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 인디언 연설문집
시애틀 추장 외 지음, 류시화 엮음 / 더숲 / 201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게 삶으로 043 들숲을 죽이다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시애틀 추장

류시화 엮음

더숲

2017.9.22.



1991년 봄에 갓 짝을 맺어서 한칸집에 살 적에, 우리 짝은 이레쯤 집을 떠나 배움마실을 다녀와야 했고, 혼자 있기에 무서울까 싶어 시누이가 와주어 같이 지냈다. 그때 하루는 극장에 갔고, 〈늑대와 춤을〉을 보았다. 이 영화를 보러 온 사람이 얼마나 많던지 자리를 못 잡았고, 우리 둘은 극장 바닥에 앉아서 보았다.


북중미 텃사람(원주민)이 미국한테 삶터를 빼앗기면서 자꾸 구석으로 몰리던 무렵, 어느 백인 병사는 ‘백인 문명이 저지르는 짓’을 창피하다고 깨달으면서 ‘텃사람 죽임짓(원주민 토벌)’을 하는 병사를 그만두고, 텃사람처럼 말을 하고 텃사람처럼 옷을 입으면서 살아가기로 했다지.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를 읽어 보았다. 우리가 일본한테 나라를 빼앗기며 끌려다닌 나날을 놓고 책을 쓴다면, 멍울지고 아픈 이야기가 수북하리라. 그런데 이 책을 읽어 보면, 북중미 텃사람은 멍울이나 아픔을 다르게 바라보면서 다르게 풀어낸다. 왜 들숲을 품고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흙과 나무와 하늘을 어떻게 돌아보고 살아야 하는가 하는 이야기가 가득하다. 냇물과 바다가 들려주는 노래를 들으라는 이야기가 흐른다.


우리는 일본한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었나 하고 돌아본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한테 어떤 이야기를 남기는지 헤아려 본다. 우리는 아프고 찢긴 발자취를 되새길 적에 미움씨앗이나 불길씨앗을 외치지는 않았을까? 총칼을 움켜쥔 이들을 부드러이 나무라면서, 총과 칼이 아니라 낫과 호미를 쥐고서 함께 흙을 일구고 숲을 푸르게 가꾸자는 목소리를 낸 적이 있을까?


북중미 텃사람뿐 아니라, 우리 옛어른도 지난날에는 숲에서 나무를 함부로 베지 않았다. 다들 지난날에는 나무한테 여쭙고서 우리가 쓸 만큼만 얻었다. 예부터 북중미 들숲이건 우리네 멧골이건 바람하고 바다하고 얘기하던 마음이었다. 북중미에서도 우리나라에서도, 새가 들려주는 노래를 귀여겨듣고 바람이 알려주는 하루를 곰곰이 새긴 살림이었다.


‘시애틀’이라는 겨레이름을 따서 ‘시애틀’이라는 고을이름을 붙였다지만, 정작 그곳 시애틀에는 ‘시애틀 겨레’가 들어갈 수도 깃들 수도 살 수도 없었다는 이야기를 읽었다. ‘들과 숲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들도 숲도 잃어야 했을 뿐 아니라, 들과 숲을 마구 파헤치는 문명을 멀거니 지켜보아야 했다.


오늘날 우리는 스스로 들숲을 파헤치고 바다를 어지럽힌다. 아이들을 대학교로 보내려고 애쓰기는 하지만, ‘가르침’이나 ‘배움’하고는 먼 듯하다. 학교는 오래 다니지만, 요즈음 아이들은 들도 숲도 모르는 채 입시에만 붙들린다. 나는 어릴 적에 의성 멧길을 혼자서도 넘고 동무하고도 넘으면서 살았는데, 요즈음 아이들은 들길도 멧길도 숲길도 모르면서 산다. 아파트에 꽃밭을 두지만, 아파트 꽃밭은 아이들이 손수 돌보거나 소꿉놀이터로 삼을 수 없다.


반짝거리는 돌에 미쳐서 기찻길을 내던 백인 문명은 북중미 텃사람을 더 수렁으로 밀어넣었다. 그나마 더 깊은 숲으로 숨던 텃사람은 숲에서마저 쫓겨나야 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날 벌이는 모든 개발과 문화도 북중미에서 벌어진 ‘텃사람 죽임짓’하고 닮는다. 들과 숲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닫은 우리 모습이다. 바람과 바다가 속삭이는 이야기를 아주 등진다.


나무를 미워하고 밀어내기만 하는 우리나라 앞날에는 무엇이 있을까. 우리는 서로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가는가.


