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티베트의 지혜
소걀 린포체 지음, 오진탁 옮김 / 민음사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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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001 엄마집에 갔다

 

티베트의 지혜

쇼걀 린포체 글

오진탁 옮김

믿음사

1999.2.1.

 

티베트의 지혜2010.7.11. 장만하고 이날은 꿈속의 고향(드보르작)’이란 노래를 들었다. 이 책을 처음 편 날 엄마집에 갔다. 경북 의성 시골에 내도록 살아가는 우리 엄마는, 이날 비가 와서 들일을 못 가고 물리치료를 하러 병원에 갔는데, 마침 병원이 쉬는 날이라 헛걸음하고 버스삯만 날렸다고 투덜거렸다. 이날 할아버지가 마늘 묶는 곁에서 재밌게 보던 막내는, 할아버지 손놀림이 재밌다면서 굵은마늘 작은마늘을 고르면서 놀았다. 개구쟁이처럼 잘 노는 막내한테 어릴 적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막내만 하던 어린 날, 할머니 할아버지 몰래 마늘하고 얼음과자를 바꿔 먹으면서 놀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러고서 두 해 뒤인 2012년에 대구로 집을 옮겼는데, 그때 이 책 하나를 챙겼다. 어느덧 열세 해가 지나서 다시 펼친다. 삶과 죽음과 되살림(환생)을 다루는 줄거리를 돌아본다. 태어나서 터트리는 울음은 어떤 뜻일까. 그런데 어쩐지 뭔가 뒤섞인 듯한 얼거리이다. 삶이라는 너른길과는 달리, 붓다에, 달라이 라마에, 린포체에, 밀라레파에, 릴케에, 윌리엄 블레이크에, 자꾸 다른 사람들 말을 따오면서 글을 엮는다. 죽음이 삶 가운데 하나라는 말을 자꾸 들려주지만, 어쩐지 입으로만 읊는 말처럼 붕뜨는구나 싶다.

 

나는 왜 경북 안동에서 대구로 옮기던 그해 그날, 이 책 하나만 챙겼을까? 아무래도 그해 그날, 내 마음은 더없이 어둡고 앞날이 캄캄했구나 싶다. ‘죽음을 낡은 옷 갈아입는 길로 알아가면서 더 아등바등 살아남으려고 했지 싶다. 몸이 여려 자꾸 앓으면서 쪼그라들어 주저앉고 싶은 나날이 헤아릴 수 없었다. 몸을 어느 만큼 추스르면서 천천히 다시 태어나는구나 하고 느꼈다. 하루를 다시는 어둡게 생각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글을 쓰면서 내 어둠을 내가 스스로 씻고 걷어내자고 생각했다.

 

삶이란, 삶에, 숨을 불어넣는 글길이 있다. 죽음이라는 말은 어두운 듯싶어도 어둠을 부르는 말은 아니지 싶다. 스스로 밝은 숨결을 노래하기에, 스스로 말씨가 밝게 퍼지지 싶다. 하루를 사랑하고 이 한때에 온마음을 기울이자고 생각한다.

 


40쪽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93쪽 구름은 단지 거기에 그렇게 걸려 있다가 다소 엉뚱하게 아무 사심없이 지나가버린다. 구름은 어쨌든 하늘을 더럽히거나 오염시킬 수 없다.


162쪽 카르마는 시간으로도 불로도 또는 물로도 파괴할 수 없다. 카르마는 그 힘이 무르익 을때까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2023.07.21.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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