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유리 갈대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3
사쿠라기 시노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내면의 수심이 깊게 자리잡고 있는 이야기
책의 띠지만 읽었을 때에는 이런 '막장' 같은 이야기가 또 있구나 싶었는데 막상 책을 읽고 보니 띠지의 선명한 문구 보다 제목이 주는 여운이 더 깊이 오래남아 있는 책이었다. 책은 비교적 잘 읽히나 사쿠라기 시노가 말하는 여자의 일상, 관능과 서스펜스의 조합은 어딘가 모르게 물결에 흐느끼는 해초 같은 느낌이 들었다. 주인공인 세쓰코의 삶은 단조롭지 않았고, 엄마 리쓰코에 의해 어렸을 때부터 남자들과 관계를 맺는 것동조했다. 중학교 이후 부터 그녀는 아이였지만 아이가 아니었고,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 였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는 상태가 계속되는 것보다 한번 무덤에 묻는 편이 서로를 위한 거야. 당신은 앞으로도 살아갈 테고." - p.37
엄마의 애인이었던 고다 기이치로는 애인인 리쓰코 대신 그녀의 딸인 세쓰코와 결혼했다. 그의 세번째 부인으로. 그냥 보기에는 굉장히 이질적이면서도 이상한 이야기 같지만 사쿠라기 시노의 <유리 갈대>를 천천히 읽다보면 이 이상한 구조의 이야기가 하나도 비정상적인 관계로 느껴지지 않는다. 나이가 많이 차이가 나지만 고다 기이치로는 세쓰코에게 쓰기에 부족하지 않는 풍족함과 안락한 공간을 제공한다. '사랑'으로 맺어지지 않은 관계이지만 남편에게 느끼는 느낌은 그저 자신이 세상 밖에 나갔을 때 흔들리지 않는 버팀목 같은 존재로 느껴졌다. 남편과 관계를 맺는 대신 세쓰코는 남편의 러브 호텔의 세무사인 사와키와 관계를 맺는다. 그와의 관계 역시 사랑이 아닌 그저 서로 따스한 체온을 잠시 맞댈 수 있는 관계일 뿐이라고, 사와키는 느끼고 있고 세쓰코 역시 그와의 관계를 깊이 정의하지 않는다.
주인공인 세쓰코의 마음이 느껴질 듯 느껴지지 않는 내면의 심연이 깊게 자리 잡고 있는 것처럼 그녀의 남편인 고다 기이치로 역시 수수께끼의 인물이다. 세쓰코와 결혼을 했으면서도 그의 전 애인이자 장모인 리쓰코와 헤어지지 않고 여전히 관계를 맺고 있고 죽을 때 조차도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내고 돌아와 교통 사고가 난 비운의(?) 인물이기도 하다. 사고로 혼수상태가 되어 몇 개월 동안 병원에 누워 있을 때 세쓰코의 삶이 평온한 일상으로 걸어가지 못하고 엄마 리쓰코와 있을 때처럼 폭력적인 삶을 살았던 자신의 모습을 반추시킬 수 있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이야기는 점점 생각지 못한 결말로 향해 나간다.
처음에는 함께 단가를 배우는 사노 미치코와 그녀의 딸 마유미가 세쓰코의 삶에 어떡해 엮일지 몰랐다. 그저 잠시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의 시아를 벗어나 잠시 세쓰코에게 맏겨두는 것으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세쓰코가 의붓딸인 고즈에에게 마유미를 잠시 맡기고 두 아이들을 볼 때마다 그녀가 감춰두었던 생채기가 하나하나 벗겨졌고, 마유미의 아빠의 파렴치한 행동이 결국 그녀가 꽁꽁 싸매놓은 상처를 헤집어 놓았다. 아마도 마음의 내면은 잔잔한 호수가 아니라 성난 파도를 담고 살았을 세쓰코가 행동하는 동기는 마유미의 사건이 가장 크게 자리 잡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녀와 관계된 모든 것을 끊어 버렸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 또한 예견된 일이다.
세쓰코의 가집을 한 글자도 빠짐없이 다 읽었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사와키는 자신들이 세쓰코의 단가처럼 말라빠지고 긴 갈대의 대롱을 흘러내리는 모래알 같다고 생각했다. 이따금 서로 비비고 엉키고 하면서 그저 흘러가는 것으로 서로를 지키고 있다. - p.193
엄마의 애인과 결혼하고, 결혼을 해서도 전 애인과 관계를 맺는 남편과 남편의 세무사와 관계를 맺는 아내. 이것이 남녀가 맺는 관능적인 삶을까. 그 어떤 관계에서도 '깊은 사랑'이 전제된 행위였다면 더없이 매력적으로 느껴졌을 행위가 누군가의 사랑이 아니라 그저 허무하고 지루한 일상에서 숨을 쉬듯 행하는 행위라면 그것은 관능이기보다는 그저 시간에 몸을 던지며 살아가는 자학적인 행동이 아니었을까 싶다.
'의지할 데도 없고 구속하는 곳도 없는 사람에게는 내일이 필요 없어져요' - p.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