2023.10.7. 숲하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담론 -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게 삶으로 042 내가 꼽는 책



《담론》

신영복

돌베개

2015.4.20.



2019년 2월 어느 날을 떠올린다. 일곱 사람이 책모임을 하자며 처음으로 찻집에서 만났다. 어느 분이 나한테 《담론》을 읽어 봤냐고 물었다. 안 읽었다고 얘기하는데 “그 책도 모르느냐”는 듯이 자꾸 말을 해서 참 부끄러웠다. 나는 여태까지 뭘 하며 살았나.


그런데 모인 일곱 사람 가운데 한 분이 전라도라면 아주 싫어했다. 우리 일곱 가운데 전라도사람이 있었다. 모처럼 다들 큰마음을 먹고 책모임을 하기로 했지만, 그만 첫모임이 끝모임이 되고 말았다.


그 뒤 그 책모임을 잊었는데, 어느 날 책집에 갔더니 《담론》이 보였다. 이 책을 어떻게 모르느냐고 타박하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책을 집어 보았다. 《담론》은 신영복 님이 들려준 말을 받아적어서 꾸렸다고 한다. 크게 두 갈래로 이야기를 묶는데, 앞쪽은 ‘시경’과 ‘주역’ 같은 중국 옛책에 나온 이야기를 풀어낸다. 뒤쪽은 사슬(감옥)에 갇히던 무렵에 겪은 일을 풀어낸다.


곰곰이 보면, 옛책(고전)으로 배운다고 할 적에는 다들 중국책을 손꼽는다. 중국에서 나온 책이어도 훌륭한 책은 훌륭하겠지만, 책으로 적히지 않은 훌륭한 삶도 많지 않을까?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는 멧골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내내 일만 하셨는데, 아마 두 분은 책을 모르셨을 만하지만, 삶에서 배우고 곱씹을 이야기가 많다고 느낀다.


나는 ‘노자’ 이야기에 많이 끌린다. 《담론》에서 풀이하는 노자를 보면, ‘공부’라는 한자말에서 ‘공’은 하늘과 땅을 잇는다는 뜻이고, ‘부’는 하늘땅을 사람이 잇는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삶에서 공부 아닌 길이란 없고, 공부하지 않으면 죽은 목숨이라고 한다. 모름지기 모든 공부는 옛책(고전)을 바탕으로 쌓으며, 예부터 사람들이 일군 살림을 물려받는다고 한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길이 공부이고, 낡은 생각을 깨트리는 일이면서, 가슴부터 발까지 가는 동안 삶에 발을 디딘다고 한다.


신영복 님은 ‘변방’을 되풀이해서 말한다. 한 나라나 한 사람도 ‘변방’이 짓는다고 말한다. 우리가 쓰는 ‘말’이라는 그릇은 매우 작기에, 이 작은 그릇으로 바닷물을 뜬다고 한들, 작은 그릇에 담긴 물은 바다가 아니라고 덧붙인다.


그런데 알쏭달쏭하다. 커도 바다이고 작아도 바다이지 않을까? 귀퉁이(변방)가 한 나라와 한 사람을 짓는다면, 작은 그릇에 담긴 물이 온누리를 이루고, 작은 말 한 마디가 모든 마음과 삶을 일구지 않을까?


멧골에서 나고자란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언제나 씨를 뿌리고 돌보고 일구어서 거두었다. 작은 씨앗 한 톨은 나중에 쌀이 되고 열매가 되었다. 작은 씨앗 한 톨은 우리 목숨이면서 숲이고 이 별(지구)이지 않을까?


공자나 맹자나 시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공부’해야 한다는 뜻은 좋다고 느낀다. 작은 조각에 얽매이지 않는 마음으로 크게 하나를 보아야 한다고 느낀다. 그러나, 시를 쓰는 일을 ‘병법’에 빗대는 이야기도 아리송하다. 공부이든 시쓰기이든, 시골사람이 논을 갈고 밭을 가는 일하고 닮지 않았을까? 배우는 길이든 글을 쓰는 길이든, 시골내기가 씨앗 한 톨로 새 숨결을 일구는 길하고 닿지 않을까? 말과 글이란, 아주 작은 말과 글이어도 바다를 담고 하늘을 담지 않을까? 시쓰기를 ‘병법 군사배치’하고 빗대는 일이란, 마치 ‘공부란 전쟁이다’ 하고 읊는 셈이지 않을까?


