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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가 - 달라이 라마와 유전자의 생명토론
아리 아이젠.융드룽 콘촉 지음, 김아림 옮김 / 영림카디널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우리는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가
삶과 죽음은 우리 인간들에게 언제나 숙제이다. 『우리는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가』 책을 받아들고 목차를 살펴보면서 책의 내용을 미리 점쳐보지만, 아직은 목차만으로는 다 알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목차증에 가장 먼저 잡아끄는 제목을 먼저 펼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내 독서는 가슴에 와 닿는 순서부터 읽는 습관이 생겼다. “1장 세균도 의식을 지닌 존재인가, 2장 생명, 죽음, 그리고 희생, 3장 생명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4장 히말라야와 티베트 사람들, 5장 생태학과 카르마, 6장 인간은 선천적으로 선한가, 7장 명상과 새로운 질병들, 8장 과학과 종교를 넘어서”로 구성된 제목들을 죽 살펴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인간에게서 육체가 죽음에 이르면 정말 영혼이 존재할까? 이런 물음을 정면으로 대결해서 나에게 물어보지 않고 나는 늘 회피했다. 그냥 대충 육체가 죽으면 영혼도 끝이지 뭐가 있어? 이런 답을 나는 해답으로 나에게 들려주지 않았나 싶다. 아니 솔직히 해답에 대해서는 확실한 확증이 없다는 것이 내 솔직한 심정이다.
이 책은 종교인과 과학자가 융합해서 내용을 썼다고 말한다. 종교인들에게 과학을 가르치면서, 세균은 의식이 있을까? 세균은 인간으로 환생할 수 있을까? 의문을 가지면서 그들은 과학을 처음에는 믿지 않다고 과학실험하고 난 뒤에 믿게 되었다고 말한다. 살생은 안 된다고 종교는 말하지만, 생쥐 10마리로 수천 명의 목숨을 살린다면 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승려들에게 생물학을 가르치는데, 수업하는 동안 통역사들은 영어로 된 단어와 개념을 티베트어로 승려들에게 전달한다. 이때 학생들을 잘 파악해야 효과적으로 통역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선생들은 2년에 걸쳐 티베트 불교문화를 공부했고 티베트 승려를 비롯해 승려들과 일했던 교육자들과 수많은 대화를 나누었던 것들이 이 책에 녹아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죽음에 대해서, 과학적이면서 정신분석학적 두 측면에서 접근했을 때, 붓다는 윤회를 말했다.
내세가 있다는 것은 종교에선 말하는데, 생물학적으로는 육신이 숨을 거두면 그것으로 끝일까? 내 개인적 생각으로는 영혼이 있다는 것을 믿고 싶다. 승려들이 세포에 대해 연구하고 토론하면서 선생들의 도움으로, 세포들이 서로 센서로 연결되어 있어 연락을 주고받는 다는 것을 이해 해갈 때, 처음 생물시간에 세포에 대해서 공부하던 것이 생각났다. 신경세포 뉴런,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 뇌신경과 척수신경, 축색, 수상돌기 ... 등등 우리 몸속에 네트워크인 신경은 무수한 뉴런들이 모여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배우면서도, 그저 신기하고도 먼 나라 이야기 같았다. 그런 것들을 승려들이 공부를 했다니 어린 시절을 신비로움 가득하던 생물을 무척이나 좋아했기에 그들의 심정을 조금은 알 듯 하다. 얼마나 신비로운 세상이었을까?
티베트 고원에서 사는 유목민들과 높은 고도의 초원은 아주 밀접하게 융합되어 오랜 역사 속에 독특한 목축문화를 이뤄왔다. 바위산맥과 커다란 호수, 깊숙이 파인 계곡을 흐르는 강에 가로 막힌 채, 다채로운 환경 덕분에 무척이나 다양한 생물종이 살아간다. 그들은 티베트 고원의 생태계의 일부로서 모든 행동과 삶, 죽음이 날씨와 바람, 물, 계절의 순환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7세기 무렵 유목민 조상들이 불교와 그 핵심 가치를 받아들였단다. 서구에서야 환경과 인간을 분리된 존재라는 관점들이 퍼져있지만, 티베트는 인간을 자연의 일부라 생각한단다. 많은 과학자들이 티베트인들에게 과학을 가르치려고 노력한단다. 본인들의 분야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미처 보지 못했던 과학의 가능성과 한계, 모순을 탐구하기 위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발생생물학ㅇ레서 불교의 관점을 도입하면서 수정에서 죽음까지의 과정을 달리 생각하게 되었단다. 생태학도 마찬가지란다. 과학적으로 기술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한 체계를 티베트 불교는 전통적 과학의 방법으로는 이해와 예측이 불가능했던 것을 가능하게, 개념적인 공간을 터주었단다.
불교에서는 업보라는 개념을 통해 모든 것이 시공간을 따라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 연결되어 순환된다고 여긴다. 정확하게 어떤 방식으로 그렇게 되는지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것이 우주가 작동하는 방식이라고 본다. 과학은 원인과 결과를 밝혀내는 작업에 기초를 둔다. 이것은 과학은 보통 다수의, 비선형적이고 비위계적인 원인과 결과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과학과 불교는 관점과 공간으로 확장되지 않고는 서로 복잡하게 연결된 체계를 예측하거나 다루지 못한단다.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자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상세하게 서술한 저자의 필력을 따라가다가, 문득 책장을 덮고 생각한다. 새가 한 마리 죽어 나무 아래 묻히면, 그 나무가 걸음으로 새의 영양분들을 다 빨아올려서 잎과 꽃을 피울 것이다. 잎사귀는 벌레가 먹고, 열매난 새와 다람쥐와 사람이 먹을 것이다. 그들이 싼 똥은 다시 땅으로 돌아가 다시 풀과 나무로 자라는 자양분이 될 것이다. 이렇게 돌고 도는 것이 윤회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내 육체는 사후 분해되어 자연으로 되돌아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내 육신으로 만들어진 내 분신은 세상에 살아남아 그의 자녀를 생산하여 그의 피를 나눠주는, 내리 사랑으로 내 후손은 계속해서 태어날 것이다. 나는 죽었지만 나의 피는 영원히 살아있게 된다. 그래서 올바르고 성실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늘 하면서 살아왔던 것 같다. 그런 생각이 없다면 100여년도 안되는 유한한 인간의 삶, 너무 아까워서 어쩔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 책을 덮는다. 오랫동안 삶과 죽음에 대한 진한 여운이 남을 것 같다. 오늘 커피 한 잔은 아주 진하게 느껴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