팡쓰치의 첫사랑 낙원
린이한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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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말 없이 당신의 상처를 보듬어주고 싶습니다.


 책을 읽은지 꽤 시간이 지났지만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몇 번을 망설였다. 처음 그녀의 글을 접했을 때는 너무나 문학적이어서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답다고 생각했으나 책 말미에 그녀의 인터뷰를 보고 나서는 '아름답다'는 말이 그녀에게 독이 되는 말 같아 살그머니 그 단어를 마음 속에 집어 넣었다. 그녀가 쓴 이야기가 자전적인 소설이 아니라 그녀가 지은 이야기라면 마음이 답답하지 않았을까. 사마천이 궁형을 당하고 <사기>를 써내려가듯 그녀는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에 자신을 투영한다. 대만의 신예작가라고 불리던 진이한은 책을 출간 후에 얼마되지 않아 목숨을 끊어버린다.


열세 살 소녀인 팡쓰치와 류이팅은 둘도 없는 친한 친구 사이다. 공부를 비롯해 문학적으로 감수성이 풍부했던 그녀들은 이원과 교류하면서 문학을 더 깊이 이해한다. 팡쓰치와 류이팅은 룸메이트로서 같이 살고 있고,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는 국어강사 리뤄화는 '논술'을 알려준다는 명목 아래 팡쓰치에게 접근한다. 좋은 학교를 가기 위해 이름있는 선생님에게 배우기를열망하는 학부모와 아이들의 기대로 리뤄화는 가르친다는 명목아래 자신의 팡쓰치와 류이팅을 1:1로 불러 개인 수업을 시작한다. 중산층의 가정으로 평범하게 사는 것 같은 그들의 실상은 마치 낚시를 하듯 공부를 잘 하고 싶어서 따르는 아이들을 이용해 리뤄화는 팡쓰치를 비롯해 여자 학생들에게 서스럼없이 다가가 욕심을 채워나간다.


무자비한 폭력으로 몸이 무서진 팡쓰치는 리뤄화가 자신에게 말한 '사랑한다'는 말을 끌어안고 생채기난 마음을 덮어버리려고 노력하지만 잃어버린 마음은 계속해서 나락으로 떨어져 나간다. 이팅에게는 팡쓰치는 사랑한다고 고백을 하게되고, 아무것도 모르고 리궈화를 동경하는 이팅은 팡쓰치를 오해하게 된다. 서서히 이팅과 팡쓰치는 멀어지게 되고, 서로의 마음을 주고 받았던 이원과도 벽을 치게 된다. 쉰 살의 리궈화는 자신의 연륜과 경력을 막 자라나는 아이들의 꿈과 희망을 싹둑 잘라버린다. 국가와 사회, 가정에서, 아이들의 열망이 리궈화 같은 괴물이 살 수 있도록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선생으로서 자격이 없는 그에게 권한과 지위를 넘겨주고 칭송을 받는 그는 뒤편으로는 여학생을 맘껏 유린하며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남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누구도 쓰치의 마음을 돌아보지 않고, 오직 누구보다 앞서기를 바라는 부모와 이팅, 이원까지도 그녀에게 든든한 방패막이 되어주지 못했다. 오해로 멀어졌던 이팅이 어느 날, 전화를 받게 되고 몸과 마음이 부서진 쓰치를 보게되고, 쓰치의 방에서 일기를 발견하면서 그동안 그녀의 행적에 대해 알게 된다. 쓰치가 나락으로 떨어질 무렵 이원 역시 남편 첸이웨이의 폭력에 허물어진다. 결혼하기 이전에 폭력의 조짐이 있었음에도 주변에서는 그의 폭력성을 모른 척 했고, 다시 되살아나는 폭력을 부인인 이원이 모두 몸으로 견뎌내야 했다. 그 누구도 그들을 잡아주지도, 막아주지도 않는 사회. 문학적으로 지식과 감정이 풍부했던 그들은 그렇게 폭력의 중심이 되어 몸이 부서져 버리고, 마음도 곪아버렸다.


가장 마음이 아팠던 장면은 그들의 사건을 알고도 부모들이 앞장서서 리뤄화 같은 이를 몰아내려고 하는 노력 보다는 자신의 딸아이가 잘못을 해서 그렇게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다는 부모들의 시선이다. 쓰치의 부모역시 쓰치를 비난하지 않았지만 자랑스러워하던 딸이 더 이상 자랑스럽지 않았을 때 그들은 서둘러 몸을 피하는 것처럼 빠르게 자신들의 거처를 옮겨 버렸다. 무방비한 사회와 부모들의 욕심이 늙은 사내의 욕심이 그렇게 그들을 망가뜨렸음에도 그들은 아무런 타격없이 당당하게 사회의 일원으로서, 선생님으로서 지낸다.


