물음에 대답할 수 있습니다. 외롭다! 고로 나는 노래한다.

((무대 한쪽에 우국 청년이 서서 화염병을 들고 나와 던지려고 하나 던질 곳이 없어 주저하고 있다. 낙담하고 괴로워하는 모습, 그 모습을 보고 저마다 한마디씩 던진다.))

[취객] 아니 저, 호적에 잉크도 안 마른 녀석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무슨 지랄이야, 지랄이. 저런 놈들은 그저 삼청 교육대 같은 데 집어넣어야 해. 6 25를 안 겪어 본 사람은 모르지--- .

[파출소장] 그래요. 지난 일들은 역사의 심판에 맡기고 이제 우리도 서로 화해하고 용서하면서 한 번 살아 봅시다. 세상이 바뀌었어요 (우국 청년을 향해) 봐라, 학생 이리 좀 와봐라. 여기 좀 앉아 봐라. 지금이 어떤 시댄데 철지난 80년대 흑백화면 돌리고 있노. 지금은 말이다 실천이니 해체니 하는 말은 물 건너 갔어요. 이제는 노스텔지어의 시대란 말이다. 노스텔지어! 내 말 못 믿겠거든 일요일날 고속도로 쪽으로 나가봐라, 전부 향수병에 걸린 인간들이 놀러 간다고 고속도로가 완전히 장바닥이란 말씀이야.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 못노나니. 이게 바로 우리 민족성 아니겠어요. 하하하!

[우국청년] (분노한다) 정말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겁니까?

[파출소장] 이 친구 또 와이라노, 응!

[실직청년] 그래요, 너무들 하십니다. 정말 너무들 하십니다. (그러자 우국청년이 와서 안긴다) 홍수환 선수는 지금도 스포트라이트도 못 받고 개런티도 없이 의무방어전을 치루고 있는데 정말 너무들 하십니다 너무들 해요.

[취객] 홍수환이는 지금 인천에서 당구장 경영한다는데 무슨 소리야 이 사람아.

[실직청년] 전 세계 챔피언 홍수환은 여러분의 노예가 아니었습니다. 제 멋대로 쓰고 버리는 일회용 콘돔도 아니었단 말입니다. 그는 인간이었습니다. 저와 함께 지하철을 탄 우리의 이웃이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전--- 그와 아름답게 만났습니다. 나는 확인했다구요, 그는 지금 선전분투하고 있다구요.

((선전분투의 음악이 흐르면서--- ))

[페이지] 010

[경] 2경

전망이 없는 시대의 탈놀음

((도시의 음악상자가 등장한다. 가짜 메시아 일당의 환상적인 이동무대가 펼쳐진다. 노래하는 꼭두, 춤추는 꼭두가 등장하고 교주의 설교는 흡사 거리의 차력사를 방불케한다.))

[교주] 오늘 이 종말의 계획은 지금으로부터 1993년 전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 계획하신 복수극입니다. 인간들에게 피 맛을 알게 하시면서 계획하신 저주의 메시지란 말이니다아. 생각해 보십시오.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힐 때 기분이 어땠겠습니까? 얼마나 아팟겠습니까/ 자, 보십시오 (하면서 마구 온몸을 찌르며 자해한다. 몸의 피를 닦아 보이며) 이 피는 바로 저 우매한 민중들이 침을 뱉고 발로 찬핍니다. 배운 제자란 놈이 겁을 집어먹고 세 번 외면한 배반의 핍니다아. (눈물을 흘리며) 오! 마리아, 나의 어머니 주 예수가 믿을 인간은 천대받던 창녀밖에 없었습니다. (관객들을 향하여 언성을 높인다) 여기 누가 주예수를 도왔느냐!

[취객] 저 뭐하는 짓이야? 온몸에다 피칠갑을 하고---

[실직청년] 저게 바로 해프닝이라는 거예요.

[취객] 해프닝?

[실직청년] 그래요. 저 사람은 전위 예술가군요.

[우국청년] 전위예술? 당신은 저 모습이 예술로 보인단 말입니까? 저건 이 시대의 고통을 온 몸으로 껴안으려는 민중의 모습이요.

[파출소장] 아니, 분신자살 하려는거 아니야?

[우국청년] (울음을 터트리며) 그래요.

