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2 고양이 시리즈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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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년 됐나? 새벽에 일을 마치고 남은 교통편이라곤 택시뿐이라서 마침 대로변에 주차해 있는 택시 문을 열고 행선지를 얘기했더랬다. 그랬더니 기사분 하시는 말씀이 '들어와 앉아서 얘기하지 왜 그렇게 어렵게 서서 얘기해요?' '아, 가끔 안 가겠다고 하는 택시도 있어서요.' '타세요. 원래 그러면 안 되는데 일부 그러는 기사들이 있어요.' 사실 승차 거부와 그로 인한 불만을 많이 들어왔던 터라 나 역시 택시에 대한 인식은 그다지 좋진 않았었다. 하지만 10년 전 쯤 장사를 시작하고서 늦은 밤이나 새벽녘에 술 마신 사람들(나랑 아무 관련 없는 타인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아졌고 그 뒤로 내 생각은 많이 바뀌게 됐다. 때론 피하는 게 상책이다. 그것이 승차거부라 하더라도. 물론 승차거부가 꼭 술과 관련된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타인의 즐거움이 곧 내 즐거움이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고 최소한 그 부분만큼은 기사분들 심정이 이해가 되더란 얘기다.


시작부터 택시 얘기만 한 가득이다. <고양이>에 등장하는 주요 캐릭터가 택시 기사던가? 아니다. 단지 '이해'와 관련된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해야만 그나마 자그마한 변화라도 가능하다는 거. 하지만 그걸로 충분할까? '내가 당해보니 기사분들 심정이 이해돼요. 그러니 계속 상황 봐서 승차 거부하셔도 됩니다. 언젠가는 잡아타겠죠. 아님 걸어가든가.' 또는 반대편 기사분 입장에선, ' 나도 술 마셔봐서 아는데 원래 그래. 술이 들어가면 지금껏 받았던 스트레스가 분노와 허세로 만발하거든. 그러다 취하면 개 되는 거지. 이해한다고. 하는 짓이 다 그렇지 뭐..' 이해만 하고 바뀌는 게 없다면, 중요한 발걸음은 떼었지만 정작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다. 적극적 소통 없이 회의와 불신에 머문다면 잘해야 자비로운 부처님 가운데 토막들로 이루어진 사회가 될 뿐이다. 소설 속 고양이 피타고라스는 인터넷을 통해 인간의 지식과 경험을 받아들여 어떤 고양이보다 인간에 대한 이해 정도가 높다. 그는 위기에 빠진 세상에서 자신의 특징을 살려 다른 종들과 화합을 꾀하는 기초를 제공하지만 막상 인간을 믿지 못한다.


"만약 인간들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어쩌지?"(책 본문 중)


그래서 그는 향후 지금보다 주체적인 고양이 세상을 계획한다. 그의 의문 저 너머엔 이런 의미가 숨겨져 있을 수도 있다.


"진화는 물고기, 공룡, 인간의 방향으로 진행돼 왔어." 갑자기 피타고라스가 경배자들을 가리키며 말한다. "인간 다음은 누굴까?"(책 본문 중)


다른 주요 캐릭터 중 하나인 고양이 바스테트는 피타고라스와 대화를 나누면서 새로운 세상을 접하게 된다. 피타고라스의 제자이자 연인이면서 조력자인 바스테트지만 그는 피타고라스와 다른 선택을 하고자 한다. 자신만 가능한 쌍방향 소통을 통해서 반복되는 실수의 여지를 줄여 보겠다는, 그래서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인간을 집사로 두고 삶을 영위하면서 인간을 포함한 다른 동물들과 함께 (2보 후퇴 후) 다시 3보 전진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선택. 변화의 가능성이 큰 쪽은 어디일까?


사람들은 현재 여러 방면에서 다양성을 강조하지만 실제론 알게 모르게 그 다양성을 거부하는 세상에서 사는 중이다. 누구나 가슴 속에 다른 세상을 품을 수 있지만 그 세상을 있는 그대로 봐 주길 바라는 게 정말이지 어려운 현실이다.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인 소통이 필요한 시기다. 서로가 지닌 세상을 이해하고 그 간격을 좁힐 수 있다는 믿음 또한 필요하다. 어디 그 뿐인가. 소통을 위한 적절한 수단과 요령도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고양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인간과 다른 동물들을 바라보는 이 책은 제목만 고양이일 뿐이지 사람들의 얘기나 다름없다. 너무나 다른 고양이와 사람, 개, 쥐 등이 한데 뭉쳐 다양한 상호 작용을 보여주는 이야기엔, 결국 다른 종만큼이나 간극이 벌어진 다양한 사람들이 때론 같은 언어를 쓰면서도 서로 이해하지 못해 충돌하고 때론 소통에 성공해 기뻐하는 모습이 투영된 셈이다. 그렇다면 개인적으론... 인간다운 고양이 피타고라스보다 고양이다운 고양이 바스테트의 선택을 더 응원해본다. 인간다운 고양이가 만든 고양이 세상은 왠지 지금과 별 다를 것 없어 보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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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100년 후 - 22세기를 지배할 태양의 제국 시대가 온다
조지 프리드먼 지음, 손민중 옮김, 이수혁 감수 / 김영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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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예측할 때 상식은 거의 어김없이 우리를 배반한다

