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 아워스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마이클 커닝햄 지음, 정명진 옮김 / 비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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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사유 속으로.


 여자의 일생에 관한 이야기들은 대체적으로 같은 패턴을 갖는다. 유년의 삶은 잠깐 지나가고 성장 후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영위하며 한 남자의 아내로, 아이들의 엄마로 살아간다. 당연한 시간의 굴레이자 자연의 이치와도 같은 삶의 이야기가 너무도 비슷했다. 어쩌면 동전의 양면처럼 이것이 여자의 삶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을 거 같다.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에서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고 말했다. 고저의 차이만 있을 뿐 나의 이름으로 사는 삶 보다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로 살았던 삶의 시간들이 더 길고 긴 시간들의 이야기를 마이클 커닝햄은 깊은 사유 속으로 세 여인의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음울했다. 330페이지가 조금 넘는 이 책을 눈길을 걷듯 자박자박 걸어내지 못했다. 폭설에 쌓인 눈을 헤치며 걷는 것 만큼이나 페이지 하나하나를 넘기는 것이 힘들었다. 루이제 린저의 <삶의 한가운데>(1999, 민음사)를 읽는 것처럼 인물들의 깊은 절망과 한숨같이 터져 나오는 그들의 고뇌가 나에게는 보이지 않는 그림자처럼 느껴졌다. 만질 수는 있으나 그 길을 가지 않아 실체의 깊이를 가늠 할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한 남자의 아내와 그 남자와 만들어낸 아이들로 채워진 집이 동경어린 시선으로 바라 볼 수 있으나 누군가에게는 거미줄에 포위되어 꼼짝달싹도 할 수 없는 절박한 시간을 메워나가는 공간이었다.


<디 아워스>는 영화 '디 아워스'의 원작소설이자 <세월>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으나 원제의 제목을 살려 개정판으로 다시 나왔다. 소설은 1923년의 버지니아 울프와 1949년 로라 브라운과 현재의 시점의 클러리러 본 자신을 댈러웨어 부인이라고 칭하며 삶을 살아가는 여자들이 등장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댈러웨이 부인>을 쓰고 로라 브라운은 자신의 시간 속에서 그녀가 쓴 책을 읽고 클러리서는 친구인 리처드의  파티를 열어준다. 그들이 처한 상황 속에서 생각과 달리 '여자라는 이유' 만으로 해야 할 것들을 섬세하게 챙겨 나가지만 마음은 언제나 다변적이다. 왜 내가 그들을 챙겨주어야 하며, 왜 나의 시간을 그들이 방해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움과 한숨, 공포, 목마름, 분노가 느껴진다.


앞에서는 웃고 있지만 뒤에서는 모든 관계를 끊어버리고 자신만을 위해 살고 있는 그녀의 마음들. 사회의 관계가 결혼이 주는 제도의 억압이 그들을 옥죄어 온다. 텅빈 시간들 속에서 자꾸만 메워오는 그들의 움직임과 상대로 하여금 모든 것을 주관해야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점점 게이지가 높아진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분노와 메마름이 느껴진다. 그래서 마이클 커닝햄의 이야기는 음울한 동시에 이질적이고, 부정적인 시그널이 맴도는 책이다. 겉으로는 균열을 알 수 없지만 그들의 깊은 내면은 이미 논바닥처럼 쫙쫙 갈라져 버렸다. 눈치가 빠른 누군가는 눈치를 챘을 그 순간에도 남편과 아이들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중심에 선 그녀의 깊은 심연을 빠르게 캐치해 내지 못한다.


<디 아워스>는 <댈러웨이 부인>의 또다른 목소리이며 세 여인이 있었던 하루를 그리고 있다. 아들 리치와 함께 케이크를 굽고 있지만 그녀의 마음 속에는 케이크 장식이 여간 신경쓰이는 것이 아니다. 그러던 중 이웃집 여자인 키티가 방문을 하고, 함께 다정하게 있는 것을 보는 리치가 불편하게 느낀다. 이성이 아닌 동성에 관해 더 호감을 느끼지만 그들의 이야기가 선명하게 튀어 오르지는 않는다. 그들의 심연 속으로 들어가면서 보이지 않는 그들의 복잡다단함에 혼란을 느끼기도 했지만 언젠가 너무나 처한 상황에 대한 힘겨움을 토하고 있던 지인의 얼굴이 그려졌던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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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책을 읽는다는 건 첫사랑과 같다. 나는 이 말에 공감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열다섯 살 때 읽은 《댈러웨이 부인》은 내게 첫사랑 보다 더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동안 읽었던 어떤 책보다 더 농밀하고 내밀해서 쉽게 잊히지 않았다. 당신이 소설을 쓰고 싶다면 첫사랑의 느낌에 대해 써보기를 권한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그리고 그 다음에 나는 처음으로 사랑한 책에 대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 마음 졸였던 첫사랑 같은 책에 대해 썼다. 마이클 커닝햄 - p.13



"솔직히 말해 딱 한 가지를 빼고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 정말로 나는 당신에 대해서, 우리 둘에 대해서 쓰고 싶었어. 내 말 알겠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과 우리가 가졌을지도 모르는 삶에 대한 모든 것을 쓰고 싶었어. 우리가 죽을 때 선택할지도 모르는 모든 방식에 대해 쓰고 싶었다고." - p.107


"그래도 그 시간들 the hours은 남아 있어, 그렇지 않아? 하나의 시간, 그러고 나면 또 그런 시간. 그 시간들을 당신이 다 견뎌낸다고 해도 또 그런 시간이 있어. 세상에, 또 그런 시간이라니. 지긋지긋해." - p.293


그렇다, 이제 하루를 마무리할 시간이다, 하고 클러리서는 생가한다. 우리는 파티를 열고, 외국에서 홀로 조용히 살기 위해 가족을 내팽개친다. 그리고 우리의 재능과 무조건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ㅡ 우리의 터무니없는 희망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바꾸지 못할 책을 쓰려고 안간힘을 쓴다. 우리는 삶을 살아내고, 할 일을 하고, 그러고는 잠자리에 든다. 그토록 단순하고 일상적이다. 몇몇 사람은 창밖으로 뛰어내리거나 물에 뛰어 들거나 알약을 삼킨다.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사고로 죽는다. 우리 중 대부분은, 절대 다수는 어떤 병에 서서히 잡아먹히고, 아주 운이 좋더라도 시간 자체에 잡아먹힌다. 위로할 거라곤 우리 삶이, 그 모든 역경과 기대를 넘어선 우리 삶이 활작 피어나 상상했던 모든 것을 한꺼번에 안겨주는 시간이 있다는 것이다. 비록 아이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어쩌면 아이들까지도)그런 시간 뒤에는 필연적으로 그보다 더 암울하고 힘든 시간이 따라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우리가 도시를, 아침을 마음속에 간직하면서 그 무엇보다 바라는 것은, 더 많은 시간들이다. - p.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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