[취객] (실직청년에게) 이 사람 이거 안되겠구만. 분신 자살하려는 사람보고 전위 예술가라니 정신나간 인간 아냐. (위협적으로 훑어보며) 당신 뭐하는 사람이야?

[실직청년] 나? 나 이 시대의 젊은 염세주의자요.

[취객] 너 같은 인간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이 개판이 되어가고 있는거야.

[실직청년] (부끄럽고 화가 나서) 당신은 뭐가 잘났어요? 당신은 뭐요?

[취객] 나? 난 대한민국의 위대한 소시민이지 임마.

[교주] 이젠 끝장이란 말입니다. 이 개판 오분 전의 세상에 심판의 불이 무차별 융단 폭격을

내릴 것 입니다아.

[우국청년] (뛰어 든다) 그렇소. 투쟁의 시대는 끝나고 야합의 시대가 오고 말았소. 우리는 위장된 화해를 거부 한다아---

[교주] 여보시오. 여보시오. 저리 저리 나가시오. 우리도 이것하고 싶어하는 줄 알아. 목구멍에 풀칠 좀 해보려고 멍석 깔아 놓으니까 별 미친놈이 다 와서 개판 치네.

[페이지] 011

((도시의 꼭두놀음이 시작된다. 이 음악상자의 꼭두들은 돈을 넣어야 움직인다. 취객, 노래하는 꼭두놀음에 취한다. 실직청년은 춤추는 꼭두에 관심을 보인다.))

[파출소장] 돈 넣어라, 돈? 하--- 저거 신기한 꼭두각시들이네.

((취객, 다시 돈을 넣자 세상은 요지경--- 노래 이어지고 모두 환각상태에서 느릿느릿 춤을 춘다. 소돔성의 풍경이 펼쳐지고 우리의 맹인가수는 노래한다.

[맹인가수] 입술이 외로운 저 여자를 위하여 오늘도 극장 문은 열리고

외로운 사람들이 모인 무대엔 환상적인 헬리콥터가 뜬다.

상투적인 사랑에 싫증난 여자들이 극장에 온다.

상투적인 출근길에 지친 남자들이 극장에 온다.

그러나, 저 여자의 쇼는 상투적이고 시민들은 이미 상투적인

세상에 길들어져 버렸네.

입술이 유난히 붉은 여배우의 포스터가 도시의 벽마다 걸리고

썩기 싫은 것들이 추풍낙엽으로 떨어진다.

그리운 정신들아, 나는 지금 다운타운으로 내려간다.

그리운 정신들아, 다운타운 쓰레기통에서 만나자.

((모두들 뮤직박스에 취해 사라지고 각시만 멀뚱하게 남았다. 외롭다. 빈 무대, 우국 청년 등장한다. 비장한 음악과 함께 우국 청년의 절망적인 자살극이 진행된다. 각시, 우국 청년의 임종을 지켜준다. 각시의 맑고 슬픈 장송가.))

[맹인가수] 넌 누구냐? 바보냐?

((각시, 묵묵부답.))

[걸식소년] 어디서 왔니?

[각시] (밤하늘을 가리키며) 저-기

[걸식소년] (위를 쳐다보며) 저기 어디?

[각시] 하늘 아래 첫 동네.

[맹인가수] 하늘 아래 첫 동네? 넌 여기 와선 안돼. 여긴 아직 너가 살 곳이 못돼.

[각시] 난 여기서 살 거야.

[맹인가수] 여기는 지금 맥이 풀려 있어. 중심이 없는 세상이야.

[페이지] 012

[각시] 난 그냥 여기서 살 거야. 아이를 낳겠어. 내 아이는 그냥 천성대로 클 거야. 난 아이에게 희망을 걸어.

[걸식소년] 아이를 낳아도 소용없어. 세상은 점점 썩어 가겠지. 거대한 쓰레기 밭이 될 거야. 그때 이 세상의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누가 교육시켜도 소용없어. 이끌어 줄 어른들도 없어. 아이들은 사나와지고 자기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 납작머리가 될걸. 저희들끼리 치고 박고 싸우면서 쓰레기 밭에 묻힐거야.