(본문 중에서)


2009년에 이 책이 출간됐으니까 ‘100년 후’라는 제목대로라면 대략 21세기 초부터 22세기가 시작될 때까지 국제 상황을 예측해 놓은 셈이다. 이제 10년 지났으니 아직 90년이 남았고, 따라서 책의 내용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에 이른 감이 있다. ‘지정학’과 ‘인구’라는 두 가지 요소를 바탕으로 예측을 전개했고, 그 방향성은 많은 사람들이 수긍할 만하다. 다만 작가도 언급했지만 권력이 역사를 만들어 간다는 점에서 볼 때, 최근 수 년 사이 등장한 독불장군 스타일의 권력자들로 인해 그 전개가 속도 조절이 될지 아니면 방향이 아예 틀어질지는 두고 볼 일이다.


어찌 됐든 국제 역학이나 정치에 관심이 있다면 책의 내용이 비교적 쉽게 다가오지 않을까 한다. 21세기 중반 이후 내용은, 특히 전쟁과 관련된 부분은 정말 그럴까 싶기도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지금부터 30년 뒤에 일어날 일이니 그 사이 어떤 변화가 생길지. 1980년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아이들이 아빠 심부름으로 담배를 사러 다녔고, 물은 집에서 보리차를 끓여 먹었더랬다. 그런데 1990년엔 이미 담배 심부름은 도덕적으로 비난 받을 짓이 됐고, 물은 페트병에 담겨 마트에서 사고파는 물건이 되었다. 우리가 당연하다 여기던 것들의 유효기간이 10년 정도라면 앞으로 30년이 흐르는 사이 중국과 러시아가 몰락하고 우리나라가 통일이 된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닐 듯하다. 10년 후 이 책을 다시 읽게 될 때, 그로부터 10년 후에 다시 읽어볼 생각을 하게 될지, 그냥 책장 속에 묻고 잊게 될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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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어스시의 이야기들 - 어스시 전집 5 어스시 전집 5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준영 외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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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벗이여. 무엇을 하려, 무엇을 배우려 하시는 겝니까? 저 아가씨가 누구이기에 그녀를 위해 이런 요청을 하십니까?

우리가 누구이기에 그녀를 거부하겠소, 그녀가 무엇인지를 알지도 못하면서?


(책 본문 중에서)


격렬하다 못해 과격하기까지 한 변화의 시기, 게다가 물음표보단 느낌표가 대세인 요즘, 무턱대고 앞으로 나아가다가도 한번쯤은 속으로 되짚어볼만한 문장인 듯싶다. 그렇게 되새기고 나면, 어쩌면 아주 조금은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그러려니 하며 지내왔던 수십 년, 또는 그 이상의 세월을 이겨내기 위해선 무언가를 이해해보려는 의도를 갖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런 의도가 있다면 무책임한 말과 행동을 일삼는 정체불명의 ‘우리’ 속으로 ‘나’를 내던지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어스시 다섯 번째 작품인 <어스시의 이야기들>은 5개의 단편과 어스시의 세계관을 기록한 하나의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단편들은 개별적인 이야기를 꾸려가지만 앞선 네 편의 작품내용 중 당연히 여겼던 것들이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으며 다가올 미래에는 많은 부분 변화가 생길 것임을 암시한다. 묘하게 정적이면서 본질을 탐구하던 판타지가 이제 드디어 모든 걸 뒤흔들어 깨부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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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제국의 위안부 : 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
박유하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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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란 도대체 어떤 이들일까. 아직 어린 10대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본군에게 강제로 끌려'가 노예처럼 성을 유린당한 조선의 소녀들. 우리가 아는 위안부란 그런 존재다.

