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참 좋은 날이었다. 하늘색 하늘과 쨍한 햇빛과 하얀 구름. 구름의 존재감이 어느 때보다 도드라지는 날씨. 남자는 베란다 창을 통해 고양이와 함께 밖을 내다보는 중이다. 그때 비둘기가 창 바로 앞을 지나 윗집 에어컨 실외기 받침대에 앉는다.


까각 까각 까가가각 (고양이 채터링 소리. 솔직히 그 소리를 뭐라고 적어야 할지 모르겠음)

오오! (남자가 놀라는 소리)


고양이가 앞발로 베란다 창을 짚으며 몸을 일으킨다.


아서라, 고양이. 벌레도 못 잡는 게 무슨 비둘기를. 쪼인다, 쪼여.

냐아웅.


연이어 비둘기 두 마리가 바로 앞을 지나 옥상 쪽으로 사라진다.


냐아옹, 냐아웅.

오오! (남자가 또 놀라는 소리)


남자는 돈 냄새를 맡고 이때다 싶어 말을 내뱉는다.


너 인마, 이 정도면 돈 내고 봐야 하는 거 아니냐?

... (무시)


고양이, 양심이 좀 있어봐라. 그럼, 나 없는 동안 바닥 청소라도 좀 해놓던가.

... (또 무시)


너는 내 말이 들리기는 하니?

... (그냥 무시)


남자는 생각해 본다. 아무래도 오늘 옷을 잘못 입었어. 이런 옷을 입고 고양이한테 투덜대봤자지.


날씨 참 좋네, 그치?


(옷에 프린팅된 고양이와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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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이는 울 때, 정확히는 아니더라도 대략 ‘야옹’이란 발음으로 운다고 생각했었다. 그 기대는 이 녀석을 입양한 순간 무참하게 깨졌다. 녀석은 울 때 앞에 ‘응’이 붙는다. 간혹 ‘야아옹’이라고 우는데 그건 내게 불만이 있거나 원하는 게 있을 때다. 고양이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르던 초보 집사 시절이었다. ***


아~앙. 오~옹. 이건 아닌 거 같은데, 냥. 으~응. 역시 이게 제일 낫지? 고양이라고 꼭 ‘냐옹’, ‘야옹’이라고 딱 부러지게 울 필요는 없지 않겠어? 으~응. 그래, 그래, 이거야. 입 벌릴 필요 없이 소리도 낼 수 있고. 이게 딱이지. 아저씨도... 앗, 벌레, 벌레! 에잇, 받아랏! 킁킁. 어라, 어디 갔대? 내가 코를 들이밀 때까지만 해도 여기 있었는데. 내 눈을 피할 수 있을 거 같냐? 냥. 없네. 쩝. 그러니까... 뭘 하고 있었더라?


아! 아저씨가 은근 저 소리를 좋아하더라구. 까까 줄 때 나도 모르게 응응응응 소리를 내며 쫓아갔는데 그때마다 헤벌쭉한 걸 보면, 확실히 좋아해. 지난번 하수구 뒤졌을 때도 으응, 으응 몇 번 했더니 웃으면서 넘어갔거든. 어차피 사고는 계속 칠 거고. 아깽이가 사고를 안 치면 고양이 명예에 똥칠을 하는 거지, 그럼. 그니까 어떻게든 혼나지 않고 넘길 방법을 찾았다 이거야. 으~응. 응깡! 응응응응응. 자, 울음소리는 이만하면 됐고.


이젠 자세! 배를 보이며 오른쪽으로 뒹굴. 다시 왼쪽으로 뒹굴. 오른쪽으로 갈 거 같다가 왼쪽으로 뒹굴. 사정없이 비비 꼬고. 삐삐삐삐삑~ 오, 밥 나오는 소리닷! 밥을 먹자, 밥을 먹어, 냠냠냠. 냠냠냠. (쿵!) 아우 씨, 깜짝이야! 여긴 어떻게 된 게 사방팔방에서 소리가 들려? 자, 밥 먹었으니까 몸단장 좀 하고, 또 연습을 합시다. 이리 뒹굴. 저리 뒹굴. 와, 집고양이로 사는 게 쉽지 않네. 다 때려치울까? (찰칵, 열쇠 돌리는 소리) 어, 캔따개... 아니, 아저씨다!


