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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다리 2
줄리 오린저 지음, 박아람 옮김 / 민음사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읽고 몇 개월 동안 여운이 가시지 않는 책들은 분명 무언가 있는 책이다. 작년 12월에 1, 2권을 읽고는 정신이 없어 그냥 책장에 넣어둔 책을 꺼내들었다. 아련함과 가슴절절함은 느껴지는데 이게 뭐였던가 한참을 생각했다. 리뷰를 바로 써놓지 않으면 항상 이렇다.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감정들은 퇴색되어 버리고 그냥 아련한 느낌만 남으니 후회하면서도 리뷰보다 읽고 싶은 책 욕심에 놓치곤 한다.『보이지 않는 다리』는 그럼에도 아렴함이 강하게 남은 작품이었다. 고운 낙엽이 물들기 시작하는 가을이기에 더욱 간절하게 그리워지는 사랑의 이야기. 읽을 당시 주노 디아스의 "올 한 해 가장 뛰어난 책!"이라는 말에 강하게 동감하게 만들었던 『보이지 않는 다리』. 한겨울에 읽을때는 흰 눈위에 찍힌 발자욱같은 사랑으로 느껴졌던 이야기가 이 가을엔 가을을 닮은 달콤한 사랑으로 다가온다.

1937년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건축 공부를 위해 파리로 가는 언드러시 레비는 명망 있는 하스 가문의 노부인에게서 C. 모르겐슈테른이라는 사람에게 편지를 전달해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편지를 부친 후 한동안 익숙지 않은 프랑스어와 씨름하며 정신없이 유학 생활을 보내던 언드러시는 우연한 기회로 C. 모르겐슈테른의 집에 초대받는다. 집주인이자 편지의 수령인은 남편 없이 딸과 단둘이 사는 발레 강사 클러러 모르겐슈테른이다. 언드러시는 클러러가 하스 노부인의 딸임을 알아채고, 클러러 하스는 언드러시의 삶 전체에 깊이 각인되는 운명의 여인이 된다. 언드러시보다 아홉 살이 많은 데다 딸이 있는 클러러는 마음의 문을 쉽게 열지 못한다. 게다가 성을 바꾸고 가족과 연락을 끊은 채 파리에서 혼자 살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어두운 과거는 두 사람의 관계에 발목을 잡는다. 결국 언드러시는 가난한 유학생이라는 처지에 대한 좌절감과 비밀을 털어놓으려 하지 않는 클러러에 대한 서운함 때문에 이별을 고한다. 하지만 떨어진 후에야 서로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을 깨달은 두 사람은 마침내 재회해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다.
'그녀 없이 보낸 몇 주일의 지루함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다시 인간이 되었다. 자신의 살과 피, 그리고 그녀의 살과 피를 되찾았다. 겨울 햇살 속에서 모든 것이 너무도 환하게 반잒거렸다. 거리의 모든 부분 부분이 마치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처럼 눈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1권 p.227)
사랑을 깨닫는 순간 청춘에게 삶은 얼마나 아름답게 다가오는지 클러러의 존재만으로 언드러시의 삶은 환하게 빛이나고 세상은 변해 버린다. 이루어질수 없을 것 같은 사랑이 이루어지면 해피엔딩으로 끝나야하는데, 전쟁이라는 역사속에 끼어있는 사랑은 둘만의 일만이 아니게 된다. 역사의 비극은 당연한 듯 두 사람의 삶에 끼어드니 말이다. 헝가리 당국이 유대인 유학생에게만 적용되는 새 비자 정책을 실시하면서 언드러시는 비자를 갱신하러 어쩔 수 없이 헝가리로 향하고 클러러는 과거가 폭로될 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따른다. 클러러는 가족들과 다시 만나고 두 사람은 축복 속에 결혼해 새 삶을 꾸리지만,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프랑스로 돌아가는 길이 막히고 만다. 그리고 전쟁과 함께 시작된 유대인 강제 노역으로 두 사람은 기약 없는 헤어짐을 강요당한다.
