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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배운다 ㅣ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6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사랑이라고 쓰고 '독'이라 부른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에는 많은 종류의 사랑이 있다. 남녀간의 사랑, 친구간의 사랑, 부모님과의 사랑, 형제간의 사랑등 누군가를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오롯한 마음을 함께 나누는 것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른다. 사랑에는 마주보기 사랑도 있지만 짝사랑도 있고 외사랑도 있다. 마주보기 사랑이 빠알간 하트를 온전히 그려넣는 것이라면 짝사랑과 외사랑은 그는(혹은 그녀는) 모르지만 나 혼자 사랑하는 것이고 혹은 상대방은 알고 있지만 나에게 전혀 마음이 없음에도 나 혼자 열과 성을 다해 그 사람을 내 마음 속에 들여놓는 일이다.
이렇게 사랑의 다채롭고 다양한 종류의 사랑 중에서 애거사 크리스티가 그린 사랑은 가족간의, 형제간의 사랑을 그리고 있다. 사랑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절로 베어 나오는 감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랑'의 정의와 의미가 다채롭게 해석이 되듯 사랑의 색깔이 우리가 알고 있는 색깔로 표현되곤 하지만 때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마음이 뒤틀려 본연의 색깔을 희석시켜 버린다. 나에게는 그것이 사랑이지만 상대방에게는 조여드는 압박이고, 부담이며, 짐이 된다.
"둘째아이의 문제는 실망스러운 결말이기 쉽다는 거야." 존은 훈계하는 투로 말했다. " 첫아이는 모험이지. 첫 출산은 두렵고 고통스러워. 여자는 출산하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남편 역시 그렇게 생각해. 그런데 출산이 끝나면 시끄럽게 울어대며 꼼지락거리는 작은 핏덩이가 있어. 두 사람에게 온갖 지옥을 맛보게 한 장본인이! 부모는 아이를 당연히 아기를 귀하게 여기지! 갓난아기, 우리의 자식. 근사하기 이를 데 없는 거야! 그런데 대개는 갑자기 잇달아 둘째가 생겨. 앞선 과정이 모두 반복되지만 이번엔 별로 두렵지 않고 대신 훨씬 지루하지. 그래서 태어난 아기는 두 사람의 아이기는 하나 새로운 경험으로서의 의미가 없어. 부모에게 큰 위험 부담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별로 근사하지도 않고." -p.21
애거사 크리스티는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필명으로 쓴 소설을 묶어 여섯 편의 장편소설을 모아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으로 묶어 포레에서 출간했는데 <사랑을 배운다>는 이 컬렉션의 마지막 책이다.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한 오빠 찰스가 병으로 죽고 둘째인 로라가 오빠의 자리를 대신하여 오롯한 자식으로 아서와 앨절라의 사랑을 받길 바라지만, 두 사람의 마음에는 딸 로라가 얌전하고 착한 아이라고 생각할 뿐 아이 특유의 매력을 느끼지 못한 밋밋함으로 보여진다. 아빠 아서와 엄마 앨절라의 시선은 그저 착한 딸아이지만 유명한 학자인 존 밸독은 로라의 마음을 꿰뚫어 본다. 그는 로라의 부모에게 로라가 사랑을 줄 수도 있고 받을 수도 있는 강아지를 키우게 하라고 에둘러 말하지만 로라의 부모는 그의 말을 귓등으로 넘겨 버린다.
조용하고 참한 아이 그러나 로라는 오빠 찰스와 동생 셜리를 저주한다. 둘째아이인 그녀는 부모님의 온전한 관심과 사랑을 바라지만 오빠와 동생 때문에 자신이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여기며 형제의 죽음을 기도하지만 뜻밖의 사건으로 로라는 저주가 아닌 자신의 사랑을 셜리에게 꽁꽁 묶어 버린다. 사건의 발단은 늘 슬며시 비춰지지는 미세한 틈 사이로 비져 나온다. 애거사 크리스티는 시종일관 로라의 조용한 행보를 따라가면서도 마음 속으로 보여지는 어두운 마음을 세밀하게 뜯어보며 부모의 사랑을 온전히 받지 못하는 아이의 불안한 심리와 불온함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로라의 유년시절의 심리는 집에 불이나면서 부터 동생에 대한 저주를 사랑으로 스위치를 바꾸며 그녀의 몸과 마음을 동생 셜리에게 쏟아부었다.
하지만 그녀가 느끼는 감정이 그것이었다. 압박····· 분명히 느껴지는 지속적인 압박. 전제 도보여행을 할 때 맸던 배낭의 무게와 비슷했다. 처음에는 잘 모르겠다가 점점 의식하게 되고, 그다음부터는 어깨를 파고들며 몸을 내리누르는 짐 덩어리····· -p.78
로라의 태생적인 사랑의 근원은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기 위한 저주의 시작이자 불안함을 감추기 위한 방편이었기에 셜리에 대한 사랑이 결국 독이 될 수 없었다. 형제간의 사랑조차도 사랑은 마주보기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로라는 자기 자신만을 위한 사랑이었고 모든 것을 주는 사랑이라고 할지라도 상대방이 내가 준 사랑이 '짐'이라고 여긴다면 그 화살은 잘 못 쏘아진 화살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펴자마자 무언가 마음을 조여주는 것처럼 불안감이 서서히 스며들었다. 사랑의 뒤틀림은 결국 두 사람 혹은 제 삼자의 관계를 망쳐 버린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강렬하게 느꼈다. 무엇보다 사건을 서술 하는 것 보다 소설 속에 보여지는 인물의 심리를 현미경을 내려다 보는 것처럼 날카롭게 그리고 있어 읽는 독자로 하여금 손에 땀을 쥐게 만들었다. 등장하는 인물 중 로라에게 많은 조언을 하고 어두운 마음을 날렵하게 캐치한 존 밸독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휘몰아치는 폭풍우처럼 강렬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비구름을 몰고오는 비바람처럼 서서히 그 음울함과 사랑의 무게를 녹진하게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중략) 넌 그냥 관심이 없는거야! 넌 사랑을 주고만 싶지 받고 싶지는 않은 거란 말이다. 거기에 중요한 이유가 있지. 사랑받는다는 건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거니까" -p.9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