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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고 보는 길 - 개정판 ㅣ 정채봉 전집 3
정채봉 지음 / 샘터사 / 2006년 1월
평점 :
품절
작게 삶으로 054 아프던 어제
《눈을 감고 보는 길》
정채봉
샘터
2006.1.9.
《눈을 감고 보는 길》을 읽었다. 글쓴이가 죽음을 앞두고 쓴 글을 모은 책이다. 곧 몸을 내려놓아야 할 날을 알아채고서 병원에서 쓴 글이다. 머잖아 더는 글을 쓸 수도 책을 읽을 수도 없는 몸인데, 마지막으로 남기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문득 생각해 본다. 나는 여태 병원에 어떤 일로 얼마나 드나들었을까. 아이를 셋 낳는다면서 병원에 가서 배를 갈랐다. 곪은 멍을 뽑아내야 한대서 갔다. 건강검진을 해야 해서 드나들기도 한다.
무릎이 삐걱거리면서 뒤틀리듯 아파서 병원에 들어간 때도 있다. 이때에는 다리에 무거운 쇠를 박았고, 한 달 동안 병원에 몸져누우면서 잠을 거의 못 잤다. 진통제를 먹고서야 가까스로 눈을 붙였다. 다리를 째고 쇠를 박고 아물어야 했으니 얼마나 아팠던가. 오금이 저리고 저절로 아야 소리가 터져나왔다. 한 달이 지나고서는 바퀴걸상을 석 달 탔다. 겨우 나무발을 짚고 일어서며 다시 걷는 훈련을 했는데, 이 여러 달에 걸쳐 일기는 엄두도 안 났다.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일기는 꼬박꼬박 썼는데, 이때에는 아무 생각도 못 하며 아픈 다리를 버티기만 했다.
둘째를 낳던 때를 떠올린다. 둘째도 딸이었는데, 두 집안 어른은 아들을 바랐다. 아들 아닌 딸이 나온다는 말에,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인데, 아기가 태어나는 즈음을 앞두고 다들 집으로 돌아가더라. 혼자 남아서 몹시 서러웠다. 아무튼 나는 배를 갈랐고, 아기는 나왔는데 나는 넋을 잃고 안 깨어났단다. 이때에 네 살이던 큰딸이 “엄마, 일어나!” 하고 외쳐서 깨우더란다. 둘레에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깨우려고 그렇게 애써도 꼼짝을 안 했다는데, 네 살 큰딸이 흔들며 깨울 적에 비로소 알아차렸다고 하더라.
둘째를 딸로 낳은 뒤 배가 무척 고팠다. 어쩌면 죽다가 살아난 셈인데, 딸을 낳았다면서 아기 엄마인 나를 쳐다보는 집안어른이 없었다. 그 흔한 귤 하나도 사주지 않더라. 아무도 내가 배가 고픈 줄 몰랐고, 뭐라도 먹을거리를 사주지 않더라. 어쩜 그럴 수 있을까. 이때 일은 몹시 섭섭해서 오래도록 사무쳤다.
《눈을 감고 보는 길》을 돌아본다. 아픈 몸으로 쓰는 글에는 어떤 마음이 담기는가. 이제 마지막인 줄 알 적에는 어떤 글을 쓸 수 있을까.
이제 나는 멀쩡히 걷는다. 잘 달리지는 않지만, 멧길도 이따금 오르내리고, 자동차를 몰기도 한다. 가게 일도 이럭저럭 한다. 바다를 보면 바다에 뛰어들고 싶다. 숲에 가면 벼랑에서 껑충 뛰어내려 보고 싶기도 하다. 이 다리로 어디를 더 다닐 수 있을까. 앞으로 살아갈 날에는 어떤 하루를 걸어가면서 내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을까.
하나하나 돌이키면, 언제나 아이처럼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마음일 수밖에 없다. 책을 읽어도, 일을 해도, 집에서 잠들어도, 바람을 쐬려고 멧골을 찾아가도, 늘 다시 배우는 하루이다.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다가 눈을 다시 뜨면 꼭 다시 태어나서 살아가는 하루 같다. 이 책도 나한테는 스승이고, 이 책을 읽고서 남겨 보는 이 글도 배우는 일이다.
마음속에서 울리는 소리를 들어 본다. 그동안 닫아걸며 안 들으려고 했던 속마음을 천천히 들어 본다. 마음에 든 멍도, 몸에 새긴 멍울도, 차근차근 씻고 털어내면서 마음소리를 들어 본다.
2023.11.05.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