숲을 숲 그대로 받아들이면, 누구나 어질게 배운다고 느낀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도, 이웃 아주머니 아저씨도, 먼 옛날부터 경북 의성 멧골마을에서 나고자란 모든 할매 할배도, 책을 모르고 옛책(중국 고전)은 더더구나 몰랐을 테지만, 하늘과 땅을 알고 바람과 숲을 알고 씨앗 한 톨을 알고, 아이들을 사랑하며 돌보았다.


여러 옛책을 바탕으로 삼아서 배워도 좋으리라. 그렇지만 책이 없어도 삶으로 배운 사람이 훨씬 많다. 책을 모르고 글조차 몰랐지만, 착하고 참하게 살아온 사람이 아주 많다. 2019년에 타박을 듣고서 2023년에 이르러서야 《담론》이란 책을 다시 폈지만, 이 책을 읽어야만 시나 글을 쓸 수 있다고는 여기지 않는다. 


신영복 님은 잡지사에서 ‘삶에 이바지한 책 하나’를 꼽아 달라는 묻자, 《논어》와 《자본론》과 《노자》를 꼽았다고 한다. 다 좋은 책일 테지만 너무 어려운 듯하다. 나는 아직 내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줄 만한 책이 무엇인지 모른다. 책을 다시 읽고 책을 보는 눈이 뜨이면 그때는 스스럼없이 하나를 집을는지 모르겠지. 아직까지 나한테는 ‘어머니라는 책’과 ‘아버지라는 책’과 ‘의성이라는 멧골마을이라는 책’, 이 세 가지하고 ‘우리 세 아이라는 책’이 내 삶에 이바지한 책이라고 느낀다.




2023.10.05.숲하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무야 나무야 - 국토와 역사의 뒤안에서 띄우는 엽서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199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게 삶으로 041 나무한테서 배우는



《나무야 나무야》

신영복

돌베개

1996.9.12.



《나무야 나무야》를 쓴 신영복 님은 내가 태어난 해에 감옥에 들어갔다. 감옥에서 스무 해 넘게 있다가, 내가 고등학교를 마친 다음인 88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풀려났다. 신영복 님이 쓴 다른 책을 다섯 해 앞서 읽은 적 있다. 이 책 《나무야 나무야》가 나오던 해를 돌아보면, 그때 우리 집 둘째가 아홉 달이었다. 이 갓난아기를 시골집에 맡겼다. 그때까지 시골에 둔 첫째 아이를 데리고 나와서 어린이집에 맡겼다. 갓난아기를 돌볼 적에는 첫째 아이랑 떨어졌고, 첫째 아이를 데려오면서 둘째 아이를 다시 시골집에 맡기면서 맞벌이를 했다. 이러면서 주말에 시골로 가서 아이를 데리고 나왔다.


두 아이를 낳아 돌보던 즈음에는 책하고 멀었다. 아니, 책을 읽겠다는 생각조차 못 했다. 그때에는 알아볼 수도 읽을 수도 없던 책인데, 이제 첫째 아이랑 둘째 아이는 어른으로 컸다. 다들 따로 살림을 차려서 나갔다.


《나무야 나무야》에 부여 이야기가 나온다. 문득 첫째 아이 돌잔치를 하던 때가 생각난다. 그때 우리 아버지가 우리 집, 그러니까 내가 따로 살림을 낸 집에 처음으로 와서 노래를 불렀다. 그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우리 아버지 노래를 들었다. 우리 아버지는 ‘꿈꾸는 백마강’과 ‘동숙의 노래’를 불렀다. 그날 우리 아버지가 부른 노래를 듣고서 백마강이라는 이름을 알았다.


올해 한가위 며칠 앞서 아버지 꿈을 꿨다. 시월 끝무렵이 아버지가 흙으로 돌아간 날이다. 마을에 소나무는 얼마 없는데 우리 아버지는 소나무와 같이 묻혔다. 이 책을 읽으면서 왜 책이름이 ‘나무야 나무야’일는지 갸우뚱했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갸우뚱했다. 곰곰이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별에서 나무가 무엇이든 다 짓는다. 사람이나 짐승은 뭘 짓기보다는 쓰기만 한다. 이런 얼거리를 빗대려고 붙인 책이름일까?


아이들이 어릴 적에 가끔 안동댐에 함께 마실을 갔다. 안동댐에 가는 길인 임청각 앞에는, 길 한가운데에 회화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즈믄 해쯤 된 나무가 길 가운데 있기에, 사람들은 이 나무를 베려고 했다는데, 이 나무를 베려고 할 때마다 사람들한테 사달이 났다지. 도끼를 찍으면 그 사람이 숨을 거둔다는 말이 강파르게 돌기까지 하고.


