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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여자
오정희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작년 이맘때쯤 서점에서 그녀의 책을 보았다. 수 많은 책들이 모여있는 공간은 때론,도서실 같이 조용한 공간이 아닌 책들과 사람들이 움직이는 공간에서 한 권의 책을 같은 자리에 서서 보기란 쉽지 않다. 이리저리 눈요기를 하며 쑥.쑥. 거리기를 좋아하는 나는 어느날 그녀의 작품 <돼지꿈>을 만났다. 조금만 읽어야지 했던 마음은 어디로 사라져버리고 책을 잡는 순간 몰입이 되어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음해 <가을여자>를 만났다.
<가을여자>는 가을이 오는 길목에 서서 가을을 감상하는 여자가 아니다. 가을,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 이렇게 사계절이 있듯, 사람의 나이도 봄에서 시작해 겨울처럼 끝이난다. 봄과 여름은 새싹이 나고 파릇한 가지가 올라와 꽃을 피울 때까지 끝없는 양분과 햇볕을 주고 받는다. 삶과 치열한 싸움이 끝나면 어느새 낙엽에 물이 드는 것처럼 사람도 히끗히끗 머리에 낙엽이 진다.
'오늘'은 언제나 과거가 되고 추억이 되고 우리는 모두 조그만 흔적들 빛바랜 몇 장의 사진으로 인연 맺은 사람들의 가슴에 남을 뿐인 것이다. - P.118
시간의 흐름은 10대에는 10km로, 20대에는 20km로 간다는 말이 있듯이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된다는 것은 인간이 태어나 겪어야 할 모든 것들을 이미 한 두 차례 넘어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10대에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이십대에 보이는 것처럼 삼십에서 사십으로 넘어가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회한, 히끗거리는 머리, 얼굴에 보이는 주름살. 퇴화된다는 것을 몸소 느끼게 되는 것, 상실감일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나이에 가을이 든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라는 질문에 대답을 하듯 <가을여자>는 짧은 단편이지만 일상생활을 터치하듯 가볍게(혹은 무겁게) 쓰여져 있다. 가깝게는 엄마와 아빠의 삶이, 문을 열고 나가서는 이웃집 아줌마의 삶을 보듯 중년 여성의 삶을 그려낸다. 한 아이가 태어나 학교를 다니고, 직장을 갖고, 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일구다 보면 어느새 나는 누군가의 엄마로, 아내로 살아가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느끼는 것. 그것이 여자의 일생이다.
책 속에서 나오는 감정을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씁쓸하고 알싸한 맛이 느껴지는 건 스물중반을 넘어선 내 나이가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면 다른 사람들과 별반다르지 않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 처럼 그렇게 살고싶지 않아! 라고 말 하지만 결국 그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어찌 부정할 수 있을까.
"얘들아, 너희들이 부모와 함께 살아온 날보다 이제부터 떠나야 할 때까지의 시간이 더 짧다는 것을 왜 모르니? 함께 다닐 수 있을 때 다니고 함께 사는 날들을 아껴야지. 몇 해 안 되어 부모 곁을 떠나게 된다는 걸, 이런 날들이 다시 오지 않는다는 걸 왜 모르니?" - P.176
책을 읽으면서 가장 공감이 갔던 글귀였다. 언젠가부터 나 또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제 부모님과 함께 살아갈 날이 적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점점 더 멀어지는 것, 내 일부가 되었던 것들을 떨어뜨려야 하는 것처럼 병아리가 알을 깨고 안락한 품을 벗어나는 때가 점점 더 다가올수록 나는 시간의 흐름이 서럽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