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번째 이야기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다이안 세터필드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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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늘하고 매혹적인 단 한 권의 이야기.


 이야기를 좋아해 소설을 읽은지 벌써 여러 해가 지났다. 어느 정도 책을 접하고 나면 이야기에 대한 갈증이 사라지겠지, 라고 생각했건만 아직까지도 소설을 읽으면 읽을수록 갈증이 생겨난다. 이야기 바다에 허우적거리면서도 자꾸 소설을 찾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책을 읽으면서도 내내 그 답을 하기 위해 고민하고, 사유하면서도 뚜렷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언젠가 책을 읽다보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까.


몇 년전까지만 해도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의 주인공 히스클리프의 지독한 사랑을 이해하느라고 그녀의 소설을 몇 번을 읽었는지 모르겠다. 책을 읽고 단번에 '히스클리프의 사랑'에 빠져 그를 이상형으로 지목한 사람들의 답이 이해가 가지 않아 몇 해에 한 번씩 <폭풍의 언덕>을 읽기도 하고 그의 사랑을 생각하며 그 깊이를 가늠해 보았다. 다이앤 세퍼필드의 <열세 번째 이야기> 역시 에밀리 브론테의 작품과 같은 매혹적이면서도 우울하고, 슬프면서도 아름답고, 기이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는 소설이다. 


인간은 죽음과 함께 사라진다. 그들의 목소리, 그들의 웃음, 숨결의 온기, 살과 뼈도 함께 사라진다. 살아 있는 그들의 기억도 거기에서 멈춘다. 슬프지만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소멸에는 예외가 있다. 그들이 남겨놓은 책 속에서 그들은 영원히 존재한다. 책을 통해 우리는 그들의 존재를 다시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의 유머, 문체, 기분까지도. 그들은 책을 통해 독자를 화나게 할 수도 있고 행복하게 할 수도 있다. 세상을 떠났지만 그토록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 p.30


글을 쓴다는 것은,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것은 무엇을까 라는 물음이 절로 생겨나는 이 소설은 이언 매큐언의 소설 <속죄>에서 한 소녀의 거짓말로 연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버리는 이야기는 아니나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지독한 사랑이 결합되어 각 인물의 탄생과 죽음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돌아 영국 시골마을인 앤젤필드 가의 3대에 걸친 이야기를 유명 작가인 비다 윈터를 통해 듣게 된다. 그녀가 쓴 모든 작품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내렸지만 한 번도 진짜 인터뷰를 한 적이 없어 비밀에 싸여있는 비다 윈터가 아빠의 헌책방에서 일을 도우며 인물들의 전기를 쓰는 마거릿 리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내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진실의 조각을 맞춰나간다.


"조금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사실이 그래. 지금까지의 내 삶, 내가 경험한 모든 일들, 내게 일어난 모든 사건들, 내가 아는 모든 사람, 나의 모든 기억, 꿈, 환상, 내가 읽은 모든 것들. 그 모든 것이 그 퇴비더미에 던져졌다네. 시간이 흘러 반죽이 발효했고 결국엔 검고 비옥한 거름이 된 거야. 세포분열을 거치면서 본래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지. 어떤 사람들은 그걸 상상력이라고 부르지. 난 그걸 퇴비더미라고 생각한다네. 때때로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나는 그걸 그 거름 위에 심어놓고 기다리지. 나의 생각은, 한때는 생명이 있었던 퇴비로부터 양분을 먹고 자라는 거야. 그리고 스스로 힘을 갖게 되면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지. 그러다가 어느 화창한 날, 난 하나의 이야기, 소설을 갖게 되는 거야." - p.73


비다 윈터는 마거릿 리에게 자신의 이야기인 앤젤필드 가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절대 자신이 하는 이야기를 끊어서도, 질문하지도 않아야 한다는 약속을 한다. 그것은 책을 처음부터 읽어나가는 방식과도 닮아 있어 읽는 내내 비다 윈터라는 인물이 갖는 진실과 거짓말, 앤젤필드 대저택의 사연이 엮이면서 기묘하게 느껴진다. 아름다운 대저택에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은 오래도록 해피엔딩이 될 줄 알았으나 사랑하는 아내가 죽으면서 조지 앤젤필드는 절망에 빠져 버린다. 그는 아들인 찰리와 딸 이사벨 사이에서 그는 이사벨만을 집착적으로 사랑하게 되고 아들인 찰리는 관심 밖이다. 그런 그의 사랑이 무섭도록 휘몰아 치면서 찰리는 아버지의 관심이 멀어지는 것을 즐기면서도 삐뚤어진 애정을 갖게 된다.


오빠인 찰리 또한 동생인 이사벨을 사랑하게 되지만 이사벨은 다른 남자와 함께 떠나 버린다. 그 후 이사벨이 낳은 쌍둥이 에덜린과 에멀린 또한 기묘한 행동과 서로에 대한 집착으로 두 사람의 세계에 빠져있다. 앤젤필드 가문의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정상적인 인물이 없다. 저마다 삐뚤어진 사랑과 집착으로 한 사람에게 올인하게 되지만 결말은 '광기'에 치닿는 사랑이 독이 될 뿐이다.


'사람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끔찍한 고통에는 쉽게 익숙해지는 법이라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잊곤 하지.' -p.87


비다 윈터가 말하는 이야기 속에서 인물들은 저마다 기묘한 행동으로 살아가게 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함께 살아왔던 가정부와 정원사, 쌍둘이들을 돌보았던 가정교사까지도 죽거나 사라진다. 크나큰 저택에서의 삶은 그 누구도 행복하지 않았고 비다 윈터가 말하는 앤젤필드 가는 죽어가듯 기묘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그 저택에 살았던 이들의 이야기를 도저히 내뱉지 않고 서는 도저히 살아 갈 수가 없었던 그녀의 이야기는 조각조각 맞춰가는 퍼즐처럼 맞아 떨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속임수처럼 맞을 듯 맞아들어가지 않았다. 과연 그 아이들이 벌였던 사건은 누구의 손길이었을까? 3대에 걸친 이 매혹적인 이야기를 품고 누군가에게 건네주지 않았더라면 사라져 버렸을 그 이야기를 비다 윈터는 전해왔고 그것이 열세 번째 이야기로 남아 그들의 사랑이야기를 살아 숨쉬게 했다.


<폭풍의 언덕> <제인 에어>의 음울하면서도 기묘하고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다이앤 세터필드만의 필치를 통해 뽑아 내었다. 2007년에 출간된 <열세 번째 이야기>를 근 10년이 흘러 다시금 접할 수 있어서 좋았다. 두꺼운 두께 만큼이나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빠르게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폭풍처럼 강렬하게 다가왔던 사랑을 조금 더 깊게 표현해주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 퍼즐을 맞춰나가는 재미도 있었지만 이름이 헷갈려 몇 번을 다시 읽고 읽었던 작품이다. 누군가의 지독한 사랑의 궤적을 잊지 않고 말해주는 동시에 삐뚤어진 사랑의 이야기를 봉인하여 다시 책으로 묶어 놓은 것 같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작품이다.


"자네가 원한다면 아무 말도 안 해도 좋아. 하지만 이야기는 침묵을 좋아하지 않아. 이야기에겐 말이 필요해. 말을 하지 않으면 이야기는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엔 죽어버리고 말아. 그리고 영원히 우릴 따라다니지." - p.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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