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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츄리온 - Centurio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로마 시대는 정복과 반항의 시대였다.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제국을 유지하는 방식을 채택한 로마는 군인들에겐 언제나 불안의 시간을 제공했을 것이다. 다른 이들을 정복해서 그들의 삶을 파괴하고 패자들을 강제로 로마 영내로 끌고가 노예로 평생 부려먹는 경제시스템이 바로 로마의 생존 방식이었다. 이를 위해선 당연히 막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로마 군대가 언제나 강할 수는 없을 것이며 패배도 있었을 것이고 패장도, 그리고 패한 군인도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패한 자들을 어느 시대에서나 불명예스럽고 부담스러울 뿐이다. 패자는 영광을 함께 누릴 수 없는 자들이며 종종 부담스런 존재들일 뿐이다.
영화 ‘센츄리온’에 그런 군대가 나온다. 로마 5군현 중 한 명인 트라야누스 황제 시기였던 것 같다. 영화 속엔 오늘의 스코틀랜드 지역의 원주민이었던 픽트 족들을 방어하기 위해 세운 로마의 장벽을 통해 추론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 성벽은 트라야누스 황제의 명령으로 건축된 것을 본다면, 즉 영화는 로마의 전성기를 배경으로 제작된 것이다. 전성기다 보니 로마의 번영이 한창이었던 때라 로마인들이 좀 여유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힘들 때의 인간관계와 다르지 않았고 자신의 생존을 위해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잘못된 명령으로 인해 전멸한 부대는 살아남은 정치인들에겐 부담거리일 뿐이다. 패전한 군인들은 그들의 아군도, 동료도 아니었고 그만 사라졌으면 하는 거추장스런 것들일 뿐이었다.

비극이었다. 현실의 냉혹함을 제대로 알려주기 때문이리라. 패전한 군대라도 자신들끼리는 누구보다 아군이었고 동료였다. 적의 포로로 잡혔다 하더라도 자신의 상관이기에 목숨을 걸고 위험한 탈주계획을 세운다. 과연 그들은 동료였고 충직한 군인들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보게 된 일상화된 전쟁과 죽음, 그리고 복수의 일반화는 당시의 시대를 관통하는 인간사를 보여줬고, 복수의 복수가 꼬리를 물면서 험난한 인생사를 다시금 되새기게 했다. 군대 내의 따뜻한 관계는 군대를 벗어나는 순간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성공에 대한 열매는 서로 얻으려 하지만 실패의 쓰디쓴 잔은 서로 미루기 마련이다. 성공을발판으로 자신의 미래를 밝게 하고 싶겠지만 반대라면 문책을 피하기 위해 누군가를 희생시키려 한다. 이때부터 세상을 사는 서글픈 지혜가 필요하다. 전쟁에서 패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문책이 있어야 한다면 패한 군대만이 문제가 아니다. 패전한 군대를 위험한 장소로 보낸 이가 있다면 그에 대한 문책은 당연지사다. 하지만 이에 대한 책임을 질 자는 자신의 정치생명은 물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놓아야 할 처지가 되는 법이다. 이것을 회피하기 위해 언제나 무리수를 두게 되며, 그것은 언제나 자신의 동료였던 자들의 희생을 요구하게 된다. 자신의 생존과 안녕을 위해 자신의 말을 따르던 자들을 서슴없이 처단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럴 때 생기는 것이다.

이런 희생자를 영화 ‘센튜리온’의 퀸투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패했지만 살아 돌아온 로마의 군인을,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제거하기 위해 분주히 노력하는 그의 주변 로마인들을 보면서 퀸투스는 도리어 자신의 적이 살고 있는 곳으로 떠나게 되는 아이러니를 연출하게 된다. 자신을 따뜻하게 맞이하는 이가 있다면 그가 자신의 동료이며, 그가 자신의 가족인 것이다. 어쩌면 조직은 그 자체로 민폐이며, 누군가의 희생을 발판으로 성장하려는 것이 조직의 본질일 것이다. 즉 조직은 폭력이다. 무엇보다 다수의 이익으로 가장한 소수의 탐욕과 그로 인한 폭력은 특히 나쁘다. 이런 폭력을 상대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비극적일 것이다. 그러기에 자신이 충성을 맹세했고 사랑했던 조직의 구성원들에게 배신을 당한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이 사라짐을 뜻할 것이다.
조직으로 인해 발생하는 불운을 막을 방법은 어쩌면 없을지 모른다. 지금의 이 시점에도 조직이란 허울을 덮은 탐욕스런 소수에 의해 폭력이 자행되며, 그것으로 인해 희생되는 이들이 부지기수일 것이다. 하지만 소수의 탐욕에 의한 폭력을 그냥 놔둘 수는 없는 것이며, 방관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바로 자신이 희생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퀸투스는 외로운 투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조국을 포기하는 것이 어쩌면 나약한 포기라고도 할 수 있지만 최소한 그는 자신의 동료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고, 또한 분노할 줄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희생을 권유한 자들에 대한 분노가 필요한 것이다. 이 분노야말로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작지만 소중한 재료다. 영화는 그런 분노의 미학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떠나 새롭게 꾸릴 작지만 강한 유대감이 있는 공동체가 행복하길 빈다. 그리고 그런 공동체야말로 인류가 소원하는 가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