동화였다면 리궈화는 저렇게 당당하게 서 있지 못했을텐데 현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수면의 잔잔함만 흐르고 만다. 아무런 파동없이 그렇게 가해자는 잘 살아가고 있다. 고통스러운 마음과 죽고 싶을 정도로 잔인한 시간은 사건을 겪은 피해자들에게만 오롯하게 남았다. 치유해줄 수 없는 사회와 사람들의 인식, 개선되지 않는 문제들이 산적해 있고, 지금도 계속해서 많은 쓰치들이 무자비하게 폭력을 당하고 쓰러진다. 여전히 현재형인 상황들. TV를 틀면 여전히 많은 쓰치들이 그들의 힘을 당하지 못해 울고 있다. 쓰치와 이원은 각기 다른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지만 힘없이 저항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닮아있다. 첸이웨이의 폭력을 알고 있기에 자신의 딸을 그에게 붙여놓는 대신 이원에게 소개시켜 주고, 공부를 잘 하라며 쓰치와 이팅에게 리궈화를 붙여준 그들의 부모 역시 가해자다.


나라면 어땠을까. 나 또한 쓰치처럼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사랑이라고 이름부르던 행위들이 몸 속 깊이 가시같이 찔러오고, 그것을 견뎌내지 못한 쓰치는 정신조차 놓고 만다. 쓰치와 이원이 겪는 고통이 글 속에 세밀하게 그려져 있어 읽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책 말미에 그녀의 생전 인터뷰가 실려있다. 그녀의 자전적인 소설. 세상은 그녀가 소설 속 인물인지 물었으나 진이한은 아니라고 답했다. 아닌지 맞는지 무엇이 중요할까. 그녀가 죽은 후 대만에서는 법이 만들어지고, 쓰치와 같은 이들의 목소리가 한데 모아졌다고 한다. 더 이상 여자라서 여자이기 때문에 겪는 폭력이 없어졌으면 좋겠다. 성폭력을 당했음에도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한 번도 배려되지 않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한걸음씩 나아가야 하는 걸까?무엇이 잘못 되었는지를 계속해서 질문하고 되새기고, 또 되새긴 소설이었다. 그 어떤 말을 해도 서걱거리는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그들을 만난다면 그들의 잘못이 아니기에 따스한 손길로 괜찮다, 괜찮다하며 보듬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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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소녀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리뤄화가 일부러 시시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고 내버려두었다는 걸 알았다. 아는 게 많은 사람들이 어떤 일을 저지르는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p.63


사악함이란 이처럼 평범한 것이고, 평범한이란 이처럼 쉬운 것이다. - p.93


쓰치는 연애가 시작되기 전 탐색기를 거쳐야 한다는 걸 알지 못했다. 교문 앞에서 작은 쪽지가 끼워진 음료수를 건네고, 탐색기가 끝나면 남학생이 일본 영화에서처럼 허리를 90도로 구부리고 고백을 한다. 고백을 하고 나면 손을 잡을 수 있다. 풀밭에 나란히 앉아 손가락이 손가락을 더듬고 붉은색 육상 트랙에 둘러싸인 초록색 운동장이 하나의 우주가 된다. - p.135


"딸기가 나오지 않는 계절에는 이걸 못 먹겠구나 생각하면 너무 아쉬워서요. 하지만 레몬 케이크는 일년 내낸 있죠, 난 영원한 게 좋아요. 학생 때 옆자리 친구와 친해지고 나면 혼자 속 앓이를 했어요. 그 친구가 내 옆자리에 앉지 않았더라도 나랑 친해졌을까 싶고, 또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부끄럽기도 하고요. - p.177


"순진한 사람을 나쁘게 만드는 능력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건 사악한 자신감이에요. 아마 나도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꼈을 거예요. 하지만 그런 감정조차 옮지 않다고 속으로 다짐한 후로는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았어요." 기세 좋게 말하던 그녀의 목소리에 다시 힘을 풀렸다. "하지만 가장 사악한 건 아무것도 모른채 스스로 추락하는 걸 내버려두는 걸 거예요." - p.193


나는 밑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은 화산 분화구를 내려다보면서 뛰어내리고 싶고 또 화산이 불출하는 욕망을 갖고 싶어해. -p.233


세상에 해결될 수 없는 고통이 있다는 걸 사람들이 인정했으면 좋겠어요. - p.261


가끔, 나와 B의 집에서 깨어났을 때 혼자 서 있는 나를 발견해. 과도를 소매 안으로 숨기려고 애쓰고 있어. 나는 추악함을 잊을 수 있지만 추악함은 나를 잊지 않을 거야. - P.336


'천사를 기다리고 있는 소녀'야. 내가 세상에서 제일 상처받길 바라지 않는 사람이 바로 너야. 이 세상에 너보다 더 행복해질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어. 너를 솜사탕 백 개만큼 포근하게 안아줄게. - P.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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