((맹인가수, 걸식소년, 우국 청년의 시체를 업고 퇴장한다. 각시, 혼자 포장마차를 지키고 있다. 아무도 없다. 이제 누구도 각시의 포장마차를 찾지 않는다. 각시, 낙담하여 등불을 끈다. 어둠이 오고 어둠 속 두런두런 일어서는 가면들, 짐승의 욕망들 취객, 파출소장, 실직청년의 밤나들이가 시작된다. 저마다 가면을 쓰고 포장마차로 찾아든다. 각시는 그래도 반갑게 맞이한다. 사람이 그리운 시간 각시는 탈을 쓴 그들의 욕망들을 읽어내지 못한다. 그들은 제멋대로 마시고 떠들며 밤 기운에 취한다.))

[취객] 여기, 몇 잔의 유황불과 몇 봉의 청산가리가 준비되었으니 친구들아, 와서 떠들며 마셔다오. 하하하.

[실직청년] 네가 그 잘난 여자란 것이냐? 말해라, 당장! 얼마나 필요하냐? 하지만 너 여자야 나를 좋아 마라. 나는 사랑이란 형태의 이기심을 경계하노니, 다만 즐겨 보자.

[파출소장] (젊은 샐러리맨 풍의 남자 관객을 향해) 당신이 케이 에스 마크로 무장된 이 시대의 청년인가?! 우선 그 장발을 단정히 깎아라. 그리고 넥타이로 모가지를 조아라 조아, 바야흐로 이 시대는 자네 같은 꽁생원이 대량으로 필요하다.

[실직청년] 누가 내게 당신은 애인이 있소, 라고 물어오면 나는 커다랗게 목청 높여 예--- 나도 한 마리 있소, 라고 대답한다.

[취객] 그리하여 만약에 또 누가 당신은 당신의 여편네를 믿을 수 있나이까, 라고 집요하게 믈어 온다면, 그렇게 묻는 당신은 과연 당신의 아내를 믿을 수가 있나요? 하하하.

((저 멀리 소돔성 불빛이 솟아오르고 음울하게 울리는 북소리 파출소장, 취객, 실직청년 밤기운에 취해 춤을 춘다. 전망이 없는 시대의 탈놀음이 시작된다. 각시, 천진스럽게 끼어 든다.

[페이지] 013

각시가 탈놀음에 어우러지면서 밤기운은 더욱 농탕하게 익는다. 광기에 젖은 탈들 기성을 지르며 각시에게 달려든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각시, 그리고 3인의 탈들만 안다.))

[경] 3경

누구도 새로운 희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밤의 한가운데 놓여진 각시 이 세상 바람이 각시의 속곳 밑을 지나가고 이 세상 미친 용두질로 각시의 치마는 붉은 꽃들이 들었다. 비로소 각시는 이상한 세상과 살을 나누고 피붙였다. 각시는 현실과 살 섞은 자신의 처지를 고통스럽게 받아들인다. 천성을 박탈당하고 순결을 잃은 그러나 세속적인 삶의 장으로 자신을 살보시한 여인의 춤 느릿한 살보시춤과 함께 3경은 열린다. 파출소장, 영노춤을 추며 등장한다.))

[파출소장] 장사 잘 됩니까?

((각시 옆에 은근한 눈웃음으로 앉는다.))

[파출소장] 각시야 노래 한 곡 해보거라.

((각시, 손바닥을 쫙 펴서 파출소장 면전에 댄다. 각시, 노래하는 꼭두 흉내를 낸다. 파출소장, 빙긋 웃으며 경찰모자를 벗어 각시의 면전에 댄다. 각시, 인상을 찡긋 쓰곤 노래를 한다.))

[각시] 별들이 소곤대는 홍콩의 밤거리---

((파출소장, 박장대소하며 각시 뒤로 다가가 영노춤을 춘다. 각시의 노래, 밤하늘에 퍼진다. 취객이 비틀거리며 들어서다가 파출소장과 각시의 농탕질을 본다.))

[페이지] 014

[취객] 병신 육갑 떨고 자빠졌네. (파출소장을 향해 삿대질) 너는 인간인가? (그리고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나는 지금 인간답게 살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나 자신으로부터 제기되고 있습니다. 솔직하게 고백한다면, 나는 도덕적인가에 대한 물음에 자신 있게 네에--- 라고 답변할 뻔뻔스러움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거죠. 물론, 포장마차 계집년하고 오입 한 번 했다고 해서 벼락을 맞겠습니까마는, 왠지 찝찝하단 말씀이에요. 그래서 전 오늘도 술을 마셔야 되겠습니다.

