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치하야 아카네 지음, 박귀영 옮김 / 콤마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차가우면서도 냉정한, 스산함이 느껴지는 연작소설.


 

 표지가 너무 예뻐서 밝은 내용의 '사랑이야기'가 담겨져 있을 줄 알았다. 제목에 무게는 와 닿지 않은걸까. 책을 다 읽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표지를 보고 있으니 소녀의 곁에서 팔랑이는 나비는 소녀의 친구일까, 아니면 그저 지나가는 바람일까. 어딘가 모르게 소녀와 나비는 같은 세계를 공유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흔적의 뜻을 사전에 찾아보니 어떤 현상이나 실체가 없어졌거나 지나간 뒤에 남은 자국이나 자취를 뜻하는 단어였다. 흔적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쓸쓸한 단어였구나를 새삼 실감했다.


 

치하야 아카네 소설은 차가운 유리 글라스 같다. 차가운 표면믄 보는 이로 하여금 매끄러워 완벽 할 것 같다는 인상을 주지만 어딘가 모르게 안쪽 몸피에 금이 살짝 가 있을 것 같다.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가 서로 마주 보는 사랑이 아니라 각자 벽을 마주 보며 공허해 한다. 자신의 공허함과 비어 버린 가슴을 상대방으로 하여금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크기 때문에 상대방 보다는 '나'를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내가 선택한 사람이 사람이 나를 봐주지 않기 때문에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 위로를 받는다.

 

<흔적>은 총 6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연작소설처럼 각 단편의 이야기가 이어져 있다. 흔히들 사람들이 말하기를 6단계만 거치면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에서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처럼 서로가 서로를 모를 것 같지만 각각의 인연이 거쳐간 사람들이 서로 스치듯 알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보통 동화에서는 두 남녀가 만나 사랑을 하고 그 사랑의 행복한 끝을 결혼이라고 보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결혼을 했다고 두 사람 모두가 남은 삶을 행복하게 살았다는 동화적인 해피엔딩을 누구나 다 볼 수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우리는 그것을 경험하게 되고 서로 인내하고 노력해야 되지만 소설 속에서는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고, 서로가 곪아가는 부분을 스스로 인지하고 온기가 부족한 부분을 다른 이로 채워가는 면면을 작가는 섬세하게 그려낸다.


 

밤의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거실에서 생각했다. 매일 떠오르면 된다. 아무것도 남기지는 못하더라도. 빛을 빼앗기더라도. 매일 새로운 불을 켜면 된다. - p.69

 

 

누군가에게도 살갑게 와닿지 않는 직장 동료인 구로사키가 자살을 했고, 아이와 아내가 있지만 어딘가 모르게 뛰어내린 구로사키모습이 자신을 둘러 보게끔 만든다. 아내와 아이와의 서먹하고 집 조차도 어딘가 모르게 자신이 편히 쉴 휴식처로서 감싸주는 무엇이 없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끊임없이 희망을 이야기 하고 있지만 어딘가 모르게 위태로움이 느껴진다. '손자국'이라는 단편이 그 남자의 이야기라면 '반지'는 그 남자의 아내 아케미의 이야기다. 살아온 시간에 따라 남들이 바라고, 물어온 그대로의 삶의 형태를 따라가는 여자의 모습. 그러나 그 시간 속에서 자신의 마음은 충족되지 않고, 괜찮다 싶어 결혼한 남자와의 애정은 살며시 사라지고, 자신이 낳은 아이 마저도 애정을 듬뿍 줄 수 없는 딜레마의 단계를 거치고 있다. 그녀가 공허함을 채울 수 있는 방법으로 택한 것이 바로 모르는 어느 연하남과의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피를 나눈 가족이라도 다른 개체다. 뭘 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두 다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서로 사랑한다고 해도 타인인 이상 얼마든지 상처를 줄 수 있다. - p.101

 

 

각각의 관계에 대한 상호적인 모습이 아니라 그저 공허한 마음을 채울 수 있는 다른 사람을 찾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떤 흔적을 남기기도 하지만 때로는 강렬한 흔적 보다는 세월이 지나면 잊혀져 버릴 흔적들을 남기는 사람들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주인공들이 소통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아 조금은 답답했고, 누군가를 통해 마음의 안위를 얻는 모습이 유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말을 통해 얻는 위안 이외에 아케미가 선택한 방법은 그저 또 하나의 생채기를 자신에게 남기는 것은 아니었을까.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다고. 결국 스스로 정해야 해. 도망치고 싶으면 계속 도망치면 되고. 도망칠 곳도 시간도 한계가 있다는 건 끝까지 도망쳐 보지 않으면 깨닫지 못하는 법이니까. - p.182

 

"괜찮아. 설령 내일 세상이 끝난다 해도, 물고기도 사람도 분명 사랑은 할 테니까. 사랑하는 상대와 일 분 일초라도 더 함께 있고 싶다고 바랄 거야. 그건 뭔가를 남기고 싶어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로서 당연한 생각이니까.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다 해도······. 이제 당신 마음에 솔직하게 살아. 당신이 음악으로 나에게 알려 준 거잖아." - p.212


 

개인적으로 가장 재밌게 읽은 단편은 '손자국'과 '반지'다. 연작 단편이기에 서로 이어져 있는 이야기이지만 이 두편의 단편은 남편과 아내의 이야기를 동전의 양면처럼 담아 더 선명하게 어우러진다. 남녀간의 생각이나 차이, 두 사람간의 끈들이 희미하게 보이지만 앞으로 그들이 살아갈 날이 그 남자의 이야기처럼 계속 불을 켜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들이 희망적으로 들려올 수 있는지 궁금했다. 스산하면서도 짠한, 공허함이 느껴지는 소설이라 읽는 내내 생각이 많아지는 작품집이었다.


 

"있잖아, 지카게 씨. 아마도 이 세상은 불안정하고, 뭐든 간단히 망가져 버려. 변하지 않는 것 따위 없고, 뭔가 남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게 한순간에 사라져 버릴지도 몰라. 그대로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건 대단한 일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해." - p.2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