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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번리의 앤 ㅣ 인디고 아름다운 고전 리커버북 시리즈 7
루시 M. 몽고메리 지음, 정지현 옮김, 김지혁 그림 / 인디고(글담) / 2018년 9월
평점 :
소녀에서 아가씨로.
언제 어느 순간에 읽어도 친구처럼 다가오는 이야기가 있다.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쓴 앤의 이야기는 언제 읽어도 늘, 앤이 쉴 새 없이 떠드는 소녀의 이미지로 다가오는 친구다. 오래된 고전 명작은 이미 이야기의 끝을 알고 있어도 재밌다고 말하듯 이미 앤의 모든 이야기를 알고 있어도 다시 새롭게 읽을 수 있는 책 중의 하나 인 것 같다. 누군가의 글에서 태어날 딸아이가 앤을 닮았으면 좋겠다며, 빨간머리 앤을 친구처럼 생각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나에게도 앤은 진 웹스터의 <키다리 아저씨>의 주디와 함께 사랑하는 캐릭터다. 언제 읽어도 늘 밝은 기운을 주는 이들의 이야기. 생명력이 강한 것은 물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자신의 캐릭터를 구축해 나가는 아이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빨간머리 앤 하면 당장 기차역 안에서 매슈 아저씨를 만나 아저씨의 마차를 타고 조잘조잘 떠드는 소녀가 떠오른다. 마치 귓가에 계속 라디오를 틀어 놓듯이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고, 나무에, 강가에, 모든 사물에 이름을 지어주는 소녀. 때때로 말썽을 부려 마릴라 아주머니의 속을 끓이던 여자애. <빨간머리 앤>의 이야기는 이런 말괄량이 소녀의 이야기를 담았다면, 이번에 읽은 <에이번리의 앤>은 그 소녀가 성장해 아가씨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시끌벅적하고 활기찬 라디오는 어느새 장르를 변경해 클래식한 라디오가 되어 이야기를 끌어간다. 성장하고 성숙해진 앤은 조용한 마을에서 마릴라와 함께 살고 있으며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었다. 한 번도 매를 들지 않고, 아이들에게 사랑을 주는 선생님으로 본분을 다하겠다는 앤.
매슈 아저씨와 마릴라 아주머니의 사랑을 받은 앤은 이전보다 차분한 아가씨로 성장했으나 성정은 변하지 않았는지 해리슨씨의 밭에 가서 말썽을 피우는 소 때문에 여러번 속을 태운다. 귀리 밭에 침입해 밭을 망쳐놓아 해리슨씨가 씩씩거리며 앤을 찾아 앤에게 '빨간머리 애송이'라며 분풀이를 하고, 앤 또한 그에게 맞서 싸운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약조를 받은 해리슨 씨는 돌아가고 이후 앤은 해리슨씨의 밭에 들어간 소를 보고 기겁한다. 소를 잡아 지나가는 상인에게 팔아버리고 돌아온 앤은 집에 자신의 소가 있음을 알게 된다. 자신이 팔던 소는 해리슨 씨의 소였다! 앤은 앞도 뒤도 보지 않고 소를 팔아버린 것을 자책하고, 케이크를 포장해 해리슨씨의 집을 찾게 된다. 해리슨씨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고민고민하면서. 다행히 이웃주민인 아저씨는 진솔하게 사건의 경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앤을 보고 마음을 풀었고 소를 판 돈대신 앤의 손를 받아주기도 했다. 그 이후 해리슨씨와 앤은 친구가 되어 앤의 하소연을 잘 들어주는 이웃 중 한 명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하나의 에피소드이지만 이 이야기를 읽고 한참을 웃었다. 앤이 변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라며 가슴을 쓸어 내리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 사람이 성장한다는 것은 어린시절과의 좋은 추억을 내려놓는다는 뜻도 된다. 자신이 가졌던 환경이나 친구, 풍경, 사람들과 오롯하게 안녕을 고하고 새로운 세상을 밟아가는 여정이 담겨져 있었다. <에이번리의 앤>의 이야기 속에서는 다정했던 모든 것과의 안녕을 고하는 앤의 이야기를 담았는데 그것이 새삼 아릿하게 느껴진다. 이제 다시는 그 어린 소녀를 못 보는 것 같은 기분. 어제 한 예능 프로를 보다가 앤의 이야기와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는 변하지 않은 것 같은데 시간은 어느새 쏜쌀같이 지나버렸고, 내가 알고 있던 아이는 성장해 모르는 사람으로 변모해 있고, 그것이 참 어색하고 아쉬움이 많이 남아 허전함으로 다가오는 것. 그것을 느끼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어른이라고. 누군가가 해 준 그 이야기가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맴돌았다.
앤의 활기와 말썽을 대신할 자리를 데이비가 맡아 성실히 수행하고 있고, 빨간머리라고 놀리며 앤을 화나게 했던 길버트는 다이애나와 함께 앤의 가장 친한 친구로서 자리를 함께하고 있다. 대학에 진학 하느냐, 마느냐의 사이에서 고민하는 앤은 눈이 나빠진 마를린 아주머니를 위해 만류하지만 앤을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다른 이들과 함께 살기로 한다. 길버트와 함께 다음 행보를 위해 떠나는 앤. 책의 말미에 길버트는 앤의 모습을 보고 새삼스럽게 앤의 모습을 보고 반하게 되면서 다음 이야기에 대한 기대감을 더 짙게 만든다. 지나온 시간을 넘기고, 누군가는 결혼을 하고 누군가는 평생을 함께 할 사람을 만나 사랑을 하는 시간들. 그 시간 속에서의 앤은 행복과 상실의 감정을 겪는다. 이제는 더 이상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없는 아쉬움을 느끼며 삶의 한페이지를 넘겨야 할 시점을 알게되는 과정을 앤은 몸과 마음으로 겪어내는 이야기이다 보니 절로 감정이입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더 아릿하고 슬픈 이야기로 느껴지기도 했다. 어떤 사건이나 이야기가 아닌 감정이 절로 느껴지는 시간의 이야기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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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은 그림자 같아서 우리에 가둬 놓을 수 없지. 춤추듯 움직여서 다루기가 힘드니까. 하지만 계속 노력한다면 비결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 p.91
앤이 눈을 깜빡거리며 눈물을 떨어뜨렸다.
"아, 너무 아름다워서 그래. 동화 같고 너무도 낭만적이고 슬픈 이야기라서. 완벽하게 아름다운 이야기지만 약간 슬프기도 해." 네번째 샬로타도 인정했다. "물론 누구한테나 결혼은 위험한 일이에요. 하지만요, 아가씨, 살다 보면 남편보다 나쁜 것들도 많아요." - p. 4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