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하고 진득한 시간들 속에서
베개에 머리가 닿았다 하면 미처 10을 세지 못하고 잠이 들어 '불면'이라는 단어 자체를 모르고 살았을 때가 있었다. 남의 일인줄 알았던 불면의 시간들이 나에게도 찾아왔을 때 고요하고 깊은 밤 나는 생각 대신 상념을 잊어줄 책들을 찾아 읽곤 했다. 깊은 밤 스탠드 불 하나만을 켜고 방에 누워 홀로 책을 읽노라면 그 시간만큼은 불안하고, 길고 긴 이야기의 늪으로 빠지는 것을 건져주는 것 같았다. 언젠가부터는 책 대신 손에 핸드폰을 들고 웹소설을 보는 재미에 빠져 지내지만,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이야기에 빠져 드는 시간이 더 좋았다.
제목 때문에 책에 눈길이 갔고, 이 근사한 책 속에 어떤 문장들이 숨어 있을까 궁금했다. 동시에 만듦새도 예뻐 책의 대한 기대가 한껏 높았던 책이었다. 시처럼 짧은 문장들이 나, 타인, 사랑, 세상이라는 주제로 나뉘어 이야기를 건넨다. 밤이란 때때로 나의 성향과는 다르게 센치해지는 시간이어서 더 감성이 돋기도 하고, 감정이 오르락 내리락 하며 물결을 그리기도 한다. 느낌표가 많은 글에 대해서는 좋아하지 않지만 한귀은 작가의 <밤을 걷는 문장들>은 뒤척이는 밤, 머릿속에 솟아나는 상념들을 묶어 놓은 일기같다. 한 손에 들어갈 작은 책이기도 한 <밤을 걷는 문장들>은 머릿속에 들이 찼다가 다시 쓸려 버리는 시간 속에서 문장들을 건져내듯 삶의 쓴맛과 단맛이 느껴진다.
이 문장은 삶의 모토가 되었으면 하고 기억 해놔야지 했다가 허공으로 사라지기도 하고, 가벼운 느낌으로 느꼈던 문장이 묵직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요즘은 몸이 피곤한 나날들이어서 그런지 불면의 시간을 넘어 예전으로 돌아간듯 잘 자기 때문인지 그녀의 문장이 선뜻 다가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지독한 문장들이 언젠가 불면의 시간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다시 읽어보고 싶은 문장이기도 했다. 불면의 시간은 때때로 좋기도 하고 너무나 지독한 것이기도 해서 때로는 밤과 아침의 기나긴 시간을 버티기가 힘겨울 때도 있었다. 새벽의 시간이 가까스로 조금 나마 있을 때야 비로소 다른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었다.
관계는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가
처음 만난 이와의 대화로 '나'를 알게 될 때가 있다.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어떤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는지,
어떤 대화법을 선호하는지,
그래서 어떤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하는지,
그 사람 때문에 알게 된다.
상대에게 맞춰주려고 하지 말고
대화를 주도하려고도 하지 말고
그 상황을 독해하면서,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내가 할 수 있는 말을 건네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사람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지
환히 보이는 순간에 다다르는 것이다. -p.55
공감이 갔던 글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어렵고, 처음 만난 이와의 대화는 늘 어색하다. 어색하기 위해 먼저 말을 건네지만 이 마저도 잠깐의 바람일 뿐, 깊은 대화를 나누기 어렵다. 대화를 하면 할 수록 내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나의 가치관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어서 그 사람과의 시간이 나쁘지 않았다. 나의 인생에서, 당신의 인생에서 결코 더해지지 않는 관계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런 색깔이 명확히 드러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다.
누군가를 지켜주기 위해서는
고정되어 있어서는 안 된다.
한 자리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상황이 바뀌기 때문이다.
내게 의지했던 그 사람조차도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을 알고
유연해져야 한다.
사랑도, 사람도,
변해야 지킬 수 있다. - p.77
변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어린 날의 나는, 지금도 한편으로는 민들레 같은 사람을 좋아한다. 그럼에도 변화에 민감하고, 유연한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다. 하나에 얽매이기 보다는 시아를 더 넓게, 높게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는 시점들이 있다. 그런 시간들 사이에서 나는 어떤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깊이 생각하게 해주는 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