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좋아하는 누나는 나보다 스무 살이 많다. 남편이 벌어온 돈으로 자식들 키우고 예금이나 적금이 유일한 투자 수단이었으며 느지막하게 자기 집을 마련해 삶을 꾸려왔다. 알뜰하게 아끼고 필요한 것만 지출하면서 허리띠 졸라매며 살아온 세대다. 그 자식들은 이제 40대. 모두 가정을 꾸렸지만, 삶의 방식은 완연히 다르다. 예·적금 보단 주식을 투자 수단으로 이용하고, 인터넷을 통해 최저가를 검색해 구매하지만 쓸 건 쓰면서 사는 세대다. 그래서 가끔 충돌이 생길 때가 있다. 누나는 롤러코스터 같은 주식의 아찔함을, 쓰면서 살겠다는 소비의 쾌감을 이해하지 못한다.


오늘따라 산길에 파리가 많이 꼬이네. 손을 휘휘 휘저으며 다시 상념에 빠져든다. 2~30대는 또 다른 듯하다. 주식, 코인, 경매 같은 부동산 시장까지. 투자에 대해선 훨씬 적극적이다. 소비 역시 그렇다. 누나의 관점에서 본다면, 자신들은 벌이에 맞춰 삶을 꾸렸지만 요즘 세대들은 소비에 맞춰 벌이를 추구하는 양상처럼 보일 것이다. 일반화시키는 건 아니다. 예전에 비해 요즘 세대의 다양성은 확실히 풍부해 보이긴 하니까. 맞고 틀리고 그런 문제가 아니라 시대의 흐름이라 생각한다. 소비의 시대. 재테크의 시대.


정상에 도착했는데 고양이들이 없다. 비가 올 거 같아서 일찍 나왔더니 때를 잘못 맞춘 모양이다. 쯧. 언젠가부터 실질 수익률, 실효 수익률이란 표현이 등장했다. (같은 뜻인가?) 단순히 돈을 버는 게 문제가 아니라 물가 상승을 고려해서 벌어야 한단다. 이러면 예·적금은 투자가 아니라 소극적이고 때론 멍청한 돈 관리법이 된다. 다른 사람은 주식으로 돈을 버는데 나는 예·적금이나 하고 있어도 되는 걸까? 누군가는 코인으로 수억씩 챙겼는데 나는 주식으로 몇백 버는 게 제대로 하는 걸까? 시선은 언제나 외부로 향한다. 그저 모으고 버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나보다 더 버는 사람이 있다면 기준은 득달같이 그쪽으로 달려간다. 더 스마트해야, 더 잘해야 하는 세상.


내려오는 길, 발을 내딛다가 시커먼 무언가 꾸물거려서 얼른 옆으로 움직인다. 죽은 벌레에 개미들이 들러붙어 있다. 그들의 움직임을 한참 바라보다 걸음을 뗀다. 요즘 주식 시장을 AI 버블이라 한다. 좀 특이하긴 하다. 다른 때 같으면 버블의 경계선을 저만치 앞에 두고 사람들이 움직이지만, 지금은 경계선 바로 위에 서서 그 경계선을 계속 밀어 올리는 것처럼 보인다. 경계선이 갑자기 뒤로 밀리면 그 위에 서 있던 사람들은 속절없이 밑으로 떨어질 거고, 뒤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미리 겁에 질려 얼른 도망을 치겠지. 그런데 내 생각엔 기술의 버블이 아니라 욕망의 버블이다. 기술은 시대에 맞춰 제 갈 길 가지만 욕망은 시대를 앞서려 한다. 그게 가능할까?


