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의 나라.
유럽에 가면 가장 부러운 것이 높은 첨탑을 가진 건축물들이다. 종교를 믿지 않지만 오랜시간 세월이 지나도 굳건하게 세워져 있다. 수백년 혹은 수천년 전에 만들어 졌음에도 오래된 세월의 때만 묻었을 뿐, 증축되지도 허물어버리지 않는 그들의 역사가 담긴 건축물을 볼 때마다 경외스런 마음과 감탄이 절로 나왔다. 신을 믿지 않아도 답답하거나 마음이 흔들릴 때면 이곳에 들어와 조용히 마음 한자락 얻어 놓아도 좋겠다 싶을 정도로 좋았던 기억이 난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리가 생활했던 공간들을 지우개로 지우는 것마냥 흔적도 없이 부셔 버리고, 그곳에 높은 아파트와 아스팔트 길만이 존재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우리나라만의 색채를 갖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고만고만한 네모칸의 집들이 다르게 느껴지지 않아 늘,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산사순례>편을 읽으니 이것이야 말로 진짜 우리나라의 색채가 완연하게 묻어있다.
요즘은 세계의 많은 곳들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로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기에 진짜 보물같은 곳은 오히려 유네스코에 등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많은 곳들이 사람들의 발길로 몸살을 앓고 있다는 이야기를 뉴스로 전해 들은 적이 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의 산사를 인도, 일본과 다른 차별성을 가진 우리만의 문화인 산사인 법주사, 마곡사, 통도사, 대흥사, 부석사, 선암사, 봉정사등이 한국의 승지승원이라는 이름으로 회원국 21개국 중 20개국의 찬성으로 올해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여행을 갈 때마다 일부러 오래된 절을 찾아 가보기도 하고, 가다보니 마주하는 절이 있다면 들러보기도 하는 곳이 산사다. 갈때마다 오래된 산사를 둘러보면 많은 여행객들의 발걸음에 치이기도 하지만, 호젓한 느낌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작은 돈이지만 불전함에 돈을 넣고, 조용히 합장하며 부처님께 예를 올린다. 스님이 목탁을 두들기는 소리도 좋고, 불당에 피워놓은 향 내음도 머리를 맑게 한다.
오래된 산사는 깊은 산중에 있어서 차를 타고 가는 제한이 있어 제법 많은 길을 걸어야 하는데 자의반 타의반으로 걷는 길이 때때로 많은 생각이 들게 한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영주 부석사를 시작으로 안동 봉정사,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와 미황사, 고창 선운사, 부안 내소사와 개암사, 예산 수덕사와 서산 개심사, 부여 무량사와 보령 성주사터, 문경 봉암사, 청도 운문사, 창녕 관룡사, 구례 연곡사, 영암 도갑사와 강진 무위사, 백련사, 정선 정암사, 묘향산 보현사, 금강산의 표훈사까지를 담고 있다. 이렇게 많은 절이 있나 싶게 책에서는 각 산사의 매력과 위치, 건물의 구조와 배치, 자리앉음새등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름을 들어본 절도 많지만 상대적으로 이름조자 들어보지 못한 절이 많았다.
험한 산새에 들어가 오랜시간 자리를 잡은 절터는 이야기가 많이 숨어 있는데 유홍준 교수가 겪은 일화들이 산사의 자세한 설명과 들으니 더 애틋해진다. 시간이 지나 절을 들어가기 위한 길의 변형이 아쉬운 것은 비단 나뿐만 아니라 유홍준 교수의 마음도 같았는지 그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들어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전했으면 하는 아쉬움과 그럼에도 각기 다른 매력을 보여주는 절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게 느껴졌다. 특히 영주 부석사를 말하면서 5대 명찰을 논하는 <논제명찰(論諸名刹)>을 읊는 글이 인상적이었다. 한 편의 시 같으면서도 문장 속에서 보여지는 이미지들이 사진을 보지 않아도 한 눈에 느껴질 정도였다.
유홍준 교수의 글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의미를 알고 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된다. 우리나라의 색채가 오롯하게 묻어나오는 산사순례는 그 어떤 여행 주제 보다 더 탐이 난다. 모든 이야기를 흡수하지 않아도, 천천히 그에 대한 건축물에 대한 의미와 역사, 절과 함께 어우러져 있는 산새의 풍경이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 올 가을에는 책에 나오는 산사 중 한 곳을 꼭 가보고 싶다.
춘삼월 양지바른 댓돌 위에서 서당개가 턱을 앞발로 묻고 한가로이 낮잠 자는 듯한 절은 서산 개심사(開心寺)이다. 한여름 온 식수가 김매러 간 사이 대청에서 낮잠 자던 어린애가 잠이 깨어 엄마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는 듯한 절은 강진 무위사(無爲寺)이다.늦가을 해 질 녘 할머니가 툇마루에 앉아 반가운 손님이 올 리도 없건만 산마루 넘어오는 장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듯한 절은 부안 내소사(來蘇寺)이다. 한겨울 폭설이 내린 산골 한 아낙네가 솔밭에서 바람이 부는 대로 굴러가는 솔방울을 줍고 있는 듯한 절은 청도 운문사(雲門寺)이다.몇 날 며칠을 두고 비만 내리는 지루한 장마 끝에 홀연히 먹구름이 가시면서 밝은 햇살이 쨍쨍 내리쬐는 듯한 절은 영주 부석사(浮石寺)이다. - p.23~24
좋은 길은 좁을수록 좋고, 나쁜 길은 넓을수록 좋다. - p.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