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안 있어 2012년이 시작된다.
세상의 종말론은 무수히 많은 예언서에서 언급되는 부분이다. 특히 서양 종교에선 세상의 종말론이 대세인 듯 하다. 조로아스터교나 기독교 등이 거의 모두가 최후란 말을 즐겨 쓰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최후의 만찬’이란 말도 생겼는지 모르겠다. 특히 기독교에서 노아의 방주에 대한 이야기 역시 세상이 무너질 때 거론된 최후의 생존 수단이었고, 지금도 이 이야기는 크게 회자된다. 그래서인지 멸망의 시기를 다룬 영화 ‘2012’에서 인류가 선택한 최후의 대안으로 역시나 선택된다. 특히 생존수단만이 아니라 그곳에 누가 타느냐 역시 선택의 대상이고 보면 선택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된다.
미래를 다룬 영화지만 오늘의 우리가 보는 현재의 영화다. 만약 인류가 생존한다면 그래서 10년 이상이라도 지구가 더 버틴다면 2012년이란 시간과 그 때를 두고 나온 예언들이나 다양한 과학 이론들이 틀렸다고 조롱 당하겠지만 특정 시간을 두고 이야기하면서 옳은 예언인가 아닌가 하는 논쟁은 사실 실익은 거의 없다. 그런 거 입증하려고 큰 돈 들여서 블록 버스터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흥행을 위한 것이 제일 큰 목적이겠지만 그것 이외에도 뭔가가 있어야 영화 볼 맛이 나는 것이다. 이 영화, 그런 점에서 뭔가가 있다.
노아의 방주와 같은 것을 그대로 본 딴 것들이 있어 과거를 소재로 끌어당긴 것들은 있지만 본질적으로 이 영화는 오늘을 다룬 작품이다. 그 이유는 영화 캐릭터들이 바로 우리들의 이웃과도 같은 존재들이기 때문이며, 노아의 방주 탑승객을 태우는 것을 결정하는 주체인 정부와 권력층들이 매우 현대적인 권력층과 기득권층을 꼭 빼 닮았다는 점이다. 창세기 때의 노아는 고뇌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줬지만 오늘날의 노아인 정부는 그런 고민은 그다지 많이 하지 않아 보였다.
현실은 그랬다. 주인공들은 이혼가정이었고 함께 도망가는 이들은 전남편과 이후의 남편이 함께 노력해서 가족을 구원한다. 정말 이보다 더욱 현실적인 가족도 없을 것이다. 이혼이 대세인 사회적 분위기는 한국보다 미국이 앞섰다. 아무리 영화가 동화 같은 세상을 보여주려 하지만 현실에 기반을 두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현실감을 느낄 수 없기에 이런 가족을 구상했을 것이다. 현실을 기반으로 한 비현실이야말로 영화가 만드는 기본적인 방식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현실에 더해서 집권세력들이 주축이 된 정부의 행태다. 누군가는 희생해야 할 때, 결국 그들은 타인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만행을 보여준다. 궁극적으로 변화는 있었고 미국 영화 특유의 해피엔딩 종결이 있었지만 그 마지막까지의 과정에서 보여준 정부의 모습은 아무래도 현실적이었다. 거짓말로 국민들을 안심시키고 내부적으론 위기에 대처하는 모습에서 우리를 위해 정부가 존재한다는 것은 동화에서 있을 법한 현실을 다시금 되새겨 준다. 일본의 원자력 발전소 사건이 이를 증명한다.
영화는 자연재해로부터 도망가는 이들의 성공과 실패를 모두 보여준다. 특히 무관심 받는 타인이 됐을 때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를 확실히 보여준다. 이 영화의 의미를 그대로 해석한다면 결국 사회의 기득권층이 되어야만 살 수 있다는 신자유주의의 엄연한 경고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일 것이다. 즉 희생되고 싶지 않으면 뭘 해야 할지를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달리 보면 그것은 정부의 속성이 무엇이고, 기득권층의 속성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사회비판영화이기도 하다. 그들이 자신들만의 이익을 도모할 때, 어떻게 해야 그것을 막을 수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시간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우선 믿지 말라는 것이 그 시작일 것이다. 이런 내용이 세상이 무너질 때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2012’의 진정한 메시지인지 모른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 말이다.
또한 더불어 사는 용기를 내는 것은 매우 힘들지만 그렇다고 안 냈을 때의 인간적 고민과 사회적 충격이 얼마나 심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누군가의 희생을 발판으로 자신만의 생존을 도모하는 것은 분명 가슴 아픈 기억을 갖고 나머지 인생을 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수도 아니며, 엄연히 합리적 판단이란 미명 하에 자행된 살인이기 때문이다. 왜 자신들이 생존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쾌한 답을 내놓지 못하면서 뭐가 자신과 그들을 나눌 수 있는 기준인지를 밝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건 나를 희생하면서 가족을 살렸던 부모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자녀들 역시 부모만의 희생으로 살았다는 것은 알지만 다른 이들의 희생 위에 생존했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고 그냥 덮고 다음을 살기엔 그다지 편안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평생 트라우마를 갖고 살 것인지 아니면 뭔가 시도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더불어 산다는 것은 최소한의 미덕이다. 그것이 없다면 인류의 생존은 언제나 우아하지 못할 것이며, 살아있는 자에게도 고통일 것이다. 이 영화가 오늘날 신자유주의로 고통 받고 있는 이들이 하고 싶은 말들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