월아, 아저씨 갔다 왔다! 집에서 뭐 하고 있었어? 아저씨 보고 싶었어?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 알면 깜짝 놀랄걸? 모르는 게 좋아. 그건 그렇고, 받아랏, 내 애교를! 으~응. 으~응. 뒹굴. 뒹굴. 까까 주라! 그럼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는 얘기 안 해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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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의 시대다. 내 부모님 세대는 살기 위해서 소비했다. 먹거리를 사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맸다. 소비는 곧 생존이었다. 그 자식 세대에게 소비는 사치이자 여유였다. 아등바등 먹고 살지만 그래도 좀 쓰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냐는 사고방식이다. 그것이 합리적 소비란 모순적인 단어 조합으로 이어지고, 현재 30대부터는 소비가 필수인 시대가 되었다. 살기 위해 소비하는 게 아닌, 소비하기 위해 돈을 벌고 살아가는, 어찌 보면 내 부모 세대보다 더 전투적인 삶의 방식. 소비하지 않으면 내 존재를 드러낼 수 없는 시대다.


물건만 소비하는 게 아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소비 대상이다.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게다가 빠르고 압축된 세상의 흐름은 그 모든 소비를 짧고 강렬한 이미지로 남긴다. SNS의 사진들, 짧은 영상들, 썸네일을 통해 지식, 정보, 역사 등이 그 무겁고 가벼움을 떠나 몽땅 찰나의 순간에 액기스처럼 짓뭉개진다. 사람들은 원래 선배들(거인들)의 어깨를 밟고 서서 세상을 변화시켰다. 발밑에서 느껴지는 건 불안함과 안정감, 둘 모두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저 팔랑팔랑. 순간에 압축된 강렬함은 휘발성마저 강해서 밟고 설 어깨조차 없는 듯하다. 공중에 나부끼는 비닐봉지처럼 안정감도, 불안함조차도 없다.


얼마 전(벌써 한 달 전), 스타벅스로 인해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1980년 5월의 광주를 난 모른다. 국민학교도 입학하기 전, 아버지는 광주에 사는 작은 아버지와, 광주에서 1시간쯤 떨어진 곳에 사는 큰아버지를 걱정하며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셨다. 내가 기억하는 장면이라곤 그뿐이다. 다행히 내 친척들은 그 시기를 무사히 넘겼다. 그리고 스타벅스 소동이 있기 몇 주 전, 큰누나로부터 광주에 사는 작은아버지 딸이 술을 마시고서 그때의 얘기를 주정처럼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남자는 돌아다니면 다 잡혀간다면서 오빠나 동생이 아닌 자신이 밖에 나가야 했다고. 얼마나 무서웠고 얼마나 서러웠는지 아냐고. 난 그 무서움과 서러움 역시 잘 모른다. 하지만 그게 상처라면 굳이 건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쯤은 안다. 우리 주변엔 단순한 신세 한탄이 아닌, 삶을 뒤흔들 만한 상처를 받은 자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아직 50년도 지나지 않았다.


실수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이 시대가 모든 걸 가볍게 소비하게 만드니까. 하지만 그 실수를 틈타 정치 논리를 빌미로 조롱과 혐오를 이어가는 건 뭘까? 단순히 정치와 이념이 우리 사회를 특정 방향으로 몰아간다고 봐야 할까?


계산대에서 인사를 한다. 누군가는 눈을 마주치면서 그 인사를 받지만, 대부분은 그냥 흘려보낸다. 물건을 고른 손님이 계산대에 상품을 올려놓는다. 멤버십 카드가 있냐고 질문을 해보지만 반응이 없다. 귀에 이어폰을 꽂아서 상대방이 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까. 그러려니 하면서 쭉 진행하고 마지막으로 안녕히 가시라는 인사를 전한다. 내 말은 여전히 목적지를 찾지 못한 채 공기를 떠돌다 소멸한다. 다음 손님을 응대하려다 앞선 분이 신용카드를 두고 간 것을 알고 불러보지만, 그 역시 들릴 리 없다. '나'만 존재하는 세상. 쿨하지만 배려가 사라지고 '내 목소리'만 듣는 세상. 정말 정치와 이념이, 시스템이 세상을 망치고 있는 걸까?


꼬리말) 젊었을 땐 시스템에 모든 분노를 퍼부었다. 모든 부조리와 불합리는 시스템의 탓이었고, 사람들은 그 압박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존재들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편했던 거 같다. 그러니까... 모르진 않았었단 얘기다. 지금은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다. 사람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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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놀이 중이다. 일명 쥐꼬리 잡기. 깃털이나 어떤 물체를 위에서 덮어 가리고 그 끝을 살짝살짝 내어 보이면 고양이가 그걸 잡겠다고 앞발로 툭툭 치거나 달려와 덮치는 놀이. 엉덩이를 실룩대며 점프해서 덤벼들기도 하고, 갑자기 작전상 후퇴인 건지 후다닥 안방으로 달려 들어가기도 한다. 얘기를 들어보지 않아서 왜 그런지 이유는 모르겠다만. 그러다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졌다.