((취객, 터벅터벅 걸어가 돈을 꺼낸다. 각시, 묘한 눈웃음을 짓는다. 취객, 한숨을 푹 쉬며 돈을 꺼내 각시의 옷깃에 꽂아주고 각시 치마 밑으로 기어 들어간다.))

[실직청년] (포장마차를 노려보며) 잘 논다, 잘 놀아. 지금 여기는 전 시대의 악성루머와 굳은 똥 덩어리로 지린내가 나고 있단 말입니다. 앓던 이빨은 단호하게 뽑아야 합니다. (썩은 이빨 하나가 툭 떨어진다.) 앓던 이빨을 뽑으면 새로운 세계가 환각처럼 다가선다. 아--- 환각, 그렇지, 난 환각에 취해 살고 싶다.

((실직청년, 성큼성큼 두꺼비 춤을 추며 포장마차로 간다. 각시, 실직청년, 취객, 파출소장의 농탕한 밤놀이 춤이 전개된다. 각시, 기분 좋게 3인이 남자들에게 자신을 나누어준다.))

[각시] 아이구, 영감 일동 와?

[각시] 내 배가 아픕니더.

[파출소장] 배가 아프면 약을 먹어야지. 요새 좋은 약 안 많나 빨리 약방에 가서 약을 사 와야지, 약을.

[취객] 그래, 약 먹어야지.

[파출소장] (실직청년에게) 에이, 보거라, 저어기 구로 극장 건너편에 오거리 약방 안 있더나. 거기 약사가 우리 삼촌인께 (메모지를 꺼내 한 자 적어주며) 이거 들고 가서 약 좀 지어 달라 해라. 싸게 해줄끼다. 빨리 가 보거라.

((실직청년, 파출소장이 적어준 메모지를 들고 허겁지겁 무대를 가로질러 나간다. 서로 질투의 눈길을 주고받으며 수작을 거는 파출소장과 취객. 박탈 놀음이 전개되고 실직 청년 약병을 들고 뛰어 온다.))

[페이지] 015

[실직청년] 각시야 약 먹자.

[각시] (약간 취했다) 나 소주 한 잔이면 괜찮아. 약은 무슨 약이야.

[취객] 잔소리 말거라. 새로운 세상에서 살려면 신약 먹어야 된다. 각시야 아--- .

((취객, 억지로 각시 입을 벌리고 약을 부어 넣는다. 각시, 울컥 노란 위액을 토해 낸다. 배를 붙잡고 신음하는 각시. 일동, 깜짝 놀라며 물러선다.))

[각시] 아이고, 배야. 이게 약 먹고 낫는 배가?!

[파출소장] 응? 거게 무슨 말이고.

[각시] 이 배가 바로 일수 찍는 배다.

((둘러선 파출소장, 취객, 실직청년의 눈길이 난처해진다. 3인, 서로 눈길을 맞추며 머리를 맞댄다.))

[파출소장] 저 속에 든 씨가 도대체 누구 씨지 이거?

[실직청년] (싱긋) 내 씰겁니다. 우리 아버지가 평안도 장수산 출신 아닙니까. 우리 아버지가적성이 남쪽으로 떨어지면 장수 낳는다고 했어요. 저 씨 하나는 좋을거외다.

((적성이 북쪽으로 떨어진다.))

[취객] (밤하늘을 보며) 적성이 북쪽으로 떨어지면 어떤 놈을 낳는 거지?

[실직청년] (밤하늘을 보며) 역적을 낳지오.

[파출소장] (밤하늘을 보고 각시를 본다) 그럼, 저 놈은 역적이다. 쌍 큰일 낼 놈 낳겠네 이거.

[실직청년] 아, 아니. 저 각시 뱃속에 든 씨는 내 새끼가 아닐겁니다. 아마도 (파출소장을 짓궂게 차며 당신 씨 아니겠어요. 아무래도 당신 코가 나 보다 크니까.

[파출소장] 하기야, 내 코가 좀 크긴 크지. (한숨) 야 큰일났네. 이거 박봉 받는 주제에 본처에 세컨드까지 두고 있는데, 또 발목 잡혔나. (오리발) 에이, 농담 마, 저 각시 뱃속에 든 씨는 아마도 (취객을 가리키며) 이 양반 씰거야, 옛부터 작은 고추가 맵다고 안하더나.

