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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의 희망 - <월든>의 작가 소로우가 들려주는 숲의 언어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이한중 옮김 / 갈라파고스 / 2004년 5월
평점 :
절판
작게 삶으로 019 꿈꾸는 씨앗
《씨앗의 희망》
헨리 데이빗 소로우
이한중 옮김
갈라파고스
2004.5.12.
이제 새책으로 안 파는 《씨앗의 희망》이다. 2020년에 헌책으로 만났는데, 책에 적힌 값보다 이천이백 원을 더 치렀다. 웃돈을 치르는 헌책이라면 틀림없이 사랑받는 책일 텐데 왜 새책으로는 더 안 팔릴까. 이 책을 찾는 사람들은 꽤 있지만 많지는 않아서 새로 찍기는 어렵다는 뜻일까. 우리는 값지거나 아름다운 책에 선뜻 손길을 내밀지 않는다는 뜻일까.
어느 날 갑자기 씨앗이 궁금했다. 숲에 갈 적마다 열매를 몇 알씩 줍는 버릇이 있는데, “그런데 이 씨앗이란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숲에서 갖고 온 열매는 박바가지에 차곡차곡 담았다. 솔방울·동백·꽈리·도토리·쥐똥나무·노박덩굴·가시 칠엽수·연꽃씨에 여러 나무씨이다.
씨앗은 크기도 빛깔도 다르다. 우람하게 자라는 나무여도 씨앗 한 톨은 매우 작기 일쑤이다. 솔방울은 종이보다 더 얇은 씨앗이 켜마다 티없이 붙었다. 하나를 떼어내려니 날개가 부서진다.
씨앗은 언젠가 흙에 닿으면 눈을 뜰 때를 기다렸다가 깨어날 테지. 뒷산에 열매가 익어간다. 어미 나무가 하나같이 아기를 밴 듯하다. 이 씨앗이 곧 깨어나 새 나무뿐 아니라 풀도 되고 숲을 이루겠지.
2023년 유월에 대마도에 다녀올 일이 있었는대, 그때 대마도 꽃씨를 몇 자루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배를 타고 오가는 길에 살피니 ‘씨앗은 들여오면 안 된다’고 하더라. 몰랐다. 바깥씨(외래종)가 함부로 들어오면 우리 풀꽃이나 나무가 사라질는지 모른다. 거꾸로 대마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씨앗의 희망》을 읽다가, 내가 어린 날 누리던 놀이를 만났다. 어릴 적에 민들레 하얀 공씨를 입김을 불어서 멀리 날리기를 했다. 도깨비바늘 풀씨는 옷에 잘 달라붙어서 떼는 일이 귀찮았다. 박주가리는 씨앗이 뽀드득거릴 적에 먹고 마른 씨앗은 바람에 날려 보냈다.
몇 달 앞서 골짜기에 갔다. 너럭바위에 앉아 물을 구경하는데 바람이 불었다. 숲에서 노란 꽃가루가 바람을 타고 비스듬하게 무리를 이루어 날려갔다.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꽃가루가 이렇게 크게 덩이를 이루어 날아가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내가 입김을 불어서 작은 풀씨를 날리듯이, 바람은 꽃가루랑 씨앗무리를 날리는구나. 옷에 달라붙는 풀씨는 짐승 털에도 달라붙어 멀리까지 가는데, 어미 나무나 어미 풀이 넌지시 바람에 띄우는지도 모른다. 작은 씨앗과 꽃가루가 스스로 바람을 타는지도 모르고. 어쩌면 그저 바람이 알아서 데리고 가는지 모른다.
작은 씨앗도 스스로 생각을 하리라고 여긴다. 《씨앗의 희망》은 작고 날개 달린 씨앗은 바람을 기다리고 멀리 갈 꿈을 꾼다고 속삭인다. 날개 없는 풀씨는 사람이나 짐승 옷을 붙잡고 멀리 가는 꿈을 꾼다고 들려준다. 나무 열매는 하늘에 사는 새랑 땅에 사는 다람쥐한테 씨앗과 열매를 먹이로 내주면서 멀리 나아가는 꿈을 꾼다고 얘기한다. 새는 훨훨 날아가서 똥으로 나무를 심고 다람쥐는 먹으려고 땅속에 헛간처럼 모으고 씨앗이 자라기 알맞게 땅을 파서 심기도 한다지.
씨앗 하나를 날려 보내는 일에 하늘과 땅과 바다가 제 식구를 보내 사랑을 받고 태어나는 듯하다. 씨앗 하나도 사랑을 알고 받고 태어나 자리를 잡고 어미그루가 되기까지 해·바람·비·흙과 밤에는 달과 별이 맡아 이야기를 들려주니까, 어느새 꿈씨로 품고 나오지 싶다.
바람을 타고 물고기처럼 헤엄쳐 가는 작디작은 씨앗은 보드라운 껍질을 달고서 티끌처럼 작은 알갱이로 숲을 이루어간다. 놀랍다. 내가 먹는 쌀보다 더 작은 씨앗은 모두 이웃숨결이 도우면서 제 모습을 드러낸 뒤 빠르고 멀리 날아야 할 때를 알고, 서두르지 않고 오래도록 참으며 기다리는 마음을 안다. 새나 짐승이 좋아하는 씨앗과 열매가 있기에 씨앗을 퍼트릴 테지. 바위틈을 비집고 나올 만큼 힘센 숨결이 천천히 씨앗을 꿈꾼다. 우리 집 바가지에서 잠자는 씨앗도 흙을 만나면 살아날까. 풀꽃나무는 하늘에 뜬 해와 별을 닮은 듯하다.
2023.08.24.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