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사나이의 크리스마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우일 그림,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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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구멍 사이로

 ​올해만큼 크리스마스를 고대하며 기다려 본적이 없다. 아마도 기억나지 않는 꼬꼬마 시절에는 손꼽아 기다렸을까. 12월 중순의 빨간 날의 의미는 그저 여느 빨간 날과 같은 의미였다. 해마다 그러하기에 더 설레지도, 더 바쁘지도 않은 하루지만 올해 만큼은 이 날이 어느 한 기점이 되다 보니 이 날이 빨리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스르르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물처럼 흘러버렸지만 크리스마스의 하루는 누군가 맛있게 먹든 그 사이의 링을 통과하든 누구나 다 지나가 버린다.

오랜만에 읽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양 사나이의 크리스마스>는 하루키 특유의 위트와 이우일 일러스트레이터의 그림으로 컬래버레이션되어 만들어 졌다. 김영하 작가의 책 이후 비채에서 <하와이하다>와 함께 <양 사나이의 크리스마스>로 또다시 이우일 작가의 맛깔스러운 그림을 볼 수 있어서 반가웠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은 종종 다른 작가들과 컬래버레이션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들의 색채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 그의 글은 어딘가 모르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터덜터널 힘을 주지 않는 발걸음으로 발걸음을 내 딛게 만든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가 어디를 통과하는지, 어느 길을 가고 있는지 길을 잃게 만든다. 

 "그것 보라고, 자네가 부주의하니까 이런 꼴을 당하는 걸세. 시원찮은 사람이구만. 하지만 도덧도 얻어먹었으니 이건 내가 가르쳐주지." 양 박사가 말했다. "잘 듣게, 12월 24일은 크리스마스 이브인 동시에 성 양 축제일이거든. 요컨대 성 양 어르신이 한밤중에 길을 가다가 구덩이에 떨어져 돌아가신 거룩한 날이란 말이지. 그러니까 그날은 구멍 뚫린 음식을 먹으면 안 된다는 게 옛날 옛적부터 '쭈욱' 내려오는 금기 사항이라고. 마카로니라든가, 지쿠와 라든가, 도넛이라든가, 오징어 튀김이라든가, 양파링, 뭐 그런거." - p.22~23

크리스마스에 한 번쯤 먹었을 뻔한 음식들의 세계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세계를 더 확장시켜 나간다. 한움큼 베어 무는 도넛 속에서 양 사나이의 고노와 그의 세계와 세계 사이를 넘어가는 통로를 도넛으로 비유 하다니. 이제 도넛을 보면 하루키가 그린 양사나이가 떠오를 것만 같다. 마치 어제와 오늘 사이에는 달라진 것이 없는데 마치 도넛의 링을 통과하듯 다른 세계로의 진입은 또 다른 세계의 통로이자 그를 막다른 골목으로 데려가는 원더랜드는 아닌지도 모르겠다. 때때로 그 세계가 다르게 보일지라도 일 년의 하루 쯤은 그 세계에 발을 디뎌보는 것도 좋은 여행은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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