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12월 세상을 떠난 『혼불』의 작가 최명희 선생을 기리기 위한 '혼불문학상'이 3회를 맞이했다. 2001년 혼불기념사업회에서 제정한 청년문학상과 혼불학술상 2개 부문으로 통칭하던 것을 2011년 전주문화방송이 '혼불문학상'으로 제정, 시상하기 시작하였는데, 제1회『난설헌』, 제2회『프린세스 바리』에 이어 제3회 수상작으로 김대현 작가의 『홍도』가 선정됐다. '홍도'라는 제목을 읽자마자 예전 악극 '홍도야 울지마라'가 떠올라 피식 웃고 말았다. 오빠가 있으니 울지 말라던 홍도와 김대현 작가의 '홍도'도 오빠같은 '자치기'가 있으니 그것 하나는 비슷하다.

나는 400년 동안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책 띠지에 적혀있는 글이다. 400년 동안 어떻게 기다렸다는 것일까? 띠지만 읽고 생각난건 어린시절 본 <은행나무 침대>였고, 끝없는 삶을 살던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였다. 누군가를 기다린다는건 언제나 가슴 아리다. 금방 오는 기다림은 설렘을 동반하지만, 언제 올지 모르고 혼자 기다린다는 것은 그리 편한 기다림은 아니니 말이다. 동양적 사상으로는 기다림 속에 '윤회'사상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몇 백년간의 사랑을 다룬 이야기들이 드라마, 영화와 책을 통해서도 많이 나오지 않았던가? 여기 한 여인이 있다. “1561년은 신유년이고 경진년은 1580년. 1580년생이시면 올해로… 433살?” 여자가 남자에게 눈길을 맞춘다. “그렇다면 저는, 1986년 병인년에 태어나 올해로 겨우 27살인 김동현입니다.” (p.19) 처음 본 여인이 자신은 433살이라면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영화감독인 동현에게 전해주는 이 이야기들을 믿을 수 있는 것일까?
근래에 들어서 '정여립'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흘러나오고 있다. 광해군을 다시 돌아보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 당시 그런 사상을 가진 급진적인 혁명가는 굉장히 매력적인 캐릭터로 다가오는것이 사실이다. 다른 작품을 통해서 만났던 정여립은 젊은 혁명가로 나왔었는데, 『홍도』속 정여립은 죽도 할아버지가 되어 홍도앞에 나타난다. 할머니의 남동생으로 만난 죽도 할아버지는 글을 좋아하는 어린 계집아이에게 홍도란 이름을 지어 주었고, 죽도 할아버지 곁에서 낮도깨비같은 사내놈이 고운 미소를 짖고 홍도에 의해 '자치기'가 되었다. "종이에 꽃물을 들이고 마음이 동한 시를 적었으니, 영이가 당나라 시인 설도를 쏙 빼닮지 않았느냐? 설도의 자가 홍도니라. 영이도 홍도 모양으로 시를 짓고, 도가의 도인이 되어 세상을 두루 살피는 아름다운 여인이 되면 좋을 것이야."(p.25)
선조시대 역도의 무리라고 단정지어졌던 대동계의 수장 정여립은 자살을 했다. 정여립의 자살이 모든것을 원위치로 돌려놓을 수는 없었다. 어린 계집아이의 아비도, 할머니도 정여립과 함께 죽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역도의 무리였기 때문이었다. 그 가운데에 살아난 자치기와 홍도. 그리고 살기 위해서 떠날 수 밖에 없었던 홍도와 자치기. 정주옹주를 대신하며 일본 장수 우키타 히에이에(토요토미 헤데요시의 조카)와 함께 있다, 조선으로 돌아온 홍도는 홍도를 기다리던 자치기를 만나고 대동촌에 살게 되지만, 그역시 오래가지 못한채, 대동촌에 살고 있던 항아님에게서 죽음을 이기는 숨결을 넘겨받게 된다. '항아 님은 수천년을 살아온, 영영 살아갈, 제 숨을 홍도에게 불어놓으며 기원을 하고 축원을 했을 것이다.... 늙지도 죽지도 말고 살아라. 오래도독 살아서 세상을 다 보아라. 영영...' (p.283)
조선이라는 나라는 신분제도와 함께 여인 혼자는 살기 힘든 나라였다. 그곳에서 몇백년을 살게 된 여인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역사의 모순과 부조리와 맞서 사는 홍도가 영화감독 동현에게 이야기하는 자신의 삶. 8시간 동안 비행기 안에서 들려주는 홍도의 말을 농담이나 소설로 받아들이던 동현은, 기축옥사, 임진왜란, 천주박해 등을 겪고 진주만, 암스테르담, 핀란드 등을 떠돌며 살아온 그녀의 삶과 사랑 속에 서서히 빠져든다. 늙지도 죽지도 않고 살아왔다는 홍도의 사랑과 이별, 희망과 절망은 반복되는 역사의 주요 사건들과 맞물려 동현이 가진 의문을 하나씩 지워나간다. 큰 산같은 아버지, 이진길이 백다록이 되어 나타나고, 정주 옹주였던 얀 얀센 꼬르버를 만나 사랑했던 홍도. 언제나 살아 있었고 언제나 사랑했다는 그녀, 홍도. 그녀의 운명을 뒤흔든 사랑을 그녀는 그렇게 담담하게 이야기를 한다.
헬싱키 반타공항에서 인천공항까지. 홍도의 리얼리티를 의심하는 동현은 어느새 홍도에 모든 말을 믿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녀가 왜 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자신이 어째서 그토록 '정여립'이라는 인물에 관심을 갖게 되는지를 알게 된다. 띠지에 씌어있는 '나는 400년 동안 당신을 기다렸습니다.'라는 글이 "바닷물이 깊다고들 하지만 내 그리움에는 반도 미치지 못하리라"는 말이 왜 이렇게 가슴을 아리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세번의 사랑이 다가왔다해도 그녀의 가슴 절절한 사랑은 그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 여인의 삶속에 녹아있는 우리 역사와 그 속에서 사랑을 찾기 위해 애쓰던 여인. 축복이 될 수도 불행이 될 수도 있는 '불멸'을 그녀는 '홍복'이라 이야기를 한다. 또 다시 사랑을 만났으니까. 사랑이 고픈 계절, 이 가을 그녀가 사랑을 만나서 다행이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기다림을 꼭꼭 눌러 담은 사랑으로 이겨낼 수 있기 바라는 마음은 어느새 나도 모르게 홍도에게 빠져버렸기 때문이고, 홍도의 말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