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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일본은 조선을 수탈했을까? - 조선 농민 연합회 vs 조선 총독부 ㅣ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52
김인호 외 지음, 황기홍 그림 / 자음과모음 / 2012년 7월
평점 :
큰 아이가 4학년 무렵에 서대문 형무소로 견학을 간적이 있었다. 학교에서 간 견학이었는데, 그날 집으로 돌아온 아이는 몇일을 아무것도 하지 못했었다. 아이가 무엇을 보고 그렇게 심장 떨려하면서 아파했는지 나는 모른다. 아직 난 서대문 형무소를 간적이 없으니까. 이후에 큰아이의 관심은 온통 '일제 강정기'로 쏠렸다. 처음엔 집에 있는 '유관순'에 관한 책들을 읽기 시작하더니, 부족했던지, 동네 도서관을 찾기 시작했고, 얼마후엔 유관순에 대한 지식은 나를 뛰어 넘기 시작했다. 점점 아이는 유관순 열사를 넘어서서 그 시대를 느끼고 보고 싶어한다. 가장 좋아하는 뮤지컬이 '영웅'일 정도로 아이는 그 힘든 시대를 살아가셨던 분들에게 한없는 애정을 느낀다.

아이 덕분에 역사공화국 한국사 법정에서 <왜 일본은 조선을 수탈했을까?>를 읽으려 마음 먹었다. 우리 역사서를 보면 이 시대부터의 이야기들은 그리 자세하게 나와있질 않고 있다. 그러기에 한국사 법정이 역량이 크게 다가온다. 47권의 강화도 조약부터 찾아서 읽어보려고 하고 있는 이유는 아이의 지적 욕구도 충족시켜주면서, 나 역시 간과하고 넘어간 역사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바램때문이다. 큰 아이가 나보다 먼저 책장을 넘겼고, 책장을 넘기면서 한말은 변호사가 새로운 인물이라는 거였다. 몇 분의 변호사들이 역사공화국에서 활약을 하고 계시지만, 중간 부분을 읽지 않은 점도 있기때문에 똑소리 나는 오진실 변호사와 일본인인 나카무라 변호사는 새롭게 다가왔다. 나카무라 변호사는 강화도 조약과 창경궁 재판에도 등장한 변호사라 하니, 책을 다 읽으면 그 부분도 찾아서 읽어봐야겠다.
이번에 한국사 법정에서는 일본이 조선을 수탈한것에 대해 조선 농민 연합회와 조선 총독부가 대립을 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때 조선 사람들을 위해 근대화를 시켜 주니, 개량된 쌀로 수확량을 늘려 배곯지 않게 해 주겠다느니 꼬셔 놓고 농민들을 수탈해 간 조선총독부에 한이 맺힌 김매기 할아버지가, 토지 조사 사업이다, 산미 증식 계획과 미곡 공출이니 하면서 소작농이 어떻게 몰락해갔는지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다. 조선총독부는 토지 조사 사업이라고 하여 6년에 걸쳐 전국의 토지를 측량하고 새로운 소유자를 지정했는데, 이 사업은 졸속인 면이 많았다. 문중 토지나 공유지, 왕실 등에 속해 있던 토지를 주인 없는 토지로 분류 하여 총독부의 소유로 삼은 것도 상당수가 되었다.