그 오랜 나무가 아니더라도, 나무는 함부로 건들지 않아야 한다고 듣고 배웠다. 우리는 의성 멧마을에서 땔감으로 삼으려고 어린나무를 치기는 했어도, 오랜나무는 함부로 안 건드렸다. 이제 와 돌아보면, 예부터 어른들이 아이들을 몸으로 가르치고 살림으로 보여주었지 싶다. 숲이 살아야 사람도 살 수 있고, 나무하고 사람이 어우러져야 오래오래 살림을 이을 수 있다는 깨우침을 넌지시 알려준 셈이다.


우리 아버지는 하늘이 준 숨을 다 쉬고 가셨다. 아버지하고 묻힌 나무도 제 숨을 다 쉬었으려나. 아버지가 묻힌 곳을 둘러싼 나무숲이란, 아버지를 떠올릴 적마다 푸르게 숨쉬고 생각하라는 마음을 일러준다고 생각한다. 하루를 짓는 삶도, 글을 쓰는 삶도, 나무를 헤아리는 마음으로 다스리면 되겠지.


어른이라면 나무한테서 배우고, 나무를 아이한테 가르치리라. 어른이 아니기에 나무를 등지고, 나무한테서 못 배우니, 아이들한테 나무를 얘기하지 못 하거나 가르치지 못 하리라.



2023.10.04. 숲하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학 오디세이 세트 - 전3권 미학 오디세이 20주년 기념판 3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작게 삶으로 040 낯설게 또는 나답게



《미학 오디세이 2》

진중권

휴머니스트

1994.1.15.



《미학 오디세이 2》을 내처 읽는다. 둘쨋책은 ‘마그리트’를 바탕으로 화가와 철학가와 음악가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철학가는 ‘모든 예술에서 꼭대기는 시’라고 여긴다는 이야기가 흐른다. 그러니까 ‘마그리트’는 철학가이자 화가였다는데, 이분 그림은 ‘시’와 같다고 한다. 시처럼 읽을 만하겠다.


내 어릴 적을 돌아본다. 의성 멧마을에서 나고자라던 그무렵에 우리 엄마아빠는 겨우겨우 먹고살았다. 겨우 먹고살아도 늘 빠듯했다.


열너덧 살 무렵을 떠올린다. 중학교에 다니던 그즈음, 다른 수업보다 미술이 싫었다. 참 싫었다. 학교에 연못이 있었고, 둑을 따라 풀밭인데, 밖에 앉아서 풍경화를 그릴 적에는 먼저 연필로 밑그림을 하고 물감으로 빛깔을 입히는데, 나는 물감질이 서툴었다. 빛깔을 어떻게 내야 하는지도 잘 알기 어려웠다.


붓질이 서툴어 그림을 가까이하지 않았을까. 스스로 그림을 못 그린다고 여겨 다른 사람 그림도 그리 들여다보지 않았을까. 그림을 못 그리고 모르니까 미학도 미술도 어려울는지 모른다.


《미학 오디세이》는 어렵다. 첫쨋책도 둘쨋책도 어렵다. 가만히 보니 ‘미학’이란 말도, ‘오디세이’라는 말도 어렵다. 글쓴이는 왜 이렇게 어려운 말로 어려운 이야기를 쓰려고 할까? 어려운 말로 어렵게 이야기를 풀어야 ‘미학’이고 ‘예술’이고 ‘학문’일까?


‘데페이즈망 기법’을 알아야 마그리트 그림을 읽을 수 있다고 한다. 흔히 보는 것을 낯선 자리에 툭 던져 놓는 길이 ‘데페이즈망’이라는데, 쉽게 말하자면 ‘낯설게 하기’쯤일까? 그래, ‘낯설게 하기’일 테지. 그런데 왜 ‘낯설게 하기’라고는 안 하고 ‘데페이즈망 기법’이라 해야 할까? 이런 말을 그냥그냥 써야 미학이나 예술이나 철학이나 문학이 되는가?


책을 덮고서 생각한다. 내가 쓰고 싶은 글은 ‘낯설게 하기’는 아니다. ‘나를 바라보기’로 글을 쓰고 싶다. ‘나를 내가 바라보기’를 하고 싶다. 그런데 내가 나를 바라보려면, 껍데기나 허울이나 옷이 아닌 속마음을 보아야 한다. 옷차림만 훑어서는 마음을 모를 수밖에 없다. 나를 나답게 참답게 느끼고 알려면 얼굴이나 몸이 아닌, 속으로 흐르는 숨결과 넋을 보아야 한다.


우리가 읽는 문학은 ‘데페이즈망’에 빠져서 겉모습만 꾸미는 셈은 아닐까? 뭔가 남다르게 꾸며내어야 멋있거나 아름답다고 여기면서 문학상을 주지는 않을까? 


