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겔루스 노부스 - 탈근대의 관점으로 다시 읽는 미학사 진중권 미학 에세이 2
진중권 지음 / 아트북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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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참 잘 지은 책이다. 10년 전의 작품을 재발매 하면서도 대중적 인기를 끌고 있는 지은이 본인이 ‘거기에 고칠 만한 내용도 없다’라고 쓴 것을 보면 말이다. 학자적 자존심이 있다면 대중에게 선보일 책 속의 불편함을 그냥 둘리는 없다. 이 책이 개인적으로 소장할 일기장 정도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저자의 태도로 볼 때 ‘앙겔로스 노부스’는 잘 된 작품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시간이 참 짧았던 것 같다. 신나는 그 무엇이 있었던 것 같다. 에세이든 책이든 이것도 예술이라면 존재미학을 느꼈다고 할까? 개인적인 허점이나 단점, 그리고 없던 것을 충족시켜주는 그 무엇이 있는 이 작품은 매 장이 시작될 때마다 뭔가 있을 기대가 있었고 상당히 충족시켜줬다. 과연 괜히 유명인사가 된 것은 아닌 것 같다. 10년 전의 작품이 다시 재출판되는 것도 그렇고 과거의 작품이 현실적 동력을 상실할 수 있음에도 현재의 독자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느끼게 하는 것을 보면 저자 진중권의 글쓰기는 확실히 뭔가가 있다.
  그의 작품을 이성적으로, 혹은 합리적으로 읽힌다. 하지만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은 이성을 기반으로 한 지식사회에 대한 엄중한 비판이다. 예술이란 분야에서 말이다. 참 재미있다. 이 책을 읽기 위해서 필요한 추상화 능력과 이성이 그의 비판 대상이 됐다는 점에서 말이다. 비록 예술이란 분야에 한정됐지만 사실 그 비판은 전방위적이다.
  탈근대는 근대로부터 벗어나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다. 그래서 근대를 가장 대표하는 합리적, 인간우위적인 이성은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리스 시대부서 시작되는 인간중심적인 시각과 이성의 분해는 좀 가혹하다 싶을 정도의 메스를 받게 된다. 특히 이성과 관계된 어휘에서 근대는 무수한 폭력들을 고발하는 말들이 많이 나온다. 그런 근대의 폭력에 희생된 개성, 자연 등은 가련하기조차 하다.
  책 속의 과잉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긴 합리성을 기반하는 사회과학 역시 그 뒤에 감춰진 주관성이 현재 계속 파헤쳐지는 상황이고 보면 완벽한 차분함도, 그리고 냉철한 이성도 기대하긴 힘들다. 단지 설득력이 좀 더 강화되는 시대 아닐까? 그런 점에서 저자의 냉정한 비판은 여러 가지 면에서 들어 볼만한 것들이다. 그리고 그것이 탈근대의 정신이라면 하나의 대안인 것도 사실이다.
  인간적인 면을 억압하려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데카르트와 같은 철학자들의 합리적 생활태도 강조는 좀 지나친 면이 있는 것 같다. 책을 보니 말이다. 고도의 합리성과 수학화로 인해 개성을 말살하게 되고, 그래서 디오니소스적인 특성을 말살하게 됐는지 된 것 같다. 데카르트도 좀 억울한 면이 있을 것이다. 자신이 원했던 것이 이런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을까? 근대이론가들이든 탈근대이론가들이든 하늘의 신기를 타고난 에언가가 아닌 바에야 그런 항변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의 강조점은 반대에 또 반대하는 난잡한 싸움이 아니다. 설사 저자가 그런 식으로 쓰고 싶다 하더라도 개인적으로 그렇게 읽히지 않는다. 좀 더 세련된 인간과 사회가 되고자 하는 노력의 결과물, 그리고 그것을 통해 좀 더 멋진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탈근대라는 패러다임을 통한 어떤 노력이 보여진다. 이것을 통해 추론해 볼 때 개인적인 감상이 하나 떠오른다. 동양식으로 말하면 중용이나 중도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균형 잡힌 시각?
  편파적인 시각을 통해 재생산되고 있는 파편적인 사회적 활동은 현재 한국은 물론 전세계적으로 문제를 야기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근대를 굳이 말할 것도 없다. 과거에 뭉치려는 힘보다 헤어지려는 힘이 강할 때, 그 사회의 건강성은 크게 다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시대적 양심을 담은 장을 맨 마지막 장에 놓았다. 노력해도 안 될지도 모른다는 고민 속에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으려는 도전 의식 말이다. 어쩌면 좌우의 극단처럼 근대와 탈근대가 양극과 음극처럼 떨어지려고만 한다면 결국 사회는 물론 그 속의 인간의 행복은 갈 곳이 없게 된다.
  저자의 걱정이 무척 인상 깊다. 클레의 ‘앙겔루스 노부스’란 그림을 보고 눈물을 흘렸던 저자의 감성이 이 글을 읽는 현재의 모든 독자들도 공유할 것 같다. 그래서 10년 전의 작품을 다시 내어놓은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 같다. 다만 10년 전의 고민이 지금도 해결되지 않은 것 같아 무척 아쉽다. 고대 그리스의 대가들처럼 절제를 통해 영원을 추구했던 테크네가 지금 무척 필요한 것 같다. 그래서 칼로카가티아를 맘껏 누렸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된다. 지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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