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리말의 상상력
정호완 / 정신세계사 / 199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작게 삶으로 66 낱말겨레
《우리말의 상상력 1》
정호완
정신세계사
1991.4.15.
나는 우리말을 좋아하지만, 아직 우리말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 《우리말의 상상력 1》는 우리말이 어떻게 낱말겨레를 이루고 낱말날개가 어떠한 길을 지나는지 살핀다. 우리말 뿌리와 가지에 걸리는 말이 어떻한지 들려준다.
아기가 태어나면 알록달록 움직이는 그림을 천장에 달아 준다. 아기 이름을 부르고 손뼉을 치면, 아기는 소리 나는 쪽으로 본다. 젖을 먹는 동안 엄마 냄새와 엄마 살결을 촉촉하게 느낀다. 말이 아닌 웃음과 울음으로 말을 한다. 목을 가누고 뒤집고 기고 잡고 일어서고 걷는데 온 하루를 보낸다. 문득 이 모습이 우리한테 숱한 길을 가르치고 말한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이가 글을 모를 적으로 돌아가면 아름다이 글과 노래를 짓고 만날 수 있겠구나 싶다.
나는 ‘감사합니다’라 안 하고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쓴다. 아직 우리말을 모르던 때에는, ‘고맙다’가 아닌 ‘감사하다’가 훌륭한 말인 줄 여겼는데, 이 책을 만난 뒤 생각해 보니, ‘고맙다’는 우리말이고, ‘감사하다’는 한자말일 뿐이었다. 우리말 ‘고맙다’ 뿌리를 살피면 어마어마한 사랑과 숨결을 품는 줄 뒤늦게 알아보았다. 이제는 우리말 ‘고맙다’를 즐겁게 쓴다. ‘고맙다’를 이루는 뿌리인 ‘고마’는 어머니 하느님인 ‘곰’을 뜻한다고 한다. 배달겨레가 빛나면서 넉넉히 누리기를 바라던 마음인 하느님이 ‘고마(곰)’이다. 고마는 ‘고맙다’로 바뀌고, ‘꼬마’라는 이름으로도 굳었다.
《우리말의 상상력 1》를 읽으면 여러 풀과 목숨이 나온다. 풀꽃나무 이야기를 들으면 언제나 귀를 쫑긋 세운다. “짐승의 새끼들은 암컷과 수컷 사이에서 태어나며 자란다. 어미의 다리 사이에서 솟아 나와 개체를 드러낸다. 식물도 다르지 않다. 봄이 되어 싹이 트는 걸 보면 잎 사이에서 새순이 돋아 오르고, 뿌리와 뿌리 사이에서 새싹이 나온다. 식물의 새끼는 싹이 되고 동물의 싹은 새끼로 되었으나 말 뿌리는 하나”라고 들려주는 대목을 곱씹는다. 삶도 숨결도 말도, 잎과 새싹과 뿌리 사이에서 나온다. 짐승도 사람도 다리 밑으로 낳는 모습을 헤아려 본다.
낱말이 태어난 뿌리를 돌아본다. 나무와 살고, 굴에서 살고, 숲을 안고 살던 때에, 숲에서 나온 말이다. 우리는 물과 해와 풀이나 나무처럼, 푸새나 남새가 푸르게 있기에, 오늘도 먹고 마시면서 살아간다. 꽃을 피우는 풀꽃나무가 참으로 고맙다.
우리말은 보이지 않는 곳도 들려준다. 입고 먹고 만지고 맡고 듣고 느끼듯이, 말밑마다 눈으로도 보고 눈이 아닌 마음으로도 보는 곳을 짚는다. “집이란 풀숲을 뜻한다”는 이야기도, “풀과 나무에 목숨살이가 깃든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비가 무생물로 우주 공간을 떠돌아다니는 것이라면, 피는 생물의 몸속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돌아다니는 물이고, 비가 식물 색깔이라면, 피는 동물이다”라는 이야기도 가만히 되새긴다.
내가 생각 없이 뱉는 말도 죽지 않는다. 사람들 입에서 그냥그냥 나온 말도 죽지 않는다. 이모저모 책을 읽고 쓰면서 뼈저리게 느낀다. 곰곰이 생각한 말도, 아무 생각이 없이 뱉은 말도, 하나도 사라지지 않고 온누리를 맴돌 뿐 아니라, 언제나 우리한테 깃들었다가 나오는 줄 새삼 느낀다.
열 해 앞서 우리 어머니가 “딱 열 해 돈 잔뜩 벌어서 돌아오라”고 하던 말이, 요즘 나한테 척 달라붙어 괴롭다. 말과 글이 들이나 밭에 자라는 풀처럼 싹을 틔운다. 우리말 뿌리는 알아갈수록 재밌으면서 놀랍다.
그래, 우리말 한마디가 고스란히 삶이다. 작은 낱말 하나하나에 우리 삶이 스민다. 내 얘기를 풀어놓는 글을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삶을 바탕에 깔지 않은 글이 오히려 부끄럽다. 착 달라붙지 않고 어딘가 붕 뜨면 부끄럽다. 우리말을 다시 생각해 본다. 우리말로 이야기를 하면, 고등어는 고등어 냄새가 있고, 꽁치는 꽁치 냄새가 있다. 사람도 다 다른 냄새와 빛깔이 있다. 우리를 가리키는 이름에 마음이 묻어난다. 삶은 나답게 뿌리를 내려야지. 내 뿌리를 말로 하고 글로 써야지.
2023.12.21.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