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귤
김혜나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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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늪.


 멀리서 바라보는 불빛은 동경의 대상이다. 집집마다 환하게 켜져 있고, 멀리서 바라보는 눈빛에는 그 안에 살고 있는 모두가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한 집, 한 집 자세히 현미경을 들여다 보면 많은 불빛을 비추고 있는 집 가운데 정말 행복한 집은 얼마나 될까? 찬바람이 불어도 훈풍이 불어와도 늘 변하지 않는 아파트 불빛을 오랫동안 바라보면서 그들의 삶을 떠올렸지만 아마도 내가 살고 있는 색깔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멀리서 보면 풍경같은 집들을 현미경을 바라보듯 깊숙히 들여다보면 그들의 삶이 행복만을 추구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행복과 거리가 먼 개인의 삶이 폭력으로 얼룩져있다.


일상의 평온함을 누리지 못하고, 개인이 누릴 수 있는 온전한 상태의 고요와 정적을 느낄새도 없이 나와 관계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끊임없이 침입해 온다. 온전하게 함께 할 수 없었던 가족간의 이야기들이 시간이 지나 만나게 되면 이웃 보다 더 멀어진 상태에서 그들과 조우하게 된다. 낯선 공간 속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기분. 그럼에도 한쪽의 연결고리로 인해 서먹서먹함을 이기고 친해지려 하지만 나와 가장 가까운 이는 나를 보호하지 않고 화가 난다는 이유만으로 손과 발이 올라간다. 난데없는 폭력은 고통 뿐 아니라 마음이 부서진다. 연약한 여자를 때리고, 가족간의 이질적인 감정을 고조시킨다.


총 다섯편의 소설은 단편과 중편소설로 엮어져 있다. 연작인 느낌도 나지만 소설 속 주인공 모두 폭력의 늪에 묶여져 있는 이들이 주인공이다. 단편 '로레나'는 삼촌이 데려온 외국인 부인인 로레나의 이야기 그렸고, '이야기의 이야기는' 태어날 때부터 겪지 않아야 할 순간 부모의 안일한 선택으로 인해 병이 걸리게 되고, 그것이 훗날 자신의 트라우마로 작용한다. '오샤와'와 '차문디 언덕을 오르며'와 '그랑주떼'의 이야기 모두 각각의 상처와 폭력의 늪으로 빠져든 이들이 기꺼이 상처를 이겨내고자 하는 이야기다. 때로는 상처의 늪을 벗어나고자 노력해도 결국 그 자리에 머무는 이가 있는가 하면, 기꺼이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이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청량감있는 이야기를 기대했던 나는 이 이야기가 깊은 늪 속으로 빠져드는 통로 같았다. 일상에서 버젓이 일어나는 일처럼 아무렇지도 않는 시간 속에서 그들은 욕설과 폭행과 자신이 선택하지 않아도 원죄처럼 짊어질 수 밖에 없는 생채기를 지니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상흔의 흔적을 지니고 자생해서 살아가는 식물처럼 그렇게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공허한 울림이 계속해서 퍼지다 보니 작은 위안 보다는 매일 오르내리는 헤드라인 기사 속에서 시간이 지나 누구의 기억 속에서 기억되지 않는 이들의 이야기 같았다. 무엇이 그들을 잔혹하게 만들었으며, 왜 그와 관련된 이들은 한없이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시간이 지나고, 또 지나도 어김없이 흘러 나오는 돌림노래 같다. 그래서 더 지치고 지치는 이야기들. 그녀의 글은 때때로 반짝이기도 했지만 삶의 위안을 얻기에는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이 여기저기서 울리다보니 이런 이야기들이 더이상 나에게는 그 어떤 희망의 시그널 조차 느껴지지 않았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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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당신을 너무 지루하게 만들고 있지 않나요? 이렇게 먼 과거의 시간부터 시작해 그 흐름에 다른 연대기적 순서로 이야기하는 것은 듣는 사람을 아주 지루하게 만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잇어요. 예를 들어 1로 시작해 10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있다고 치면, 그것을 1-2-3-4-5-6-7-8-9-10의 순서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6이나 7의 순서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먼저 꺼내어놓는 것이 좋다고요. 조금 난데없다 싶을 정도로 독특한 이야기를 먼저 툭 던져놓은 뒤 왜 이러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인지 하나하나 추적해보는 방식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요. 그러니까 이게, 이야기하는 나에게 좋다기보다는 이야기를 듣는 당신에게 더 좋다는 거예요. 이때 초보 이야기꾼들은 6과 7에 등장할 이야기를 제일 먼저 꺼내어놓은 다음 바로 이어서 1-2-3-4-5를 이야기하고 8-9-10으로 마무리 짓는대요. 좀 더 능숙한 이야기꾼이라면 5-6을 먼저 이야기한 다음에 3-4를 꺼내어놓기도 하고요. 그 다음 7-8을 이야기하다가 다시 1-2를 이야기하고 9-10으로 마무리 지으면 최고라고 들었어요. - p.41~42


"사람들은 여름에도 귤이 난다면서 신기해하고 그것을 먹어보려고 하지. 그런데 이걸 막상 나무에서 따서 손으로 가져와 보면 예쁘지도 않고 맛있지도 않다. 이건 그냥 쓰고, 시고, 딱닥하기만 해. 진짜로 먹을 수는 없어."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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