나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고 싶다. 나는 내 마음을 읽고서 쓰고 싶다. 나는 내 하루를 스스로 가꾸면서 이 하루를 글로 쓰고 싶다. 시를 먼 곳에서 찾고 싶지 않다. 낯선 모습도 낯익은 모습도 아닌, ‘나’를 나로서 보고 싶다. 구름에 깃든 마음을 읽고서, 꽃송이에 깃든 숨결을 읽고서, 맨발로 멧길을 오르내리는 발바닥에 깃든 흙빛을 읽고서, 집안일을 하고 가게일을 하며 흘린 땀방울을 읽고서, 짝꿍하고 둘이서 꾸리는 집살림을 읽고서, 이 모든 하루를 고스란히 옮기고 싶다.



2023.10.03. 숲하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학 오디세이 1 미학 오디세이 20주년 기념판 3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3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작게 삶으로 039 배우고 싶다



《미학 오디세이 1》

진중권 

휴머니스트

1994.1.15.



남들이 쓰는 시를 나도 쓸 수 있을까 싶어, 그러니까 시를 좀 잘 써보려는 마음에 《미학 오디세이 1》를 샀다.


여태껏, 가까이 있는 미술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 미술을 몰라도 그냥 내 나름대로 느끼면 시나 글로 풀어내고 싶었다. 《미학 오디세이 1》를 펴니, ‘에셔’ 그림을 바탕으로 풀어낸다. 꿈과 삶 사이에서 꿈을 넘어 되살아나는 빛이 어떻게 아름다운지 풀어간다. 조각조각 모이는 사람이 조각보처럼 펼치는 이야기마냥 먼 옛날 그림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스 하느님을 짚고, 그리스 철학이나 조각가나 화가나 건축가 이야기를 마치 천을 짜듯 날줄과 씨줄처럼 잇고 여미어 낸다. 


여러 길을 넘나드는 이야기를 읽다가 샛길로 빠져 본다. 문득 지난 어느 일을 떠올린다. 우리 집 첫째 아이나 둘째 아이가 학교를 다니던 지난날, 해마다 학년이 바뀔 적에 ‘가정조사’ 같은 종이에 ‘엄마 학력’을 적어야 할 때면, 참 부끄러웠다. ‘엄마 학력’이라는 이름 앞에서 얼마나 조그마했는지, 얼마나 쪼그라들었는지 모른다.


나는 뒤늦게 ‘졸업장’을 따려고 늦깎이로 들어가서 ‘대학교 수업’을 받았고, 그때 첫 수업에서 이키아누스에 다달로스 조각가 이야기, 이스터섬 큰돌 이야기, 줄기세포 이야기, 대체에너지 이야기에 사로잡혔다. ‘아! 대학교에 들어가면 이런 이야기를 듣고 배우는구나!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까 교양을 넓히는구나!’ 하고 여겼다. 그때에는 아직 안동에서 살았는데, 안동에서는 대학교 수업을 받을 수 없어서, 대구에 있는 친척집에서 묵었다. 그때 들은 수업 가운데 피그말리온 이야기도 떠오른다. 스스로 새긴 아가씨한테 반한 이야기였던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던 그즈음에는, 나도 내 나름대로 고요히 바라고 품으면 내 꿈도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날도 오늘도 내 꿈을 이루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하다.


지나온 나날을 돌아보고 생각하다가 《미학 오디세이 1》를 다 읽는다. 책을 덮고서 눈을 감는다. 나는 이 책에서 들려주는 에셔 그림에서 무엇을 얻었을까? 가지런히 나란히 잇는 무늬를 보면서 무엇을 느꼈을까? 빈틈없이 자리를 메우는 무늬는 내 마음속 무엇을 깨우는가? 이 책을 읽었기에 내가 바라는 글이나 시를 잘 쓰는 실마리를 얻었는가?


예술가도 철학가도 ‘아름다움’을 말한다. ‘아름다움’을 찾으려고 붓을 쥐어 그리고 칼을 쥐어 새긴다. 예술가도 철학가도 숲(자연)을 보고서 옮긴다. 이른바 ‘모방’이라 할 텐데, 어쩐지 ‘모방’이라고 하니 대단한 듯싶지만, 우리말로는 ‘흉내’나 ‘시늉’이나 ‘따라하기’나 ‘베끼기’ 같다.


나는 배우고 싶다. 베끼는 글이 아닌, 배우는 글을 받아들여서 쓰고 싶다.



2023.10.2.숲하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