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이야기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조르주 바타유 지음, 이재형 옮김 / 비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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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의 시작점이 다른 에로티슴과 죽음의 이야기.


 비채에서 조르주 바타유의 신간인 <눈 이야기>가 출간 된다는 소식을 듣고 난 이후부터 근 1년간 기다려왔다. 그의 저작들을 하나도 접해보지 않았지만 전방위적인 영역의 글을 쓰는 그의 이름을 여기저기서 접해본 터라 그의 작품이 너무나 궁금했다. 99년에 푸른숲에서 번역되어 나왔을 때는 <하늘의 푸른빛>과 합본되어 나왔지만 이번에는 따로 나뉘어 나왔다. 에로티슴의 거장인 조르주 바타유의 자전적인 이 소설은 표지에서 드러난 은밀함 때문에 왠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강렬한 인상을 줄 것 같은 예감에 펼치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보여주는 남녀간의 운우지정을 보여주는 것과 달리 그의 문학적 사유는 성을 탐닉하는 것 이상으로 비이상적인 체위와 몸짓이 만연하게 그려진다.


이성적인 사랑의 방식이 아니라 어딘가 비틀려진 인간의 태초의 몸짓과도 같은 날 것의 방식으로 그들의 사랑을 드러낸다. 사람과 사람과의 몸짓이 성스럽거나 혹은 야한 언어로 대변 되기 보다는 그들이 표현하는 언어적 방식은 거리낌없이 방출하는 것이다. 그것이 십대 아이들의 몸짓으로 보기에는 풋풋하거나 아름답지 않는 굴곡된 모습이라 조르주 바타유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이 무엇인가, 골몰할 정도로 그의 작품으로 그의 언어를 따라가기란 쉽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눈동자는 대부분 위쪽 허공을 향했으며, 그런 일은 특히 그가 오줌을 싸는 순간에 일어났다. 그런데 그는 매의 부리 모양으로 잘려진 얼굴에 늘 눈을 크게 뜨고 있었기 때문에 오줌을 쌀 때면 그의 커다란 눈이 거의 대부분 흰자위만 보였다. 그럴 때에는 오직 그만이 볼 수 있는 세계, 그로 하여금 냉소적이고 멍하고 모호한 웃음(여기서 나는 예를 들면 맹인의 고독한 웃음이 갖는 유주적遊走的 특성 등등을 여기서 한꺼번에 환기하고 싶다)을 짓게 만드는 어떤 세계 속에 버려져 방황하는 듯한 따분한 표정이 얼굴에 나타났다. 어찌됐든 내게 있어 달걀의 그것과 직접으로 연관되어 있으며, 이 이야기 속에 '눈'이라든가 '달걀'이 나타날 때마다 거의 규칙적으로 따라붙는 오줌의 출현을 설명해주는 것은 바로 이 순간의 '눈'의 이미지이다. - p.133


남녀의 몸짓으로 하여금 환희의 감정이 솟을 때 드러나는 에로티슴을 조르주 바타유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 본능인 '오줌'으로 대변한다. 끊임없이 그는 두명이든 세명이든 그들의 언어를 표현하고 환희의 감정을 내품을 때는 오줌을 싸게 되고, 그것이 드러운 배출의 현장이 아니라 당연한 듯 받아들이는 그들의 모습이 놀랍기만 하다. 소설을 읽었을 때는 왜 이런 이미지로 표현이 될까 궁금했는데 수전 손택의 해설과 2부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통해 조르주 바타유의 <눈 이야기>에 대한 힌트를 얻었다. 그의 언어는 생경한 언어였고,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그가 보여주는 전통적인 서술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금기의 언어를 이야기한다.


나는 결코 이런 유의 추억에 연연해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 추억이라는 것이 이미 오래전에 온갖 감정적 특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추억들이 언뜻 알아보기 힘들게 변형될 때 생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추억은 그렇게 변형되면서 가장 음란한 의미를 띠었기 때문이다. - p.137


그들이 누리고 표현한 몸짓은 언뜻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더러운 혹은 인간의 태초의 원형이라 생각한다면 그들의 언어는 음란하면서도 매혹적이었다. 이들의 표현을 더럽게 볼 것인지, 아니면 남녀의 사랑의 몸짓에 대한 위반인지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포르노그래피하면 뭔가 더 야한 몸짓을 떠올리겠지만 <눈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모습은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에로티슴의 언어였다.


《눈 이야기》와 《마담 에두아르다》가 강렬하고 충격적인 인상을 주는 한 가지 이유는, 포트로그래피가 실제로는 섹스가 아닌 죽음을 의미하는 것을, 바타유가 내가 아는 다른 어떤 작가보다 더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포르노그래피 작품이 대놓고 혹은 은밀하게 죽음을 말하고 있다고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정욕과 '음란함'의 테마를 특정하고 날카롭게 굴절시킨 작품만이 그러하다. 그러한 작품은 정욕을 만족시키고 초월하는 것으로 죽음의 희열을 향해 나아간다.  - p.185


조르주 바타유의 <눈 이야기>를 읽다보면 언뜻 영화 '몽상가들'과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들이 떠오른다. 남녀의 몸짓과 인간에게 떼어놓을 수 없는 환희의 상징이 돌고 돌아 죽음을 의미하는 것. 클림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다 보면 조르주 바타유가 말하는 강렬하고 충격적인 모습이 연결되어 이해가 될 것 같다. 생경한 언어였지만 다른 언어로서 표현되는 몸짓의 향연들이 다채로운 이미지로 느낄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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