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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혹은 여행처럼 - 인생이 여행에게 배워야 할 것들
정혜윤 지음 / 난다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마치 난수표와 같았다. 독특하고 섬세한 글은 읽는 내내 나를 힘들게 했다. 깊이 있는 성찰과 사색을 담은 이 글은 내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장소로 날 이끌고 가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다른 책에서 느꼈던 여행수필은 이 책에서 거의 느끼지 못했다. 마냥 즐겁고 행복할 것만 같았던 여행 수필은 이 책을 기점으로 다른 것도 담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작가 정혜윤의 직업은 PD였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정PD에 대해선 모른다. 아마도 방송의 겉만 보고 들었을 뿐, 그것을 만든 이들의 노고를 크게 생각하지 못했던 어느 시청자였던 나이기에 그런 것 같다. 보고 듣는 겉의 세계는 과도한 액션과 즐거움이 넘치는 듯한데 거기에 너무 취한 것만 같기도 하다. 그것을 만든 이들은 그 누구보다 현실적이며, 또한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고 있다. 애타며, 그리고 처절한 삶의 한복판에서 시청률 쟁취란 무서운 경쟁에서 그들은 살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너무 현실적이다. 하지만 PD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치열하게 사는 이들이 만든 것들은 판타지인 경우가 많아 종종 그 너머의 세상이 어떤지를 종종 망각한단 사실이다.
여행도 그런 것 같다. 여행을 다녀온 이들이 언제나 칭찬한 것들에 취하다 보면 여행지에서의 고통을 이야기할 수 없고, 종종 그런 것들을 망각하며 좋은 것들만 쓰게 마련이다. 동시에 시청률과 마찬가지로 더 커진 판매 부수에 대한 열망도 있기 마련이리라. 그래서 이 책의 제목에서 여행이란 단어를 봤을 때, 어디 좋은 곳을 방문하며 느낀 좋은 것들을 나열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것도 편견이라고 깨질 상황을 이 책을 통해서 맞이하게 됐다.
책의 흐름 속에서의 저자는 언제나 위태로워 보였으며, 아슬아슬해 보였다. 어린 소녀의 이야기 속에 담긴 위험은 보는 내내 가슴을 쓸어 내렸다. 하지만 이 책은 어느 여인의 담담한 여행기가 아니다. 다른 이들의 인생을 여행이란 틀로 보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야기 책이기도 하다. 저자는 그들의 이야기를 여행으로 서술한다.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것은 마치 내 이야기가 다른 이들에겐 여행으로 들릴 수도, 불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난 다른 이들에게 새로운 미개척지이며,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내 이야기가 자신에게 하찮을 수 있어도 다른 이들에겐 귀담아 들을 수 있는 알찬 이야기일지 모른다는 기쁨도 얻은 것 같다.
정 작가가 처음 시작했을 때의 여행과 현실의 대비의 글은 이 책의 가장 큰 압권이다. 현실은 언제나 고통의 원인이고 기피 대상이다. 어느 순가 그런 것이 아닌, 언제나 인간의 천형인 것처럼 돼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여행에 판타지가 붙은 것 같다. 그래도 여행엔 멋이 있다. 그리고 행복할 수 있는 그 무엇도 존재한다. 너무 현실적이 됐는지 모르지만 생존을 위한 도박이 여행에선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리라.
저자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어딘지 모르게 슬프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작가의 시선 역시 그리 긍정적이지 않아 보였다. 또한 그녀가 가본 장소에서의 그녀 역시 우울함이 담겨 있었다. 정말 여행을 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녀는 자신의 그 모든 것들을 다시 하나하나 탐구하며 자신의 생을 반추하고 있다. 어쩌면 여행은 자신의 다른 모습을 보기 보단 현실에서의 나를 다시 한 번 돌아 볼 수 있는 그런 곳이리라. 그리고 이 책은 그런 것들을 보여 준다. 또한 작가가 만난 다른 이들의 사연을 들을 때면 다른 방식의 여행을 떠나는 것만 같다. 각자 힘들었던 것들을 극복하면서 뭔가 이루는 것을 보면 내가 갖고 있는 것들의 귀중함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여행은 지금의 현실에서 살고 있는 나를 다른 앵글을 통해 보는 시도일지 모른다. 현실도피가 아닌 내 새로운 거울같이 말이다. 이 책을 읽는 것을 많은 수고를 요구한다. 시간도 그렇지만 깊은 사색을 이끌고 있다. 종종 그것들은 날 귀찮게 했으며, 외면하고 싶은 것들을 들추기도 했다. 하지만 마지막 부분의 읽기를 끝내면서 묘한 쾌감도 있었다. 그건 내가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한 것들을 다시 생각한 묘한 긴장감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여행의 묘미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여행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