날이 점점 어두워진다. 집에서 나왔을 땐 햇살이 미약하나마 있었는데 지금은 먹구름에 다 가렸다. 비가 내리기 전에 집에 들어갔으면 좋겠는데. 주식 시장은 공인된 도박장이다. 오른다, 떨어진다, 멈춘다. 단순화하면 이 세 가지에 거는 도박. 예측? 웃기는 소리다. 판도라의 상자 안에 희망이 있었다면, 주식 시장의 판도라 상자 안엔 예측이 있었을 거다. 도박이 위험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빚을 내서 도박을 한다고 하면 다들 말릴 것이다. 그런데 빚을 내서 주식을 하는 세상이다. 외부로 향한 시선은 항상 비교 대상을 찾기 마련이고 주식으로 돈 버는 사람은 항상 있으니까. 기술이 아무리 좋아도, 주식 시장이 활화산처럼 터져도 판단과 선택은 사람의 몫이다. 내 몫이다. 하지만 시선을 안으로 돌리지 않으면, 그 판단과 선택은 자신을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닐 테고 그에 따른 책임은 삶을 피 말리게 할 수도 있다. 더 비참한 건 그 책임마저 외부로 돌리게 될 거란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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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산이다. 어린이날인데 산에는 어린이가 없다. (어린이날에 썼던 글이다) 어린이날과 산은 딱히 인과관계가 없는 모양이다. 지난 설 연휴 때 무심코 산에 올랐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이미 산 아래서 위를 올려다봤을 때부터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는데 사람이 너무 많았다. 산에서 정체가 생길 줄이야! 그래서 오늘은 아예 4시 반쯤 늦게 나왔다. 그래도, 많긴 하네.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정상에 오르자 신기한 풍경이 펼쳐진다. 정상까지 이어진 한양도성 옆으로 그늘이 졌는데 그 안에 사람들이 쭉 앉아 있었다. 기차놀이인가? 그곳뿐만 아니라 정상 이곳저곳에 사람들은 많았다. 다양한 연령대에 외국인까지. 어린이는 없구나. 해발 300m 이상에선 어린이날은 없는 걸로. 그리고 마치 다른 세상에 있는 것처럼 고양이 한 마리가 동그마니 사람들 사이에 있었다.


저, 저, 저 바보 자슥. 사람이 이렇게 많을 땐 나오지 말고 숨어 있어야지. 삼색이는 현명하게 코빼기도 안 보이는데. 넌 가서 삼색이한테 더 배우고 와야겠다.


놀라우리만치 정상의 아무도 고양이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다들 웃으며 사진 찍기에 바쁘거나 그늘에 앉아서 얘기를 나눈다. 아, 이번 고양이는 젖소냥이다. 흰 바탕에 검은 얼룩. 녀석도 무관심에 놀랐는지 어리둥절. 저기만 다른 차원인가? 아님 자기애의 끝판왕들이 이곳에 모인 건가?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다른 애들은 멍충미에 귀요미까지 갖추었는데, 너는 그냥 멍청... 흠. 아니다, 아니야. 고양이면 된 거지 뭐. 슬쩍 가서 닭가슴살 하나를 바위에 놔줬더니 얼른 입으로 문다. 하지만 도저히 그 자리에선 먹을 자신은 없었는지 먹이를 물고 수풀 속으로 달아난다. 그제야 사람들의 관심이 쏟아진다. 저 녀석, 보호색인 건가? 먹고 다시 나오면 하나를 더 줄까 해서 기다렸는데 소식이 없다. 닭가슴살 하나에 모든 배짱이 사라졌나 보다. 이틀 후에 보자. 잘 지내야 한다. 나 역시 정상에서 도망친다. 어린이날인데 어린이는 왜 없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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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지인을 만났을 때 자기 조카 얘기를 하면서 투덜댔다. 어린이집에서 선생님이나 다른 아이들이 무슨 말을 하면 그 상황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하는데 그저 큰소리로 자기 할 말만 했단다. 교사한테 집으로 전화가 와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단 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지인의 불만은 아이에 대한 것도 있지만 그 부모, 그러니까 동생 부부에 대한 게 더 컸다. 아이를 제대로 가르치질 못하고 끌려만 다닌다고. 생각해 보니 내 조카 중 남자애도 그 비슷한 행동을 보인 적이 있었다. 어린이집에 갔는데 선생님께 다짜고짜 반말을 투척했지 아마. 이랬던 녀석이 지금은 아빠가 되어 있는 걸 보면 참 시간이란 신비하고 오묘하다.


