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의 길을 묻다, 로산진
박영봉 지음, 신한균 감수 / 진명출판사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작게 삶으로 033 차림맛



《요리의 길을 묻다, 로산진》

박영봉 

진명출판사

2010.4.15.



밥하고 글쓰기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에서 살려낸 형용사를 다룬 책을 사서 읽어 보았지만 어쩐지 허술했다. 지난해 어느 글을 읽다가 궁금해서 《요리의 길을 묻다, 로산진》을 산 적이 있다. 지난해에 읽을 적에는, 요리책처럼 그림이 있어 슬쩍슬쩍 지나갔다. 올해에는 좀 다르게 읽어 본다. 올해에는 그림은 건너뛰고 글만 곰곰이 새겨 본다.


어제는 짝꿍이 복숭아를 한 꾸러미 갖고 왔다. 겉은 말짱한데 깎으면 안이 검다. 가게에서 손님한테 팔 수는 없는 복숭아이다. 그렇지만, 먹어 보면 무르지 않고 복숭아맛이 부드럽고 달다. 다만, 겉으로 보기에 이미 썩어가는 빛깔 같아 입맛이 달아났다. 그냥 버리기에 아깝다고 여겨서 먹었다. 이튿날 배앓이를 했다.


복숭아 탓일까? 아니다. 복숭아 탓이 아니라, 탱주만 한 대추를 먹은 탓이라고 느낀다. 대추도 가게에서 시렁에 놓고 팔 수 없지만, 차마 버릴 수 없어 집으로 가져왔다. 겉보기에는 멀쩡하지만, 속에는 벌레알이 서렸다. 이 대추를 꽤 먹었다. 그리고 묵은나물도 손질을 해서 먹었다. 나물도 가게에서 팔 수 없다고 느껴서 집으로 가져왔는데, 과일도 대추도 묵은나물도 조금 시들거나 썩어가는데 “아까워! 아까워!” 하면서 먹었다. 아무래도 이 말과 마음 탓에 배앓이를 했다고 느낀다.


배를 살살 달래고서 며칠 지난 이레 앞서를 생각해 본다. 벗님이랑 낮밥을 먹고 커피로 입가심을 하는데, 벗님이 도시락을 꺼내더라. 뭘 꺼내 궁금해서 들여다보았다. 잿빛 보자기를 풀자 유리그릇이 나온다. 뚜껑을 열자 바알갛게 물든 감잎으로 덮었다. 뭘까? 감잎을 자리에 하나씩 놓고서 포도를 꺼내 얹는다.


보기에도 예쁜 감잎이 포도를 담는 그릇이 된 셈이다. 포도를 많이 먹지 않고 몇 알만 먹었는데 어찌나 배가 부르고 상큼하던지. 포도빛과 감잎깔이 눈을 거쳐 온몸으로 스민 듯했다. 


《요리의 길을 묻다, 로산진》을 돌아본다. 이 책에 나오는 로산진은 ‘그릇은 요리의 반쪽’ 이라고 말했단다. 무엇을 먹든 제 숨결을 살려야 한다고 했단다. 맛있게 차린 밥이 아니라, 무엇이든 맛있게 먹어야 한다고 했단다. 이러면서 다달이 어느 밥이 싱그러운지 밝힌다. 1월에는 새우와 석이버섯, 2월에는 우렁이, 3월에는 송어와 유채, 4월에는 대싹(죽순), 5월에는 잉어, 6월에는 은어와 돔, 7월에는 장어, 8월에는 소면과 가지와 강낭콩, 9월에는 무화과, 10월에는 고등어와 토란, 11월에는 버섯과 시금치와 돔, 12월에는 게와 새우 요리를 들려준다. 저마다 다르게 자라나고 살아가는 숨결이라고 한다. 바다와 숲과 들에 다 다르게 깃든 숨결을 기쁘게 누릴 적에 몸에 이바지한단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하나가 궁금했다. 집밥(가정요리)에는 참다운 삶과 마음이 있다고 말했고, 밥차림에는 멋이 있다고 말했다. 이런 로산진은 짝맺기(결혼)하고 헤어지기(이혼)를 다섯 판을 했단다. 느긋이 이어가는 보금자리가 아닌 나날이었다면, 이분한테 집밥이란 무엇이었을까?


가난해도 먹고, 가난하지 않아도 먹는다. 잔칫밥을 차려야 혀로 맛을 느끼지 않는다. 우리는 저마다 혀와 입과 몸을 품고서 태어났다. 나는 여태까지 어떤 밥을 먹었을까? 나는 이제까지 어떤 밥을 차려서 짝꿍하고 아이들하고 누렸을까? 나는 오늘까지 어떤 글을 읽고 썼을까? 더 좋은 밥을 넘보는 마음처럼, 더 좋은 글을 써야 한다는 굴레를 쓰지는 않았을까? 버리기 아깝다고 여겨 억지로 먹다가 배앓이를 하듯, 보기좋게 꾸미려다가 허울만 가득한 글을 쓰지는 않았을까?


벗님은 두런두런 수다를 떠는 자리에 감잎을 몇 깔았을 뿐이고, 포도알도 조금 놓았을 뿐이다. 그런데 이 감잎 포도알은 눈도 마음도 몸도 틔워 주었다. 내 글은 감잎과 포도알을 닮아 갈 수 있을까? 내 글은 억지로 입에 욱여넣다가 배앓이를 하는 과일을 닮지는 않았을까?


흙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과일과 나물은 스스럼없이 흙으로 돌려보내자. 나는 내 밥을 차려서 즐겁게 먹자. 나는 내 글에 내 삶을 사랑으로 담아서 즐겁게 하루를 누리자.



2023.09.23.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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