(책 내용 중에서)

 

참 불편한 내용이다. '우리'의 역사를 다루면서 마치 제3자가 아무런 감정 없이 들여다보듯이 모든 면을 들추어내는 느낌이다. '우리'가 아는, '우리'가 받아들이는 식민지의 역사는 저항의 역사다. 일본 제국주의가 있고 그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던 친일파와 그들에 대항했던 투사가 있는, 양 극단만 도드라지는 그런 역사. 그런데 이 책은 다른 면을 이야기한다. 양 극단이 아닌 그 사이에 존재했던 입장들. 그 중에서도 비자발적이었다 하더라도 식민지란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동지적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었던 입장들을 말이다. 게다가 그 관계가 하필이면 위안부란 존재들과 엮인다. 일본을 얘기할 때 현 세대에 이르기까지 독도와 함께 '우리'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단어가 바로 위안부 아니었던가. 그래서 더욱 불편하다. '우리'의 시각뿐만 아니라 일본 정부의 입장에 대해서도 비판을 하면서 나아갈 길을 모색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편함이 덜어지는 건 아니다. 그런데 불편하다고 해서 무시하고 더 나아가 아예 뭉개버리는 건 또 옳은 일일까? 국회의원을 풍자한 개그맨을 고소했던, 또는 그 비슷한 이유로 고소를 남발했던 어떤 이의 행위를 조롱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위안부에 대해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해서 법이란 제도적 틀에 의해 그 의견을 묵살하려는 것은 과연 적절한 대응일까? '우리'와 다른 의견이나 태도에 분노하고 반박하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또 그래야만 한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 아예 입을 닥치게 만들려 하는 것은 적절한 대응으로 보이진 않는다. 그렇게 하려다가 지금 어떤 분이 저 위에서 난감해하고 있는 곳이 이 땅의 현실이기도 하지 않은가.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이 책은 불완전하게 나와 있다. 지은이가 제시한 자료의 신빙성, 대표성 여부가 이 책의 내용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한지 어떤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그 자료를 바탕으로 다른 의견을, 그것도 아주 불편한 내용을 제시했고 그 때문에 여러 모로 아주 곤욕을 치르는 중이란 거다. 그 곤욕 중 하나인 법에 의한 판단, 어찌 보면 제도적 틀에 의한 묵살을 시도한 거나 다름없는 행위는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본다. 하나의 답만을 요구하는 건 학창시절 시험만으로 충분하다. 삶에 있어서 답이 없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고 다른 답을 내놨다고 해서 처벌받아야 한다면 그 사회에 속한 '우리'라는 존재가 얼마나 무시무시할지는 두말 할 필요가 없다.

 

무엇보다 문제는 이런 질문들이 오직 하나의 정답만을 찾도록 하는 단답형 질문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 있다. 그래서 이런 질문들은 상황에 대해 '왜'를 묻거나 '또 다른 상황'을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는다.

(책 내용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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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이방인 (한글판) 더클래식 세계문학 25
알베르 카뮈 지음, 베스트트랜스 옮김 / 더클래식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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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왜 생애가 사그라져 가는 그때에 ‘ 약혼자’를 둔 것인지 왜 다시 시작하는 놀이를 한 것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생명이 꺼져 가는 양로원 근처에서도 저녁은 서글픈 휴식 시간 같았다. 그토록 죽음이 가까운 시간에 엄마는 거기서 해방감을 느꼈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보고 싶어졌던 게 틀림없다.

                                                                                     (책 본문 중에서)

 

잠을 자다 문득 깨어났다. 춥다.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려 덮었는데도 한기가 느껴질 정도다. 몸살기가 있었는데 제대로 시작된 모양이다. 침대에서 나오다가 손이 맨살에 닿았는데 진저리가 쳐질 정도로 차다. 몸은 열이 나서 체온이 높을 텐데 몸에 닿는 모든 게 얼음알갱이 같다. 불덩이가 감각이 있는 생물이라면 자신에 닿는 모든 것을 불사를 때 얼음장 같은 차가움에 치를 떨까? 상대적인 감각들. 그리고 당연하면서도 무언가 미묘하게 어긋나있는 현상들.

그런 것들이 참 많다. 너무나 당연한 듯이 가지고 있어서 보통 그 존재를 의식조차 못하다가 그것을 잃거나 그 극단의 무엇과 맞닥뜨렸을 때 비로소 자각하게 되는 것들. 주인공은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무엇을 깨달았던 걸까? 어떤 삶이든 그것만으로 소중하다는 거? 방식은 다르지만 누구나 영유하는 삶 그 자체? 어느 순간부터 '그저' 살아가는 중인 나로선 그가 무엇을 깨달았는지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먹고 살다 보니 일과 시간에 치여서 나에 대한 자각조차 사치가 되어버린 세상. 사람들은 어쩌면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완벽한 이방인이 되어 가는 중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요즘엔 나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예전에 엘리베이터를 타면 양쪽에 거울이 있어서 수많은 내가 쭉 나열해서 나를 바라보곤 했다. 그렇게 한참을 혼자 보고 있으면 나란 존재를 가끔은 인지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가 있었다. 요즘? 엘리베이터 안에 모니터가 설치된 이후부터 그것만 보고 있다. 아마 거울 속 수많은 나도 똑같이 그럴 것이다. 자기 자신을 외면한 채로. 춥다. 아직도 몸살 기운이 남아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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