[취객] 농담 마, 이 사람아, 여편네한테 맞아 죽으라고.

[파출소장] 아이고, 지금 세상에 그래 맞고 사요? 나는 요, 아무리 그래도 여편네한테 매맞고는 안 산다구요. 체! 남자 자존심이 있어야지.

[실직청년] 흰소리들 말구 어케 대책을 강구해야 되잖겠습니까.

[취객] 자네가 책임지면 될거 아니야 이 사람아. 자네 압구정동 오피스텔에 세 얻어 산다며.

[실직청년] 큰일 낼 애새끼 낳는다면서요.

[파출소장] 그래 말이다. 인자 좀 우리도 조용하게 살아야 한단 말이다. 조용하게.

[페이지] 016

((이때, 각시 원망 서린 눈총으로 발딱 일어선다.))

[각시] 어떻게 하실 생각들이요?

[파출소장] 뭔 소리야 이게.

[각시] 이게 누구 씨요?

[취객] 그걸 어떻게 알아 젠장.

[각시] 잘 생각해 봐요 누구 자식인가.

[실직청년] 난 생각이 없는 인간입니다.

[각시] (탄식) 아이고, 답답, 내 팔자야--- 산중의 도사보다 차라리 다리 밑의 거지로 사는게 낫다 해서, 내 하늘아래 첫 동네 물 맑고 인심 좋은 고향 땅 등지고 여기로 들어왔는데, 그래,내 희망을 받아줄 남정네가 없단 말이오?!

[파출소장] 이 여자 보자 하니 보통내기가 아니데. 서방 셋 다 차고 살겠단 말이가?

[각시] (파출소장을 붙들고) 나는 상관없소. 이 자식 사람 이름하나 얻어 살게 호적에나 올려주소.

[파출소장] 떽, 난 공인이야 공인! 공인이 어떻게 사생아를 키운단 말이고.

[각시] (취객을 붙들고) 당신은 글줄 깨나 배운 양반께서 이 자식 일자무식으로 키우지는 않겠지요. 내 뱃속에 든 이 희망을 받아주소.

[취객] (훌쩍) 사실 난 생활력이 없는 식자층이요 식자층. 내가 배웠다는 게 당최 세상에 도움이 안 되는거란 말이오

[실직청년] (지레 겁을 먹고 피한다) 난 아직 우리 엄마한테서 얹혀 사는 형편이라서, 자식 책임질 형편이 못 되었네요.

((각시. 절망적인 느낌으로 돌아선다.))

[각시] (한탄) 세상이 아무리 험하다 하더라도, 인간은 세상 속에 살섞고 살아야 한다 하길래, 내 산중 시냇물처럼 흘러흘러 낮은 곳으로 내려왔겄만, 이세상 내 작은 희망을 받아주지 못하는구나.

((각시, 포장마차 위로 훌쩍 뛰어 올라 등불에 걸린 줄을 풀어 목을 묶는다.))

[파출소장] 살인난다이--- (하면서, 달려들고)

[취객] 빨리 저년 풀어라아--- 살인나면 우린 공범이다아 (하면서, 포장마차위로 뛰어오르는데)

((훌쩍 낙엽처럼 떨어져 뒹구는 각시 팽팽해지는 밧줄.))

[실직청년] 살인났다.

((일순, 정적이 흐르고))

[페이지] 017

[파출소장] 지 죽고 싶어서 죽은 거 우리가 뭔 죄가 있노.

[실직청년] 이거 어떻하죠?

[취객] 어떻하긴 어떤해, 어디 치워야지. 이러다가 순찰도는 순경이라도 보면 어떻할려구.

[실직청년] 순경 옆에 놔 두고 무슨 걱정입니까.

[파출소장] 이 사람들 지금 멀쩡한 사람 옆에 놔두고 엿 먹는 거야 뭐야.

[취객] 어떻하지 이거.

[파출소장] 어떻하긴 어떻해 치워야지.

[실직청년] 어디로 치운단 말입니까.

[파출소장] 아무데나 무른 땅에 팍 파묻고 덮어 버리면 될꺼 아니가. 요새 실종자가 어데 한둘이가.