시간 자체의 힘만은 아닐 것이다. 그 사이사이에 녹아든 교육과 의지가 아니었다면 아빠나 애나 별반 다를 게 없겠지.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나에겐 교육에 실패한 사례가 하나 있다. 일단 어렸을 때 내 무지로 인해 사회화 교육에 실패했다. 그리고 새벽에 나를 깨울 때마다 강력한 의지로 죽은 척을 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새벽마다 두 번씩 간식을 바치게 됐다. 그 결과, 이 집의 핵심은 내가 아닌 녀석이 됐다. 오늘도 녀석은 외친다. 세상의 중심에서. 냐옹을. 냐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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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킬과 하이드처럼 글을 분리해서 쓴 적이 있었다. 이 글은 지킬이, 저 글은 하이드가. 완연히 달랐다. 지킬이 쓴 글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지만, 속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하이드가 쓴 글은 오로지 한 방향, 분노와 공포와 불안을 향해 내달렸다. 그때도 알았다. 둘 다 나임을. 하지만 현실에서 날뛰는 하이드를 마주한 뒤 난 내가 무서웠다. 받아들여야 했지만 당장은 그러지 못했고, 그래서 글에서나마 둘을 분리했다. 제대로 된 대처였는진 지금도 모르겠다. 다만 그 글들은 분출구의 역할을 했고, 나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돌아보게끔 했다. 그렇다고 외부의 문제를 해결하진 못했다. 그저 나를 추슬렀을 뿐.


손을 씻다 옆에 놓인 빨랫비누가 눈에 들어왔다. 기존에 쓰던 비누가 너무 작아져서 역할을 못 하면 새 비누를 꺼내고, 자그마한 조각들을 새 비누와 함께 사용하면 그 둘이 달라붙는다. 모두가 다 붙진 않는다. 어떤 것들은 붙어서 하나처럼 되고, 어떤 것들은 붙지 못하고 더 작게 바스러진다. 지킬과 하이드를 분리했던 이후의 삶이 새로운 삶은 아니겠으나, 그 이전의 흔적이 그 이후의 삶에 들러붙은 건 분명하다. 저 비누처럼. 나를 정의하고 나를 표현하고. 그렇다면 내게 들러붙지 못하고 떨궈진 무언가도 있을 법한데, 그게 무언지 아직 모르겠다. 떨어져 나간 것,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선택에 따라 버려진 것. 그 공백 또한 나를 정의하는 것이라면. 난, 모르겠다. 내가 누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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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산이다. 지난주에 오르고 이번 주는 처음이지만 날짜로는 사흘밖에 안 지났다(월요일에 썼던 글이다). 그런데 상황이 완전 다르다. 푸르름의 밀도가 어마무지하다. 식물들이 조금만 뭉쳐있어도 그 너머가 보이지 않을 정도다. 봄의 생명력은 정말이지 놀랍다. 소나무의 모양새도 달라졌다. 중력을 거스르듯 위쪽으로 꼿꼿이 선 수꽃들이 머리를 잔뜩 쳐들었다. 조만간 이들이 터지면서 꽃가루를 퍼뜨리겠구나.




소나무 수꽃의 생김새 때문에 자연히 이 산 곳곳에 쌓아 올린 조금만 돌탑들이 떠오른다. 한 치 앞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반쯤은 진심으로, 반쯤은 재미로 돌들을 포개놓은 30cm 미만의 수많은 탑을. 산을 짓누르는 그 많은 상념을 소나무가 빨아들여 공기 중으로 날려 보내는 상상도 해본다. 훨훨 날아가라. 날아가서 그 욕망을, 그 바람을 흩뜨려서 세상의 무게를 덜어내라. 그렇게 해서 모두의 어깨가 펴졌으면, 모두가 허리를 곧추세울 수 있으면. 그럼 더 넓게, 더 멀리 바라볼 수 있을 텐데. 아니, 아니다. 이건 애초에 사람 중심 얘기구나. 그냥, 이 산에서 함께 하는 존재들을 위해, 하늘을 우러러 기원한다고 하자. 땅의 기운을 모아, 식물들의 생명력을 모아, 고양이들의 투정을 모아. 그 기원을 세상에 퍼뜨려 세상을 조금이라도 깨끗하게 하는 걸로.


내려오는 길. 발밑을 바라보며 걷는데 저만치서 들려오는 소리. 할머니한테 갈래? 고개를 들어보니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주를 데리고 산책을 나선 듯하다. 아이는 걸을 수 있지만 그래도 자기 다리보단 남의 다리를 이용하는 걸 더 좋아하는 나이로 보인다. 할아버지한테 안겨 있다 할머니의 등으로 옮겨지는 순간. 버둥대던 아이가 헤헤하면서 웃는다. 할아버지 가슴팍보단 할머니의 등판이 더 좋은 건 아이들의 공통된 취향인 거 같다. 이눔 보소, 이눔. 할머니가 투덜대지만, 그 안엔 당신만을 위한 마음 따윈 없다. 보고 싶은 얼굴을 떠올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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