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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흑 1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
스탕달 지음, 이규식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스탕달의 『적과 흑』을쓰는 도중에 컴퓨터 오류가 났다. 한 단락 정도만 마무리하면 끝을 맺을 서평이 순식간에 날라가 버렸다. 그야말로 눈앞이 깜깜해서 표지와 같은 '흑빛'을 띄며 적과 흑의 내용을 더듬어본다.
『적과 흑』을읽게 된 계기는 한 사이트에 연재 된 소설 때문이었다. 남자와 여자의 사랑이야기를 마치 적과 흑의 인용문을 따라 상황에 전개되는 것처럼 맛깔난 언어유희를 통해 그들의 마음을 표현한 글이었다. 여자 주인공이 번역한 스탕달의 적과 흑을 말하며 그들은 자신이 인상깊었던 문장을 읊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마음속으로 스탕달의 작품을 꼭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던 작품이었다. 이미 너무나 유명한 작품이라 알고 있었지만 연재된 글 속에서 맛보는 스탕달의 문구는 반짝반짝 빛이 났다.
프랑스 문학인 이 작품은 나폴레옹 정권이 무너지면서 그 후의 폭풍을 묘사하고 있다. 적과 흑이 단순한 연애소설로 치부되었는데 실제로 읽어보니 섬세한 연애소설이라기 보다는 정치적 소설에 가깝다. 순진하고 순박한 시골청년인 쥘리앙 소렐의 이야기는 책을 보다가 아버지에게 걸려 그가 보던 책을 사정없이 냇가에 던져버리곤 그를 때리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가 아끼던 책 중 하나였던 책이 냇가에 휩쓸리는 것을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순박한 소년이 점차 심리적인 변화를 다각도로 겪으며 사랑과 희망과 절망, 야망의 끝으로 가는 심리표사를 섬세하게 그려냈다.
그러나 정열이란 그 음침한 비밀스러움으로 인하여 드러나게 마련이니
아무리 숨겨도 헛일이라.
흡사 가장 어두훈 하늘이
가장 무서운 비바람을 예고하듯이······
- 『돈 후안』 1가 73절(p.97)
사랑(amour)을 라틴어로 아모르(amor)라고 한다.
그러니 죽음(mort)은 사람으로부터 비롯되는 것.
그리고 그 앞에는 마음을 괴롭히는(mord) 근심, 슬픔, 눈물, 책략, 죄악, 회한(remord)이 있다·····
- 사랑의 문장(紋章) (p.132)
사랑의 고삐를 너무 풀지 말게.
아무리 강한 맹세라 하더라도.
정열의 불길에 비하면
지푸라기에 불과하다네.
- 『템페스트』 (p.185)
『적과 흑』 1권.
적과 흑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신분도 재산도 없는 가난한 쥘리앙 소렐이라는 남자가 출세를 하기 위해 사랑을 버리고 정략적인 결혼을 하려다 파멸하는 이야기다. 책만 좋아하던 그가 가정교사로 들어가면서 처음으로 '레날 부인'의 모습을 보고 사랑을 느낀다. 이 책이 섬세하고 예리한 연애소설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이 책을 읽자마자 느낄 수 있는데 하나하나 수를 놓듯 피아노 현이 움직이는 작은 떨림마저도 스탕달은 그들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쥘리앙 소렐의 눈으로 보는 시선이 레날 부인의 손으로, 가슴으로 목덜미로 시선을 빼앗기는 것처럼 행동과 머릿속에 스쳐가는 감정선까지도 놓치지 않았다. 너무나 가늘고 섬세해서 어느 순간 끊어질 것 같은 팽팽함이 이 책의 큰 장점이자 매력이다.
모든 존재의 첫째 법친은 자기 보존, 즉 생존이다.
여러분은 독당근의 씨를 뿌리고
곡식 이삭이 여무는 것을 보려고 한다.
- 마키아벨리(p.253)
캄캄한 하늘이 무서운 폭풍우를 예고하듯이.
- 『돈 후안』 1가 75절(p.309)
『적과 흑』 2권.
그가 자신이 갖고 있던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오면서 그의 모습은 점차 달라진다. 영원 불멸의 소재인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여자를 두고 자신의 출세를 위해 사랑하는 이를 버리고 야망을 위해 비상한다. 쥘리앙 소렐이라는 남자 주인공 역시 짧지만 강한 불꽃 같은 삶을 살고 마감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 된다. 연애 심리 묘사가 압권이듯 나폴레옹 실각 이후의 프랑스의 정치적인 배경 또한 잘 그려내고 있다. 그 시대의 정치적인 배경을 하나하나 꿰뚤지 못해 아쉽지만 발자크와 더불어 양대 거장으로 불리는 스탕달의 작품을 읽어 볼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 큰 의의를 두었다. 글을 그리는 것 만큼이나 예리하게 썼지만 글을 읽기 전 인용문의 글이 너무도 마음에 와닿아 몇 번이나 읽어볼 만큼 좋았다. 내용을 압축한 이야기 같아 의미심장하게 들리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