[취객] 맞는 말이야. 요새 사람 목숨 개 값이지 뭐.

[실직청년] 얼른 치웁시다, 그럼.

((하면서 세 사내 각시 시체 곁으로 다가가는데 어디서 아기 울음소리 세 사내 흠칫 멈춰선다.))

[파출소장] 이거 무슨 소리고?

[실직청년] 각시 귀신이 곡하는 소리 아닙니까.

((하면서 밤공기를 둘러보는데 점점 분명해지는 아기 울음소리))

[취객] 아기 울음소리야.

[파출소장] 뭐라고? 어느 매정한 년이 또 애새끼를 밤에 갖다 버릿나.

((취객, 긴장된 눈빛으로 각시 배에 귀를 댄다.))

[파출소장] (흠칠) 뭐꼬?

[실직청년] (흠칠) 설마, 그 속에서 나는 소리는 아니겠죠?

[취객] 여기서 나는 소리가 분명해.

[파출소장] (울상) 아이고, 이게 무슨 날벼락이고!

[실직청년] (흥분) 기적이에요, 이건 기적이라구요!

[파출소장] (어이없다) 그라믄, 누구 씬지도 모를 애기가 저 각시 뱃속에서 울고 있단 말이가, 지금?!

[취객] 그런 거 같애.

((세 사내 얼어붙는다. 아기 울음소리가 분명해진다.))

[페이지] 018

[실직청년] (울음을 떠뜨린다) 빨리 꺼내줘요,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파출소장] (울음을 떠뜨린다) 아이고 내 팔자야, 내 새끼가 저 죽은 뱃속에서 울고 있단 말이가? 아이고 불쌍한 내 새끼 (벌떡 일어나며 고함) 어서 식칼 가져 온나. 배를 갈라서도 애새끼는 살려야제!

[취객] (울음을 터뜨린다) 누구 씬지도 모를 애를 꺼낸단 말이야!

[실직청년] 이런 매정한 인간 봤나. 하여튼 늙으면 죽어야 돼. 사람 탈을 쓰고 그러면 안된단 말이오!

[파출소장] 맞는 말이다. 퍼뜩 식칼 가져 온나.

[취객] 가만 있어봐. 아무래도 저 울음소리가 수상해.

[파출소장] 거 무신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고?

[취객] 적성이 북쪽으로 떨어지면 역적 낳는다고 했지?

[실직청년] 천지개벽 일으키면 큰 인물 되는 거지요, 뭐.

[파출소장] 아이고, 인자 좀 조용히 살아야지. 천지개벽 나 싫다.

[취객] 우리--- 조용하게--- 묻자.

[실직청년] (버럭) 당신들은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난 아직 젊단 말이오! 난 이렇게 살아갈 수 없어요. 자신의 도덕성을 의심할 지경에 이르렀다면 파산선고들을 내리시오!

((실직청년, 각시에게 다가서려는데))

[파출소장] (곤봉을 돌리며 위협적으로 막아선다) 너 새파란 청춘 아깝지 않냐.

[실직청년] 거 무슨 소리요.

[취객] 귀 볼때기 새파란 놈이 어른 시키는 대로 따르면 될 것이지. 요새 젊은것들은 당최 어른 말을 안 들어.

[실직청년] (물러서며) 좋소, 마음대로들 하시오. 각자 따로 놀면 되니까.

[파출소장] (돌아서는 실직청년의 어깨를 툭 친다) 들어라.

[실직청년] 뭘요?

[파출소장] (각시의 시체를 가리키며) 빨리 들어란 말이다.

((실직청년, 두 사람의 위협적인 시선에 주눅이 들어 각시를 든다.))

[파출소장] 어디 갖다 묻지 이거?

[취객] (신도림 지하철역을 가리킨다) 저기.