그동안 고양이가 쌓아 올린 이미지는 이렇다. 마루 저 끝에서 지켜보다가 내가 노트북을 끄면 신나게 뛰어오거나. 최애 간식을 먹을 때면 나보다 앞서 간식 그릇이 놓일 자리로 종종종 뛰어가거나. 장롱 위로 올라가겠다고 야심 차게 점프했다가 근처에도 못 가고 떨어지거나. 그래 놓고 창피했는지 느닷없이 방 밖으로 뛰어나가거나. 코끝에 붙은 벌레를 찾지 못해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거나. 장난감에 얻어맞고 무서워서 도망 다니거나. 대략 귀엽고 하찮은 녀석. 그런데 입양 전 처음 이 녀석을 봤을 때 색깔 때문인지, 내 얕은 지식 탓인지 하필이면 검은 재규어를 떠올려버린 것.


시작은 그냥 실소였다. 깃털 잡다가 갑자기 귀 바짝 붙이고 낮은 자세로 후다닥 뛰어 후퇴하는 녀석을 보는데, 동물의 왕국에서 봤던 고양잇과 맹수들의 뜀박질이 떠올랐거든. 어떤 맹수들과 비교해도 너무 가당찮은 가벼움에 내 웃음마저 사뿐히 입가에 걸쳤을 뿐이었다. 그러다 떠오른 게 톰과 제리. 마루에서 미끄러지며 잔발로 달리는 게 영락없는 톰과 제리의 추격전 뜀박질 모습이었다. 미소가 커다란 웃음으로 변했다. 다시 뛰어나온 녀석이 내 웃음소리에서 놀림거리가 되었다는 걸 느꼈는지 ‘으응’ 소리를 내더니 저쪽으로 달려가 버린다.


미안, 미안. 널 보고 재규어를 떠올렸던 것도, 톰과 제리를 떠올렸던 것도 다 내 잘못이다. 사과는 해보지만 나 자신도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 웃음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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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가 구석에서 마루 전체를 조망 중이다. 벌레를 노리는 게 아니다. 지금은 윗집 수리로 발생하는 소음 때문에 경계한다고 보면 될 듯. 타고난 천성이 조심스러운 녀석이라 불안한 심정으로 영역을 바라본다. 내가 무슨 말을 해봤자 당연히 소용없고, 그저 아무 일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행동하는 수밖에 없다. 스스로 이겨내야 하겠지만 집수리란 개념은 고양이에겐 이해할 수 없는 범위니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겠지. 그래도 조금씩 적응하는 모습이라 다행이긴 하다. 첫날은 온종일 침대 밑에 숨었고, 둘째 날은 낮은 포복으로 들락날락하다 셋째 날부턴 더는 숨지는 않는다. 하늘이 무너지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깨달은 모양. (5월 초에 썼던 글)


얼마 전 글에서 천장에 난 틈 얘기를 적은 게 있었다. 사실 그게 끝이 아니다. 당시 난 버티곤 있었지만, 심리적으로 굉장히 불안정한 상태였다. 긴장과 불안과 두려움이 모든 생활 영역으로 스며들던 때. 그때 눈에 들어온 게 집 곳곳에 생긴 금이었다. 쩍 벌어진 금부터 미세한 실금까지. 지은 지 20년이 넘었을 테니 건물에 금이 가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내 불안은 수많은 금을 포착했고, 그 사이로 스며 들어 집안 전체를 장악했다. 길가에 자리 잡은 집이라 바로 앞 도로로 버스가 지나다녔는데, 그럴 때마다 도로변을 향한 창문이 울리곤 했었다. 그렇게 모든 현상이 모여 나를 짓눌렀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쪽으로 계단이 있다. 계단을 오르면 왼쪽 담벼락에 선명하게 가로로 금이 가로지른다. 오른쪽으로 꺾어서 다시 계단. 왼쪽 건물 벽면에 자잘한 실금들이 내 진행 방향을 따라 퍼져 나간다. 바로 위쪽에 내 방 창문이 있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한다. 실내에 들어온다고 달라질까? 내가 들어온 곳이 균열로 둘러싸인 곳인데. 잠시 앉았다 일어나서 벽 쪽을 향한다. 벽지 뒤로 대각선 방향의 금이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손끝으로 금을 따라 벽지를 만져본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 일도 안 일어나.


지금 생각해 보면, 놀랍게도 나 자신을 집에 투영시키고 있었다. 무너질 거라는 두려움, 버텨야 한다는 절박함. 어쩌면 그게 나일 수 있다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회피한 것일지도 모른다. 생각에 잠겨 있다 정신을 차려보니 고양이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 여전한 소음, 여전히 구석 자리. 문득 떠오른 마법 주문을 외쳐본다. 통하려나?


“까까?”


통한다. 역시 녀석에겐 까까가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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