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임신중절 - 어떤 역사 로맨스 ㅣ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리처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 비채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동화에서 현실로 이어가는 사랑이야기.
동화를 읽다보면 마음이 참 순수해진다.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 역시 주인공들이 많은 고난을 겪어도 그의 따듯하고 심성이 고운 마음씨 덕분에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역경을 이겨내고 멋진 왕자님과 함께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로 멋진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아이였을 때는 책을 읽을 때마다 이렇게 끝이나는 해피엔딩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책을 덮고 나면 왠지 모를 뿌듯함과 친구처럼 여긴 주인공들이 이제는 힘겹게 살아가지 않는다는 안심 때문인지 그 결말이 좋게 여겨졌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동화처럼 항상 좋은 결말로 끝이 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도 많기에 이제는 동화의 '예쁜결말'은 그저 소설 속에서나 존재하는 이야기로 치부되기도 한다. 그저 내가 꿈꾸는 환상의 이야기랄까.
유년시절에 봤던 동화가 아이들의 동심을 더 키워주기 위해 각색한 책이라면, 시간이 지나면서 동화의 민얼굴을 한꺼풀 떨구어내고 진짜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그 것은 그것대로 잔악하고 어두컴컴한 세계를 바라보는 암흑동화였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동화를 접할 기회가 적어졌지만 좋은 작품에 한해서는 아직도 동화를 읽기도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어른들의 동화는 '로맨스 소설'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진짜 아이들이 읽는 동화 보다는 어른들의 사랑이야기가 들어간 '로맨스 소설'을 읽는다.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임신중절>은 기존의 도서관에서 근무하고 있는 사서와 달리 책으로 출간되지 못한 원고나 문서를 보관하는 일을 맡은 캘리포니아의 도서관 사서와 자신이 쓴 글을 도서관에 맡기려고 찾아간 바이다와의 사랑이야기다. 기존에 출간된 책을 소장하고 대출하는 것을 넘어서 자신이 쓴 글을 가져와 서가 아무데나 꽂을 수 있고, 이 책의 화자인 '나'는 낮밤 가리지 않고 어느 시간 때나 도서관 회원들을 맞이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이다. 마음씨가 고울 뿐 아니라 막무가내인 사람들 역시도 그가 항시 그가 도서관에 상주하면서 그들의 고달프고 애환이 가득한 사연을 들어준다. 그러다 만난 이가 아름다운 몸매를 가진 바이다 라는 여자다.
순수한 도서관 사서와 아름다운 몸을 가진 여자와의 만남은 곧장 사랑으로 이어졌고 두 사람은 동화처럼 사랑에 빠져들었다. 바이다로 말 할 것 같으면 그녀는 가만 있는데, 그녀만 보면 남자들이 정신을 잃을 정도로 그녀의 몸매에 남자들의 탐심이 가득해 어렸을 때부터 그런 음흉한 시선들 속에서 불편함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었다. 부풀어진 미담처럼 그녀를 바라보다가 사고를 당한 남자들이 즐비했고, 그녀는 자신의 몸을 쳐다보는 남자들의 시선 때문에 자신의 몸을 더 싫어했다. 지금껏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 글을 쓴 바이다, 그러나 그와의 만남은 불쾌하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서로에 대해 매혹되어 사랑에 빠지지만 그들의 동화는 계속해서 진행되지 않는다.
나는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프리웨이를 내려다보았는데, 이른 아침의 공항은 마치 우주의 내장 위에 세워진 스피드 있는 중세의 성처럼 보였다. - p.132
유쾌하면서도 순수하고, 단막극을 보듯 짧게 이어지는 그들의 이야기는 서로의 사랑으로 잉태된 아이가 생기면서부터 두 사람의 동화는 깨어진다. 이때부터가 진짜 현실로 이어지는 사랑이야기다. 남자와 여자의 결합을 통해 잉태된 아이를 사산하는 주제는 더 이상 '동화'가 아니다. 그들의 순수한 사랑은 순수함으로 끝을 낼 수 없다. 두 사람이 아직까지 자신의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없는 상황이기에 두 사람은 서로 이야기를 한 끝에 아이를 낙태하기로 결정한다. 낙태가 합법적인 곳인 멕시코 티후아나로 건너가 임신중절을 하기로 하고 두 사람이 여정을 떠나는 내용이다. 사랑을 하는 것 만큼이나 그들의 사랑의 결실은 멕시코의 한 병원에서 손 쉽게 사라졌다. 짧은 여정을 마치고 돌아왔지만 이내 도서관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된다. 한 곳에 머무르며 동화처럼 살아가던 그들이 다시 수면 위로 오를 수 밖에 없는 환경이 된 것이다. 리처드 브라우티건은 이처럼 우리에게 동화적 환상의 끝은 결국 현실이라는 무대에서 산산히 조각난다는 것을 다시금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