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 - 양장본
법정스님 지음 / 범우사 / 1999년 8월
평점 :
절판


작게 삶으로 020 빈손


《무소유》

법정 지음

범우사

1976.4.15.



예전에 나온 낡은 판으로 《무소유》를 장만하던 날은 뛸 듯이 기뻤다. 나는 절에 다니지 않지만, 교회에도 나가지 않지만, 법정 스님 글이 그냥 좋았다. 스님 글을 읽으면서 나는 너무 많이 가졌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아이들을 키우는 동안 짐이 늘어났다. 어쩌면 법정 스님은 아이를 안 낳고 안 돌보셨기 때문에 ‘빈손’이나 ‘빈몸’을 얘기했는지 모른다. 배냇저고리를 입히고 기저귀를 빨고 포대기에 이불도 빨래하는 살림에 ‘빈손’이나 ‘빈몸’이기는 어렵다. 아니, 말이 안 되겠지.


그러나 아기가 맨몸으로 풀밭에서 뒹굴며 자란다면 빈손이나 빈몸이어도 된다. 아기가 맨발에 맨손으로 풀꽃나무하고 동무하며 자란다면 얼마든지 빈손이나 빈몸일 만하리라.


예전에 어느 이웃은 큰집을 얻고서 비싼 접시에 오백만 원이 넘는 침대를 사더라. 집을 잘 꾸며야 한다고 하던데, 나는 다르게 생각했다. 비싸면서 좋다는 것을 들여야 ‘살림’이지는 않으리라. 얼마 안 되더라도 길이나 멧골에서 꽃내음을 맡고, 이따금 꽃집에서 꽃 한 줌을 사서 집에 두면 넉넉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아이들하고 읽을 책에 돈을 아낌없이 썼고, 이제는 내가 읽을 책에도 돈을 즐겁게 쓴다.


《무소유》는, 무언가 가지려 하면 이 무엇에 얽매인다고 들려준다. 난을 키우다 보면 난에 얽매이고 마는구나 싶기에, 난꽃을 둘레에 선물했더니 홀가분해서, 이때부터 한 가지씩 버리기로 다짐했다고 들려준다. 붐비는 버스를 타면 ‘삶의 밀도’를 느낄 수 있어서 택시를 안 타고 버스만 탔다고 들려준다. 풋중이던 무렵 《주홍글씨》란 책을 읽다가 들켜서 태워야 했다는데, 책을 태우고 나니 번뇌도 함께 타버렸단다. 좋은 책은 거침없이 읽히는 책이지만, 더 좋은 책은 읽다가 자꾸 덮이는 책이어야 한다는데, 지식으로 쓴 글이 아니라 우주 입김을 받아서 적은 책을 읽을 때에는 오롯이 쉴 수 있다고 들려준다


법정 스님은 맑고 새파란 하늘인 날씨에 경전을 읽어도 어쩐지 가을하늘에 결례이지 않나 하고 생각했단다. 겨울이면 눈이 쌓여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이러한 소리가 책하고 매한가지라고 느꼈단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하루도 책읽기일 테지. 새벽부터 밤까지 땀흘려 일한 하루도 책읽기일 테지. 숨을 돌리면서 쉬는 날, 모처럼 짬을 내어 가까운 멧자락을 오르내리며 숲바람을 쐬는 하루도 책읽기일 테지. 가만 보면, 책읽기도 멀리 있지 않다. 손에 쥐느냐 안 쥐느냐는 그리 대수롭지 않다. 빈손이기에 더 훌륭하다거나, 빈손이 아니라서 덜 훌륭하다고 여길 수 없다. 어느 손이건, 스스로 오늘 하루를 짓는 마음으로 삶을 읽고 이야기하기에 스스로 즐거울 만하지 싶다.


요사이는 먹고사는 일로 또다시 아등바등한다. 우리 가게살림이 쉽지 않기도 하고, 작은가게에 일꾼을 두자니 버거워, 짝하고 나하고 둘이서 가게를 지키자니 몸도 힘들고 하루도 빠듯하다. 이러한 가게살림도 짐일까? 벗거나 내려놓을 짐일까? 스님이 아닌 사람은 빈손이기가 참 어렵다고 느낀다. 그래도, 빈손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 손에 오늘 하루를 즐겁게 짓는 마음을 얹고 싶다.



2023.08.25.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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