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쫓기는 동물들의 생애 - 시튼의 야생동물 이야기
어니스트 톰슨 시튼 지음, 이한음 옮김 / 지호 / 2002년 12월
평점 :
품절
작게 삶으로 034 빼앗지도 빼앗기지도
《쫓기는 동물들의 생애》
어니스트 톰슨 시튼
이한음 옮김
지호
2002.12.20.
오늘 헌밥솥을 버리려고 안고 가다가 오르막 징검돌에서 돌멩이를 밟고 미끄러졌다. 손바닥이 붓고 아파서 응급실에 갔다. 손바닥뼈에 금이 가서 판을 대었다. 움직이지 못하게 천까지 친친 감았다.
살짝 딴청을 하다가 넘어지고 손까지 크게 다치자 할 일이 까마득하다. 다른 손은 금은 가지 않지만 아직 얼얼하다. 내가 하는 일은 손을 많이 쓴다. 일도 그렇고 글을 쓸 적에도 두 손으로 글판을 두드린다. 글을 쓰고 싶은데, 글판을 제대로 칠 수 없어 아주 버겁다. 글은 그렇다치고, 한가위 대목 밑에 손길이 닿아야 할 일이 잔뜩이다. 우리 가게에서 다듬어서 싱싱하게 내놓아야하는 살림이 잔뜩 밀렸는데, 이 일을 할 사람이 없다. 손이 제대로 나으려면 얼마나 묶어 두어야 할지 모른다. 조금 금이 가도 이렇게 일이 꼬인다.
《쫓기는 동물들의 생애》를 읽었다. 이 책은 있는 그대로를 들려준다. 글쓴이가 보고 듣고 겪고 만난 삶을 바탕으로 이야기한다. 뿔양 참새 곰 쇠오리 강아지 캥거루쥐 코요태가 나온다. 이 가운데 내가 본 짐승은 참새와 강아지를 겨우 꼽지만, 가까이에서 어떻게 지내는가를 들여다보지는 못 했구나 싶다. 이름은 알고 보기는 했어도 정작 삶을 볼 생각을 안 한 셈이다.
이 책에서 뿔양 이야기가 가장 먹먹하게 와닿았다. 뿔양으로서는 늘 싸움이 이어지는 삶 같다. 작은 발굽으로 바위를 움켜쥐고, 돌처럼 뻣뻣이 버티고, 힘센 짐승이 지나가길 기다리거나 이쪽저쪽으로 뛰거나 넘거나 웅크리거나 숨거나 멈춘다. 숨고 또 숨고 자꾸 숨는 길을 알아가야 한다.
어니스트 톰슨 시튼 님은 여러 짐승이 겪는 일을 차근차근 들려준다. 그런데 그냥 쓸 수 없는 글이다. 온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기에 가만히 바라보고 살펴보고 지켜보았을 테고, 이 눈길이 글길로 사랑스레 피어난다.
그렇다고 이분이 목소리를 높이지는 않는다. 목소리를 안 높이고, 그저 숱한 숲짐승 삶과 살림과 하루를 들려줄 뿐이다. 이 짐승은 숲에서 이렇게 살아가고, 저 짐승은 들에서 저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고스란히 옮긴다. 아, 글이란 이렇게 쓰기에 빛날까? 이웃을 헤아리는 마음은 이렇게 담아낼 적에 눈물겹도록 아름다운가?
무리를 지어서 살아가는 숲짐승은 거의 수컷 아닌 암컷이 이끈다고 한다. 어질고 슬기로운 길잡이는 으레 암컷이라고 한다. 암짐승은 새끼를 낳아 돌보기에 숲을 더 어질고 환하게 읽을는지 모른다. 갓 태어난 새끼를 오롯이 돌보고 키우자면, 숲살림을 꿰뚫어야 할 테고, 무엇을 먹고 안 먹어야 하는지를 어린 짐승한테 찬찬히 알려주어야겠지. 숫짐승도 새끼일 적에는 어미한테서 모든 숲살림을 배울 텐데, 새로 어미 자리에 설 적에는 암짐승이 무리를 이끈다는 대목을 새삼스레 돌아본다. 우리 사람은 어떤 삶과 살림일까? 아이를 돌보는 어머니와 할머니야말로 어질고 슬기로우면서 아름다운데, 막상 우리는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을 오래도록 맡아 온 어머니와 할머니를 낮보거나 얕보지는 않았을까?
뿔양한테서 뿔을 빼앗으려는 사냥꾼이 조금씩 다가와서 총을 쏘려고 한다. 사람은 뿔을 노린다. 뿔 때문에 뿔양은 목숨을 빼앗기고 뿔도 빼앗기고 삶도 빼앗긴다. 사람들은 왜 뿔양을 죽여서 뿔을 빼앗아야 할까?
그러고 보면, 오늘날에는 뿔양한테서 뿔을 사냥해서 빼앗지 않는다지만, 찻길을 내고 도시를 세우면서 모든 숲짐승이 살아갈 터전을 빼앗는다. 숲짐승을 괴롭히거나 죽이는 모습이 바뀌었을 뿐, 예나 이제나 비슷하다. 아니, 똑같겠지.
아픈 내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나는 왜 이 손바닥이 아프다고 들여다볼까? 손이 아프면 쉬면 될 텐데, 쉬기보다는 가게장사를 할 수 없어서 속이 쓰린 핑계를 찾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맞다. 나는 장사를 앞세웠고, 내 몸은 뒤세웠다.
눈을 읽고 비를 읽고, 숲과 들을 읽는 짐승처럼, 나도 하늘을 읽고 마음을 읽고, 또 글을 읽고 싶다. 하루를 살찌우는 마음으로 읽고 쓰고 싶다. 빼앗지도 빼앗기지도 않을 하루를 그리고 싶다.
2023.09.25.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