((세 사내 각시를 매고 느릿느릿 돌아서 간다. 드높아지는 아기 울음소리를 무서운 굉음을 일으키며 달려오는 지하철 열차 소음이 밟고 지나가 버린다. 어두워지고 빈 밤을 가로질러 오는 도시의 뮤직박스 교주가 뮤직박스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교주] (지상에서의 마지막 기도를 진행시킨다) 어머니, 그 바다 같다는 어머니의 풍성한 젖을 빨아 보지 못하고 자란 이 아들이 여기 1톤

[페이지] 019

짜리 금 십자가를 선물하나이다. (십자가를 던진다) 아버지, 그 태산 같다던 아버지의 구렛나루 휘날리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자란 이 후레자식이 여기 1톤짜리 금 구두를 선물하나이다.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가 정말 고매한 목사님이시라면, 절 하늘나라 장로로 추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사이) 네? 그렇게 개판치고도 하늘나라를 꿈 꾸느냐구요? 체, dog도 거꾸로 읽으면 god가 되지 않습니까. 저 이제 올라 갈께요. 아버지. (공중에서 내려진 오랏줄에 목을 건다)

[앵벌이] 교주님, 거기서 뭘 하고 계십니까?

[교주] 응, 내가 누울 별자리를 관찰하고 있지.

[앵벌이] 아이고, 우릴 놔두고 어디로 가시려구요?

[교주] (극장 안을 향하여 외친다) 형제들이여, 악마 같은 내 형제들이여! 이제 그대들이 깨어나면서, 이 세상은 저무는 20세기의 황혼을 보리라

((교주, 뛰어내린다 앵벌이, 흐느끼면서 공중에 매달려 하늘나라로 가는 교주를 보다가 그만 털썩 무릎을 꺾는다,. 땅바닥에 엎드려 통곡하는 앵벌이. 한편, 하늘나라 한 공부방. '암중모색'의 흰 띠를 두르고 열심히 책을 읽고 있던 우국 청년이 하늘나라로 전입해 오는 교주를 보고 씽긋 웃는다. 불이 꺼진다. 어둠 속 슬픈 하모니카 소리. 맹인가수와 걸식소년 미카엘이 빈 지상에 당도한다.))

[걸식소년] (포장마차를 본다) 아빠, 포장마차에 불이 꺼져 있어.

((두 사람, 포장마차 곁으로 간다.))

[걸식소년] 연탄불은 아직 살아 있어.

((이때, 다시 아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아득하게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적막을 깨는 아기 울음소리 걸식소년과 맹인가수가 밤을 허우적이며 울음소리의 행방을 찾는다. 지하철 거대한 돔 안. 한 점 숯불 같은 것이 피어오르고 그 불빛을 캐는 맹인가수와 걸식소년. 그들에 의해 지금 여기 우리의 새로운 신화는 재생된다. 그들의 손에 의해 캐내어지는 각시와 아기의 생생한 모습. 그 모습은 서로 따뜻하게 체온을 나누고 앉은

[페이지] 020

모자상(母子像) 으로 표현된다. 맹인가수와 걸식소년, 모자상을 모셔와 포장마차 위에 앉힌다.그리고, 신도림역을 알리는 지하철 표식통 불빛을 끈다. 어둠이 오고 다시 새벽이 오는 시각. 불 꺼진 신도림역전은 탈을 쓴 인간들의 모습뿐이다. 이때, 우리는 각시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각시의 음성 지금 열차가 도착하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은 위험하오니 안전선 밖으로 한 걸음 물러나 주시기 바랍니다.

((탈을 쓴 인간들, 뒷골이 서늘해지면서 신도림역전에 흰 돛이 뜬다. 새벽안개 속을 헤치며 나오는 돛배. 그 돛배는 각시가 끌고 오던 포장마차며 그 돛배엔 여전히 등불이 켜져 있다. 맹인가수가 앞장을 서고 걸식소년 미카엘이 마차를 끄는 흰 돛배는 이제 또 다른 고해의 세상을 향해 새로운 항해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 돛 아래 소복의 각시가 앉았고 각시의 품속에 살아 눈뜨고 있는 동자상. 탈을 쓴 인간들은 그제서야 눈물을 흘리며 자신들의 탈을 벗어 각시의 돛배 위로 던진다. 모두 탈을 벗고 죄의 허울을 벗는다. 앵벌이 소년이 필사적으로 가면서 자신의 탈을 가져가 달라고 뒤따른다. 나의 죄도 씻어달라고 필사적으로 기는 앵벌이 소년에게 각시의 눈길이 닿고 각시의 손길이 천천히 열린다. 내 그대의 죄도 씻어가리라. 그러나 각시의 손길은 앵벌이의 탈을 끝내 받아주지 못한다. 앵벌이의 절망적인 모습 지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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