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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광해, 왕이 된 남자
이주호.황조윤 지음 / 걷는나무 / 2012년 11월
평점 :
영화가 천만을 돌파했단다. 개인적으로 영화보다는 원작을 더 좋아하기에 영화를 꼭 찾아서 봐야지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었다. 책을 읽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래도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었다. 누가 하선과 광해를 연기하고, 중전과 도승지를 연기하는지, 사월이를 누가 연기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랬나보다. 내 머릿속은 책을 펼치는 순간부터 필림이 돌기 시작하였다. 스크린 속 주인공들이 책속의 지문들을 대본 삼아서 그렇게 이야기를 펼쳐내고 있었다.

『승정원일기』에서 사라져 버린 광해군 8년, 15일간의 기록. 『조선왕조실록』광해군 8년, 1616년 2월 28일 기록에는 이런 말이 남아 있단다. “숨겨야 할 일들은 조보(朝報)에 내지 말라.” 이 작은 단서 하나로 또 다른 광해가 탄생했다. 광해가 감추려 했던 비밀은 무엇이었을까? 이 이야기는 분명 광해의 이야기이지만, 광해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림들의 권력 다툼으로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지고 혼란이 극에 달했던 광해군 8년, 서인과 소북 세력의 견제와 독살 위협에 점점 난폭해져 가던 ‘광해’는 도승지 ‘허균’에게 자신과 똑같이 닮은 자를 찾아오라는 밀명을 내린다. 기방에서 광대놀음으로 돈을 벌던 ‘하선’을 찾아낸 허균은 외모는 물론 목소리까지 놀랍도록 닮은 하선을 왕에게 데려간다. 영문도 모른 채 궁에 끌려간 하선은 광해군이 자리를 비운 동안 왕의 대역을 하기 시작한다.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가? 일개 만담꾼이 단 몇시간 이라도 왕이 먹는 진미를 먹고,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하면 주머니도 두둑해 지니말이다. 처음엔 그랬다. 왕이 독살로 쓰러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왕이 쓰러지고 도승지는 광해가 깨어날때까지 하선을 왕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저 하룻밤 광해가 수락산으로 안개시를 만나러 가는 그시간을 때우는 것이 아니라 이제 하선은 전면에 나서야만 한다. 도승지의 지시에 따라 광해의 말투와 걸음걸이를 따라하고, 대신들과 마주해 경연을 주관하고, 하선은 멋도 모르고 왕 행세를 하기 시작한다. 도승지의 말만 들으면 되는줄 알았는데, 하선의 눈에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유정호가 누구이기에 도승지와 중전은 그를 살리려 하고, 다른 이들은 그를 죽이려 하는것일까? 모두들 잘 살수있고, 공편하다고 생각되는 법들이 왜 양반들을 힘들게 하는 것일까?
그깟 사대의 명분이 무엇이오. 대체 무엇이길래 2만 명의 백성을 사지로 내몰면서 눈도 깜빡하지 않는 것이오? 조선의 관리라면, 백성들이 부모라 칭하는 왕이라면 그리 해서는 안 됩니다! 살기가 힘들어 빼앗고 훔치고 빌어먹을지언정, 그렇게 비루하게 살지언정, 그들은 그들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대들이 무엇이기에, 사대가 무엇이기에, 귀하디귀한 목숨을 빼앗으려 하는 것이오! 과인은 그들을 살려야겠소.(p.212)
분명 왕의 대역일 뿐이었던 하선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도승지는 당황하기 시작한다. 그만 당황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그러지 아니하던 왕의 목소리에 왕의 힘에 고개를 떨구는자들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렇게 왕이 되어서는 안되는 남자가 왕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만담꾼이던 이 남자의 목소리에 왕의 위엄이 깃들어있고, 이 천한 남자가 진정 왕이 되기를 꿈꾸기 시작한다. 하선은 그저 "주상께서 돌아오시면 모든 게 잘 될 거라 생각했소. 원래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할 인물이 돌아오는 것이니까요. 또한 나는 재물을 얻어 다시 내 자리고 가면 되니 모두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p.193) 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모든게 변하기 시작한다. 꽃같은 중전을 멀리하고 곰보투성이의 안상궁을 찾는 왕도 이해할 수가 없고, 자기 살자고 남을 죽이는 이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어떤게 옳은 것일까?
영화가 천만을 돌파한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것이다. 배우의 연기가 좋았다는 것은 두말할 이유가 없지만, 지금의 시기와 딱 맞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 책은 영화와 함께 기획되어져 영화와 다른 반전과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로 재탄생한 역사소설이다. 러닝타임 동안 다 보여 줄 수 없었던 인물들의 이야기를 역사 기록에 근거해 풍부한 에피소드로 구성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광해, 하선, 허균뿐만 아니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인물들의 행동과 내면 변화까지 섬세하게 그려냈다. 또한 왜 광해가 폭군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대동법과 호패법이 광해와 신료들의 권력 다툼에서 쟁점이 된 이유는 무엇이며, 끊임없이 역모 사건이 이어진 이유는 무엇인지, 허균은 왜 역적으로 몰리게 되는 것인지 등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의구심을 독자 스스로 해소할 수 있도록 충실하게 설명하였다고 출판사에서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광해-왕이 된 남자, 미공개 엔딩신 (출처:CJ엔터테이먼트)
영화를 아직 못 보았기에 영화속에서는 하선과 중전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책은 다시 일어난 광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허균의 이야기를 펼쳐준다. 도승지 '허균'을 계속 읽으면서도 그가 내가 알고 있던 '홍길동전'의 '허균'이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역사소설임에도 그저 동일한 인물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몇일전에 영화의 미공개 결말이 나왔다. 책속에서 만났던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하선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책과는 다른 결말을 나도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러길 바랬던 것은 역사이지만, 소설이니까. 주인공이 조금은 행복해진다고 해서 픽션이 논픽션으로 변화하진 않을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왜 하선이라는 인물에 그토록 열망하는지를 대선을 앞둔 지금, 대권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 살자고 누군가를 죽여야 하고, 그로 인해 누군가가 또 죽어야 한다면, 그렇게 사람 목숨을 장기판의 졸처럼 대하는 것이 왕의 길이라면 나는 싫소. 내 꿈은 내가 꾸겠소. (p.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