물론 토지 조사 사업은 조선 후기 이래 토지에 대한 개개인의 소유권이 점차 발전해 온 관점에서 보더라도 토지 소유권과 토지 가격 및 토지 형태를 조사한 점은 인정할 만하다. 배타적 소유권을 법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일본은 이 사업이 조선의 근대화에 크게 기여한 사업이라고 미화하고 있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조선 민사령을 공포함으로써 자유로운 토지와 자원을 거래할수 있었다고 이야기를 하지만, 헌병이 칼차고 사람을 때리던 그 시대에 자유로운 인간관계의 수립이 가능했을까? 그뿐 아니라, 신고주의를 표방하여 문맹인 농민들이 신고하지 못한 땅은 임의로 갈취해서 일본인에게 넘겨주는 투기 브러커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은 조선에서 왜 토지 조사 사업을 시행했을까? 일본의 입장에서 조선에서 제일 필요한것ㅇㄴ 쌀이었다. 조선의 근대화가 아닌 쌀을 효율적으로 동원하기 위한 방편으로 토지 조사 사업이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 거대 지주와의 동맹아닌 동맹이 이루어 졌다고 할수 있다. 대체로 지주층은 근대화 과정에서 자본가의 성장을 심각하게 저해하고 여러 근로자와 경영자들이 만들어 낸 부가가치를 소비하는 계층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과장에서 '동양 척식 주식회사'가 등장한다. 1908년에 일본 농민의 조선으로의 이주를 도울 목적으로 설립한 회사가 동양 척식 주식회사다. 사업내용은 주로 일본의 국책 회사로서 식민지 척식 사업에 필요한 금융업을 담당하고 있다.
미곡 공출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쌀 수출은 일본의 요구에 의해 개항 때부터 시작되었지만 본격적인 것은 통감부를 거쳐 합방되고 난 이후였다. 생산된 물자가 전국 곳곳에 빠르게 이동될 수 있도록 전국 각지에 철도가 개설되었다. 일본은 이 모든 것이 조선을 위한 것이었다고 이야기를 한다. 정말 조선을 위한 것이었을까? 일제가 조선을 지배하면서 농업 체제에 변화가 온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전국 각지에 철도가 개설되었다. 그 철도가 끝나는 곳엔 무엇이 있었을까? 항구가 건설되었다. 총독부는 조선에서 생산된 여러 물품을 이런 항구를 통해 일본으로 반출해 간것이다. 풍년이 들어 곡식을 수확해도 농민들에게 돌아오는 곡물은 없었다. 심지어 소작농들은 쌀을 팔어 잡곡을 사다 먹었다고 하니 그 피해가 얼마나 컸는지를 알수가 있다.

일본은 1931년 신간회가 해체된 이후 불온 사상을 퍼뜨렸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일제 시기의 사회주의 운동은 민족 해방운동의 한 방법이었다. 이를 두고 냉전 이후의 좌우 대립에 기초한 기초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 당시 일본은 '농가 경제 갱생 계획'을 펼치면서 '사사화(私事化) 이데올로기'를 이야기 하는데, 잘 살고 못사는건 모든 개인의 탓으로 그 해결책은 근면. 검약하는 것이 최고라고 이야기를 한다. 농민의 60%이상이 소작농이고, 그 소작농의 80%이상이 명확한 소작 기간도 보장받지 못하는 부정기 소작농인데 이런 말이 가능하기나 한것일까? 사람답게 살려고 몸부림츨 치면 혁명이라하고 소작인들에게 지원금은 조금주고, 고율 소작료를 방치하고, 거기에 세금까지 무겁게 부담시키고, 힘들게 농사지으면 가족에게 돌아오는 건 없어, 결국 만주에서 들어온 질 낮은 잡곡으로 입에 풀칠을 하던 삶. 이것이 일제 강점기 농민들의 삶이었다.
아직도 일본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사죄를 하고 있지 않다. 여전히 독도는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위안부와 강제 징용에 대해서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아니, 자유의지를 주장하면서 좋아서 했던 행동들이라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독일의 역사학자 레오폴드 폰 랑케의 격언인 '역사란 과거가 실제 어떠했는가를 밝히는 것'이라는 말처럼 우리가 궁금한 것은 '역사란 과거가 진실로 어떠했는가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미래는 우리만의 것이 아니다. 작가의 말처럼 삶의 소중함을 안다면 그것을 수호해야 할 정부의 정책이나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아야하고, 일제 강점기의 조선 총독부라는 정권이 펼쳤던 행위를 아는 것은 그 시대의 아픔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온분들의 삶을 알기 위해서다. 지금의 삶이 어딘가에서 뚝 떨어져서 만들어 진것은 아니니 말이다. 그분들의 수고와 희생으로 지금의 한류라는 문화가, 대한민국이 이어지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