만만치 않은 분량과 방대한 스케일, 상세한 묘사들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보는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1930~1940년대 유럽을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은 단순히 2차 세계대전의 전장을 훑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가난한 유학생 언드러시가 사는 싸구려 다락방에서 어린 소녀들이 춤추는 클러러의 발레 교습소, 건축 학교, 오페라 극장, 유럽 횡단 열차, 그리고 동부전선의 노무 부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공간이 등장하며 그때마다 작가 줄리 오린저는 그 장소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섬세히 묘사하기를 잊지 않는다. 오랜 시간 공들인 디테일한 묘사는 모든 감각을 언드러시와 클러러 두 사람이 사는 세계속으로 푹빠져버리게 만든다. 언드러시가 클러러의 교습소로 가는 동안 그와 함께 센 강을 건너고 마레 지구를 거치며 파리 시내를 산책할 수 있고, 언드러시가 설계 대회에 제출한 건축 모형을 르코르뷔지에와 나란히 서서 이모저모 따져볼 수 있으며, 화려한 무대 뒤에서 숨 가쁘게 돌아가는 오페라 극장의 현장을 체험 하는 경험이라니 작가의 능력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보이지 않는 다리』는 로매스 소설이면서 역사소설이다. 유럽에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우던 일촉즉발의 시기부터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모든 것이 폐허로 변해 버린 시기까지의 정치적, 역사적 사건들이 클러러와 언드러시의 이야기 안에 촘촘히 엮여 있다. 추축국에 가담했다가 탈퇴 직전 독일에 점령당하고, 전쟁 말미에는 소련에 점령당해 다시 연합국으로 돌아선 헝가리의 굴곡진 운명처럼 언드러시와 클러러도 전황에 따라 만남과 이별을 반복한다. 두 사람 외에도, 전쟁으로 굴절되고 마는 삶의 비극을 보여 주는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소설 전체에 생생하게 펼쳐진다. 작가는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20세기 역사에서 가장 긴박했던 시대의 장면 장면을 충실히 재현해 내고 있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도 가장 빛을 발하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하기에 피어나는 생존의지는 그들을 살아가게 만드는 힘을 이끌어 준다. 노역에 시달리는 언드러시와 폭격의 위협을 견디며 기다리는 클러러를 버티게 하는 힘은 사랑에서 나온다. 변치 않는 사랑과 신뢰, 그리고 그 결실인 아이들은 두 사람이 잔인하고 참혹한 시대 상황에도 삶을 이어 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언드러시가 가장 경악한 것은 엄청난 규모가 아니라 오히려 아주 작은 것들이 괴로움을 안겨 준다는 사실, 아주 작은 것들이 일상생활의 균형을 유지해 주는 토대가 된다는 사실이었다. 저울은 아주 작은 것에 의해, 즉 발진티푸스를 옮기는 이나 수통에 남아 있는 아주 약간의 물, 주머니에 든 빵 부스러기 등에 의해 기울어질 수 있었다.'(2권 p.416)
1권 525페이지, 2권481페이지로 1,000페이지를 넘는 언더러시와 클러러의 사랑은 기적이었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는 사실,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모든것을 건 사람들. 역사의 격랑에 휩쓸린 두 사람의 운명은 배고픔도, 두려움도, 고통도, 그리고 전쟁도 갈라놓을 수가 없는 기적같은 사랑이었다. 책장을 덮은 후에도 그들의 사랑으로 가슴을 욱식거리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다리』는 읽으면서 고전인가 하는 착각이 들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묘사나 역사의 세밀함으로 인해 읽어보지 않았던 고전으로 생각을 하다, 작가 줄리 오린저가 1973년 생이라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줄리 오린저가 만들어낸 운명적 사랑과 탄탄한 구성, 강력한 이야기와 디테일한 묘사는 비극적일수 밖에 없었던 역사를 내 눈앞에 펼쳐놓는다. 작가가 아닌 독자로 글을 읽을 수 있음에, 이런 사랑에 동참할 수 있음에 감사하는 이런 가을날『보이지 않는 다리』는 사랑을 보이게 만들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