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일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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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지지 않을 흔적


 오랜만에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을 읽었다. 어떤 책을 읽어도 그의 작품은 평타 이상은 하고 있어서 믿고 보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책을 읽고 나니 '역시'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재미와 감동이 있다. 그의 많은 작품 중 <방황하는 칼날>의 충격과 재미를 잊을 수 없는데 <편지> 또한 궤를 함께 있다. 그 어떤 주제를 쓰더라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은 재밌지만 그가 쓰는 많은 주제 중 '딜레마'에 관한 주제는 단연 최고라고 할 수 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나는 어떡해 해야 하는 가에 물음과 답을 작가는 던져주고 있지만 그마저도 개운치 않게 느껴진다. 마치 줄 위에서 한 발을 내딛으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위태로움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츠요시는 엄마 아버지를 여의고 동생 나오키와 함께 살고 있다. 부모의 빈 자리를 대신해 그는 생업에 종사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다. 그러다 이사짐 센터의 직원으로 들어가 물건을 나르며 돈을 벌지만 두 사람이 생활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다 마주친 노부인의 집. 츠요시가 이사짐을 거들었고, 노부인은 그에게 팁으로 제법 많은 돈을 쥐어 주었다. 선의를 베풀었으나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아 동생이 대학진학을 못 할까봐 전전긍긍한 츠요시는 노부인의 집으로 들어가 돈을 훔치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집에 들어가 범행을 저지른 그는 생각지 못하게 방에서 나온 노부인과 마주치고 어쩔줄 몰라하며 살인을 저지른다.


살인을 저지른 그는 교도에 복역하고 동생은 나오키는 '살인을 저지른 형'을 가진 그에게 뾰족한 시선을 건넨다. 그때부터 그는 가는 곳마다 츠요시가 범죄가 발목을 잡았다. 고등학생인 그를 받아 줄 곳도, 함께 일을 하며 농담을 건넬 동료도 없었다. 착실하게 일을 하며 지냈지만 형의 이야기만 들으면 그를 고용한 사장들은 모두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그렇게 나오키는 학교에서도, 아르바이트, 사랑하는 연인, 직장에서 모두 츠요키의 일이 발목을 잡았다. 가족이라는 이유 만으로 그를 냉대했고, 그는 꿈도 사랑도 모두 잃어버릴 위기에 처했다.


츠요시는 감옥에 있으면서 밖에서 힘든 동생을 위해 매번 편지를 써서 보낸다. 범행을 저지를 당시에도 동생이 좋아하는 톈진 군밤을 가져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다가 노부인과 마주쳐 사단이 일어났다. 매번 벚꽃 도장이 찍힌 편지가 나오키에게 배달되지만 힘이 들 때마다 나오키는 형에 대한 원망의 마음이 생겨난다.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늪이 존재하고 있고, 그는 자신이 속한 세상에서 안전하게 살아갈 수 없었다. 평범하게 살려고 노력하지만 매번 살인자의 형을 둔 나오키에게는 많은 이들이 무시하거나, 의식을 하며 지냈기 때문이다.


세상의 일원이 될 수 없었던 나오키는 어쩔 수 없는 결심을 하게 된다. 멍울이 가득한 결심의 끝. 교도소 안에서 끊임없이 보내는 용서의 끈인 편지와 밖에서 생활하는 살인자의 가족이라는 주홍글씨의 멍에는 계속해서 두 사람을 자유롭게 날지 못하도록 막아 놓았다. 비로소 그가 을이 아닌 상태의 상황을 마주한 나오키는 상대방의 상황을 마주 한다. 그때서야 느끼는 깨달음.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아팠고, 누구에게 손을 들어줄 수 없는 찡함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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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하며 교도관이 다가가 츠요시를 일으켜 세웠다. 그때 나오키가 형, 하고 불렀다.

"그런 걸 뭣 하러 기억하고 있었어?"

"그런거?"

"군밤 말이야. 톈진 군밤을 뭣 하러 기억하고 있었던 거야?"

"그거 말이니?"

형이 일어선 채로 쓴웃음을 지었다. 뒤통수를 긁었다.

"뭣 하러 기억하고 있었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곤란하지. 그냥 기억하고 있었어. 그때 그걸 보니 그냥 생각이 나더라. 아아, 나오키가 톈진 군밤을 좋아하지, 하는 생각이."

나오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형. 잘못 알았어."

"뭐?"

"톈진 군밤을 좋아한 건 어머니야. 백화점 갔다 올 때 산 군밤 껍질을 우리 둘이 어머니 먹기 좋게 벗겨드렸잖아. 어머니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얘들아 그렇게 계속 껍질을 벗겨주면 내가 다 먹을 수가 없잖니, 어머니의 즐거워하던 목소리.

"그래?"

형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내가 잘못 알았나? 난 역시 바보로구나."

"그런 건······."

나오키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잊는 게 나았을 텐데." - p.94~95


"그렇지만 그 사람들을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그 사람들이 잘못한 게 아니라는 건 알지만, 미키와 당신이 받은 상처를 지워줄 순 없어. 그 두 사람이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난 너무 괴로웠어. 숨이 막힐 것 같았어. 난 그때 깨달았어. 사장님이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확실하게 이해했어."

"무슨 얘기야?"

"정정당당하면 그만이라는 건 잘못된 생각이란 거지. 그런 자기만족일 뿐이야. 사실은 더 힘든 길을 선택해야 했던 거야." - p.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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