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낭 담쟁이 문고
이순원 지음 / 실천문학사 / 2010년 1월
평점 :
품절


 몇 달전 독립 영화로 성공한 '워낭소리'가 티비에 방송 되었다. 워낭소리가 많은 사람에게 호평 받은 소식을 보고 전부터 엄마가 보고 싶어 하셨지만 기회가 닿지 않아 보지 못했다. 티비에 방영된다는 소식에 엄마는 시간을 맞춰 가며 티비 앞에 앉아 계셨지만 나는 방송을 챙겨가며 보고 싶지는 않았다. 많은 사람들의 호평과 찬사에 대략 내용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소'에 대한 추억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란 나는 말 그대로 '서울 토박이'지만 고향에 대한 정겨움이나 그리움을 느끼지 못한 곳 또한 내가 살고 있는 서울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소가 가장 귀한 일꾼이자 보물 같은 존재였고, 가족이었다. 동물 중에서도 강아지, 고양이가 가장 친근하다지만 어디 옛날 소보다 더 귀할까. 매년 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제사를 보러 외갓집을 갈 때 비로소 큰 눈을 꿈뻑 거리는 소를 볼 수 있다. 멀리 있는 엄마를 찾거나 소 여물이 다 떨어졌을 때, 신기하게도 소는 운다. 짚을 한 움큼 주거나, 옥수수 풀을 잘라 주면 되새김질을 하며 먹는 소를 보며 머리를 만져 주고 싶어도 혹, 낯선 이의 시선이 불편할까 만지지 못했다.

몇 십년전, 엄마의 추억담을 들어보면 소를 끌고 가며 풀을 먹이고 함께 했던 추억담을 듣듯, 워낭 역시 그릿소의 새끼인 흰별소에서 부터 반제기소까지의 많은 소 들이 대관령 밑인 우추리에 사는 차무집에서의 소들이다. 그릿 소가 흰별소를 낳아 차무집에서 주인이 되어 기르면서 미륵소, 버들소, 화둥불 소, 흥걸소, 외뿔소, 콩죽소, 무명소, 검은눈 소, 우라리 소, 반제기 소 그리고 흩어진 후예들까지의 행전을 풀어나간다. 워낭 소리에서 보여지듯 사람의 생과 죽음으로 이어지듯, 소의 일생을 사람과 함께 태어나고 자라면서 새끼를 낳고, 새끼가 그 주인이 되풀이 되는 이야기는 아릿하고도 슬픈 여정 속에 계속 된다.



 "소야. 니는 니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나? 니는 니 아버지를 아나? 나는 나를 낳아준 아버지는 모르고 나를 키워준 우리 아버지만 안다. 소야. 나는 사람들이 참 싫다. 나를 해파리라고 부르는 사람도 싫고, 나를 바보라고 놀리고 속이는 사람도 싫다. 소야. 나는 사람보다 소가 더 좋다. 니는 대답을 하지 않아도 나는 이렇게 걸으며 니들과 얘기하는 게 더 좋다.  
 
사람들은 나하고 얘기 하지 않는다. 내가 가까이 가면 벌레 같은 게 왔다고 다들 저만치 피해 앉는다. 내가 그걸 왜 모르겠나. 그러면서 내가 가진 거 다 뺏어거려고만 한다. 어떤 사람인지 내가 벌은 돈도 뺏어가고 내 색시도 뺏어갔다. 그래도 나는 나를 두고 간 내 색시가 밉지 않다. 소야. 니는 나하고 이렇게 걸어 니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이번 장날에도 걷고 다음 장날에도 절뚝절뚝 또 걷는다. 그러다 언젠가 힘이 빠지면 그때는 내가 선 자리에 느들하고 같이 걸음을 멈추면 되는 거지. 소야·····." - p.263~264

 그들이 거쳐 간 시간 속에 시대의 설움이 묻어난다. 그들의 업인 듯 주인을 위해 희생하는 흰별소의 마지막은 짠하게 가슴을 울린다. 때로는 그들이 차무집 아들의 장가비용으로 쓰여지고, 잔치상에 오르는 잔치의 재료도 되어진다. 학교를 보내기 위해 소를 팔아 학비가 되어지고 또 새끼가 새끼를 베어 외양간의 주인이 되어진다. 그들의 숙명이자 업인 줄 알지만 그들의 생(生)은 사람과 부대끼면서 소멸되고 결국 '워낭'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시간의 흐름은 점차 사람과 살을 부대끼고 희노애락을 함께 한 '가족'의 의미가 퇴색되고 동물에 지나지 않는 시간까지 흘러와 버렸다. 빠른 시간의 속도로 그들의 행전을 바라볼 수 있었지만 절뚝절뚝 걸어가는 소의 발걸음을 생각하니 눈시울이 붉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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