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학교에서 이옥수 작가 초청 강연이 있어서 아이와 함께 했었다. 강연을 들은후 이옥수 작가의 다른 이야기들이 궁금해서 찾은 책이 『키싱 마이 라이프』다. 강연회 중에 나왔던 책이기도 했고, 작가가 농담조로 이 책이 굉장히 야하다면서 아이들을 들었다 놨다 했었다. 큰 아이는 책 내용과는 상관없이 42페이지가 야하다는 작가의 말에 책을 읽어야겠다고 하니, 아이들에게 성은 분명 대단한 관심사다. 내눈엔 야하다는 느낌보다는 안타까움으로 다가오는 장면이었지만, 큰아이 나이였을때는 나 역시 야하다는 생각만 들었을 것 같다. '내 인생을 사랑하라'나 '인생에 부딪혀라'는 뜻으로 다가오는 '키싱 마이 라이프'를 처음에는 왜 '키싱구라미'가 자꾸 떠오르는지, 큰 아이에게 '키싱구라미'빌려오라고 했다가 얼마나 놀려대는지 엄마의 기억력을 어떻게 알고, 그냥 빌려오라고 하면 빌려올것이지. 개떡같이 이야기를 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을 수 있는게 모녀지간 아닌가.

'저 인간 저런 꼴을 한두 번도 아니고 이때껏 수십 번 수백 번도 더 보며 살아왔는데 왜 갈수록 화가 더 나는지 모르겠다. ..정상현, 언제는 완소남이었다가 또 언제는 완전 꼴통이니 부모 자식 간이라도 그 변화무쌍함 때문에 무지 헷갈린다.' (p.22~23)
강하다. 처음부터 너무 강하게 나온다. 요즘 아이들의 대화는 유치부 어린 아가들하고만 살고 있는 나에겐 외계어로 다가오긴하지만, 주인공 하연은 내 상상 이상으로 이렇게 크고 강하게 이야기를 한다. 남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술먹고 주정을 하는 아빠에게 하는 이야기다. 어찌 부인이 할말을 열일곱 요 조그만 아이 입에서 스스럼 없이 나오는지 읽으면서도 감당이 안된다. 아빠의 주사가 반가울리는 없지만 이야기만 이렇게 하는게 아니라, 술먹은 아빠의 머리를 잡고 '죽어라'하고 고래 고래 소리를 치기도 한다. 그렇다고 노는아인가 하면 절대 아니다. 공부도 꽤 잘한다. 엄마나 아빠처럼, 집나간 언니처럼은 절대 살지 않겠다는 하연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공부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 있는 영특한 아이다. 이 아이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정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인 동물인가 보다. 진아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속에서는 질투심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내가 진아보다 더 불쌍해서 화가 났고, 내가 진아보다 더 아픈게 속상했다.' (p.100)
절친 진아의 남친 현규는 진아만큼 공부를 잘하는 아이다. 이 아이들이 부럽게 다가올 즈음에 현규의 친구 채강이 하연의 남친이 되었다. 외롭기도 하고 넷이서 놀면 재미있을것 같았으니까. 고등학생이라면 이성친구 한명 있는게 이상한 일도 아니니까 자연스럽게 친해졌는데, 아무도 없는 집에서 마시는 와인은 아이들의 이성을 무너뜨린다. 이성이 문제가 아니지. 미친 호르몬때문에 생겨난 일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이 미친 호르몬이 임신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자신이 해야할 길을 명확하게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아이는 갈팡질팡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가장 아픈데, 이 아픈것을 이야기할 곳이 없다. 현규와 진아가 갈뻔했다는 말은 그저 행복한 투정처럼 들릴뿐이다. 서로 좋아하면서 뭐... 어디에도 이야기할 수 없는 아이. 열일곱은 그저 아이일 뿐이다. 채강과 진아, 그리고 현규에게 이야기를 하고 이 아이들이 헤쳐 나간다고 해도 열일곱살 아이들일 뿐이다.
아이들의 힘만으로 헤쳐나가리라 생각을 하는 것 역시 아이들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수술을 하겠다는 하연과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알바를 하는 채강. 그리고 흘려버린 시간. 바쁘다는 핑계로, 삶이 녹녹치 않다는 핑계로 부모는 아이의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고 아이는 시간과 함께 커버린 뱃속 아이를 어떻게 할 수가 없게 되면서 하연은 집을 나와 언니에게 간다. 언니에게 가봐야 열아홉 똑같은 아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아이들은 왜 부모에게 말을 하지 못할까? 아니, 아이는 이야기를 하려 하지만, 눈에 보이는 현실은, 아빠의 음주운전 사고로 입을 다물게 만들어 버린다. 아이에겐 이야기 하면 안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엄마에게 다가올 고통을 입 다물고 조용히 있으면 넘어갈 수 있을거라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배꼽에서 팝콘 하나가 튁 튀는 것 같은, 아니 나비의 날갯짓 같은, 아니 아니, 금붕어가 소슬하게 헤험을 치는 것 같은 느낌이 일어났다. 전에도 몇 번 이런 느낌은 느꼈지만 이처럼 떨리진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가슴이 떨리도록 감격스럽다. " 아, 아가야. 너였구나!" (p.159)
열일곱엔 경험하지 않아도 될일을 하연은 경험하면서 지금까지 정답이라고 믿으면 살아았던 길들을 놓고 만다. 어린아이. 열일곱 어린아이가 갈 수 있는 곳이 어디에 있을까? 그래도 아이는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미혼모 시설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만나는 십대의 아이들. 뱃속 아이와 자신의 인생을 부정하는 아이도 있지만,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선택에 감사하는 아이도 있다. 아이의 출생으로 미혼모라는 이름표가 붙을 지라도 아이는 아이도. 아이돌 가수에 열광하고 함께 노래하고 웃는 아이들이다. 어렵고 다가가기 힘든 문제를 이옥수 작가는 끄집어 내어 이야기를 하고 있다. 강연에서 작가가 작품의 인물을 만들면 그 인물이 되어 산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자신은 청소년으로 밖에 살 수 없다고 말이다.
작가는 이야기를 한다. 『개 같은 날은 없다』를 통해서 보여줬던 가족의 폭력이 아닌, 가족의 사랑을 이야기 한다. 무관심하고 방임하는 것처럼 보이는 엄마의 입에서 "난 내 새끼 힘들어하는 것 죽어도 못 봐. 그래도 새끼가 힘들때 엄마가 옆에 있어야지!" (p.234)라는 말로 혼자가 아님을 이야기 하고 의지할 어깨를 빌려준다. 이야기의 끝은 하연의 출산이지만, 태어난 아이가 어떻게 되는지는 풀어주지 않고 있다. 나라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실은, 생각조차도 무섭고 겁이나서 멍해져 버린다. 내 아이의 일이라면이라는 상상 조차도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아이의 인생이 걸린 문제니까. 타인의 일이었을때는 이렇게 저렇게 해봐요 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 내일로 닥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진아와 현규가 하연을 보면서 자신들이 끝까지 가지 않은 것에 안도하는것 처럼 말이다. 나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지금은 알 수 없다. 아이에게 『키싱 마이 라이프』를 건네주고 읽은 후에 이야기를 해 보는 것이 나의 최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