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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말 ㅣ 봄날의책 세계산문선
막스 피카르트 지음, 배수아 옮김 / 봄날의책 / 2013년 6월
평점 :
작게 삶으로 75 말이라는 빛
《인간과 말》
막스 피카르트
배수아 옮김
봄날의 책
2013.6.24.
‘언어’라는 한자말을 어떻게 풀어서 쓰면 좋을는지 헤아리다가 《인간과 말》을 펼친다. 열 달쯤 앞서 읽은 책인데, 다시 펼치니 책 귀퉁이를 접어놓은 자국이 꽤 많다.
말에는 몸이 없다. 어려운 이야기도 쉽게 풀면 듣거나 읽기에 좋다. 자칫 어렵기만 할 수 있는 길을 나긋나긋 풀어낸 책이 아닐까 싶다.
문득 생각해 보니, 말이란 우리 스스로 몸을 짓는 길일 수 있겠다. 갓 태어난 아기는 말보다는 몸짓으로 받아들이면서 하루하루 겪고 물려받고 배운다. 말에 앞서 몸이 있는 듯하다.
몸으로 겪으면서 알아가고, 마음에 맺은 멍울을 하나하나 다스리면 어느새 마음이 스스로 낫는다. 어둡게 가라앉은 몸을 씻고, 어둡게 덮는 말을 씻는다. 몸은 좁거나 작은 곳에는 못 들어갈 테지만, 말은 어디에나 들어가고 흐른다. 손끝에서도 입밖에서도 말은 흐르고 들어가고 나오면서 돌고돈다.
숲에 깃든 모든 목숨은 사람한테 머물기를 바란다. 바다는 하늘과 닿을 때까지 판판하게 펼치다가, 어느 날 배가 지나가면 아득하게 물러나 돌아간다. 바다는 사람과 배가 있는 그곳에 머무른다. 돌개바람이 휘몰아치는 숲에서 나무는 활짝 가지를 연 채 서다가, 사람이 숲을 지나면 꼭 사람을 부른다. 숲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를 사람이 듣기를 바라는 듯하다. 메아리란 숲이 붙잡는 말이 아닐까 싶다. 모든 말은 스스로 안을 으깨고 부수고 밑에서 바깥으로 올라온다.
《인간과 말》은 그냥 ‘언어’라는 낱말을 쓴다. 아니, 글쓴이는 ‘언어’라 하지 않았겠지. 이 책을 옮긴 사람이 ‘언어’로 적었을 테지. 그런데 우리말은 ‘말’이다. 말이란 무엇일는지 생각해 본다. 마음을 소리로 옮기기에 말이라고도 하는데, 말을 ‘말’이라고 할 적에 더더욱 말빛이 살아나리라 느낀다. 마음을 ‘마음’이라 하고, 사람을 ‘사람’이라 하고, 숲을 ‘숲’이라 할 적에 제 뜻이 빛나리라 생각한다.
사람은 하루를 말이라는 빛으로 연다. 우리한테는 하루가 빛이다. 말에 담긴 빛은 낮으로 옮겨가기를 바라는 밤이다. 슬픈 말은 빛이 모자라다기보다 어둡다는 뜻이다. 말은 다른 말, 마음을 담아서 빛난다. 다른 말도 다른 말인 마음에 따라서 빛난다. 말은 별처럼 빛을 낸다. 말은 마음을 옮기면서 반짝이는 소리로 태어나는 빛인 셈이다.
곰곰이 보면, 꾸밈말이나 억지말은 말이 아니라 그저 내뱉는 소리이다. 오늘날에는 우리 스스로 말을 돌보지 못 한다고 느낀다. 빛이 있어야 하는 자리에 소리만 남는다. 말이 서로 오가지 않는다. 마냥 부딪치는 소리로 티격태격한다.
말빛을 살려야 하는 까닭을 돌아본다. 아기가 태어나면서 내는 모든 소리에 노래가 있다. 우리가 쓰는 말은, 한낱 소리로 그치지 않고 노래로 흐르기를 바라는 바람일 수 있다. 하늘을 가만히 떠다니는 노랫결 같은 말을 편다면, 이 말을 글로 옮긴다면, 잠을 깰 적에 눈을 번쩍 뜨듯이 마음을 환하게 밝힐 수 있겠지.
2024.01.02.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