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호실로 가다 - 도리스 레싱 단편선
도리스 레싱 지음, 김승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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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일상의 민낯을 생생하게 그려내다


 도리스 레싱의 책은 단편, 장편 할 것 없이 이야기가 잘 짜여져 있다. 그녀가 만들어낸 거미줄 같은 쫀쫀함에 빠져들 준비가 되었다면 언제든지 그녀가 쓴 작품 속 페이지를 열면 된다. 그러나 그녀의 이야기 속에는 정리 정돈된 것 같은 차분한 이야기 속에서도 언제나 뭣도 모르고 오르다가 거미줄에 갖혀 바들바들 떨고 있는 생물이 존재하는 것처럼, 도리스 레싱의 작품 속 인물들은 스스로 선택으로 비상구 없는 미로 속에 갖혀 버린다. 한 남자를 만나기 전까지 그녀들은 무료한 일상이 조금 심심할 뿐 그녀의 인생에서 하나도 거리낌없는 생활을 영위해 나갔다. 스스로의 능력을 펼치고, 사고 싶은 것을 사고, 자신을 꾸미는 것에 그 어떤 터치없이 자유롭게 생활했던 그녀들이 한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면서부터 달라졌다.


사랑에 대한 환상은 잠깐이었고, 현실은 생각 이상보다 잔인했다. 저마다의 환경과 색깔이 달랐을 뿐 여자들의 삶의 일상은 다른 색을 띄면서도 같았고, 그들이 가진 이름들이 희미하게 지워진다. 희미하게 지워져 버린 이름표가 못내 아쉬워도 누군가의 아내, 내 아이들의 엄마로 살아가는 날들이 행복했기에 스스로가 지워버린 행태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것 조차도 손에 쥘 수 없다는 것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을 읽었을 때도 여자들의 삶들에 대해 깊이 느꼈지만 도리스 레싱의 <풀잎은 노래한다>(2008,민음사)에 이어 <그랜드 마더스>(2016,예담) <19호실로 가다>까지 그녀가 그려낸 여성의 모습은 한 없이 고독하고 우울하다. 자기가 스스로의 짐을 받은 측면도 있지만, 가부장적인 시대에서 여성들이 선택 할 수 있는 권리는 생각보다 적었고 누구나 다 선택하는 길이기에 남아있는 사람들 마저도 함께 발을 맞춰 가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도리스 레싱은 적확하게 그려낸다. <19실로 가다>는 '최종 후보명단에서 하나빼기'를 시작으로 총 11편의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 표제작인 <19실로 가다>가 도리스 레싱이 부조리한 여성들의 삶을 명확하게 캐치해 내고, 가부장적 공간에서 여성으로서 최소한의 공간만을 필요로 하게 만드는 사회를 비판적으로 그려낸다.


94년에 출간된 작품임에도 도리스 레싱이 그려낸 소설 속 인물들의 여성이 지금의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래 전부터 계속해서 조금씩 전진해왔다고 하지만 여전히 여자들은 회사 내에서 남자들보다 능력을 발휘하며 살기가 힘이 들고, 능력이 발휘한다고 하더라도 독박육아와 남편의 뒷바라지를 위해 자신의 일을 그만두고 만다. 아이를 어느 정도 키우고, 다시 회사에 나가려고 해도 이미 단절된 경력들이 발목을 부여잡고,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가정을 일구지만 연차가 쌓인 부부의 일상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서로를 향해 눈을 돌리지 않는다. 두 사람이 함께 미래를 꿈꾸고, 행복하게 살겠다는 결심이 조금씩 균열이 가고, 서로의 일에 시선을 두면 서서히 두 사람이 생각하지 못한 불안의 싹들이 조금씩 피어 오른다.


외로움, 권태, 불안, 질투, 의심, 일어나지 않는 순간들을 착각하고 이야기를 만들고 마음을 좀먹으면서 서서히 그녀들은 마음의 병을 얻어나간다. 이전에 꿈꾸던 행복한 삶들이 색채가 서서히 세피아 톤으로 바래지고, 자신이 짊어진 것들이 무겁다고 느껴진다. 공감이 되다 못해 그녀들의 삶이 나의 삶이고, 또 나의 언니, 엄마, 할머니의 삶인 것이다. 도리스 레싱의 작품들은 여성의 삶을 천착하면서도 사회의 단면을 너무나 잘라내듯 그려내 읽는 내내 마음이 콕콕 아려왔다. 누군가의 고독한 삶에 벗어나려고 하지만 나 또한 그 길목에 들어서 그 짐을 짊어지고 나가는 길을 이어나가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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