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전 - The Front Lin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죽고 싶지 않았다. 전쟁 한복판에서 서로 싸우는 군인들이 말이다. 어쩌면 죽이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군인이면서 말이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벌어진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서 전쟁에 참가한 이들은 자기 의사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그들에겐 큰 의미가 있는 전쟁도 아니었다. 동부전선의 애록고개라는 치열한 군사 고지 위에서 그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남들이 만든 환경과 적개심으로 인해 서로 싸우도록 강요 받았고, 군인이긴 하지만 목숨을 걸라고 요구 받았다. 마치 관객들의 즐거움을 위해 친구끼리 싸워야 했던 로마의 검투사들마냥 그들은 작은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그야말로 개죽음하고 있었다. 남이 만든 싸움터에서 억지로 하는 싸움, 그런 곳에서 살고자 하는 발버둥, 영화는 그 어떤 잔인한 공포영화보도 무서웠다.
  전쟁하겠냐고 누군가 묻지도 않은 전쟁에서 그들은 생존을 위해 발버둥쳤지, 이념을 위해, 그리고 조국을 위해 몸바쳐 싸울 것을 다짐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도 불분명한 이념의 논쟁은 사실 실제 생활과 거리가 멀었고, 왜 계속 자신들을 개죽음으로 몰고 가는지 그 이유도 알지 못했다. 조만간 정전이든 뭐든 전쟁은 끝날 것이라고는 달콤한 이야기만 나오지만 그 조만간은 어느 순간 무려 3년이란 시간이 됐고 더 갈 기세였다. 지금 살아 숨쉬고 있지만 그 숨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를 불안한 상황이 연장되고 있을 뿐이었다. 
 

 

  후방에 있으면서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이들의 수많은 정치적 수 싸움으로 인해 기약 없는 정전의 약속은 계속 미뤄지기만 했다. 그 속에서 벌어지는 희생자수의 증가와 의미 없는 살인과 공포가 애록고지란 곳에서 그칠 줄 모르고 전개됐다. 그 속에서 왜 싸우는지 이유를 잊게 된 것은 너무 자연스러웠으리라. 그리고 그런 전쟁 속에서 인간이었던 군인들이 점점 인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그들은 살인기계가 됐다. 그리고 이번에 살았지만 다음 살 수 있을지 모를 긴장조차도 초월한 채 그냥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친구의 죽음조차도 무미건조하게 상대할 수 있는 그런 무신경한 인간들로 바뀐 지 꽤 오래 됐다.
  이런 곳에서 지옥이 어떤 곳인지를 묻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리라. 지옥은 그 속에 사는 인간들이 자신의 환경이 얼마나 처참한지를 모를 때 만들어지는 것이다. 잔인해지고 무신경해져 버린 그런 인간이 됐을 때, 그들은 괴물이 됐고, 누군가의 희생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일 때 그들이 사는 곳은 지옥이 된 것이다. 인간의 가치는 평가절하되고, 언젠가 죽을 지 모를 위험한 상황에서도 위험을 느끼지 못하면서 나도 다음엔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불안한 삶이 일상화된 곳, 그런 곳이 바로 지옥인 것이다. 문제는 그런 지옥 같은 생활을 벗어날 길이 전혀 없을 때, 인성은 사라지고 괴물만 존재하는, 진정한 지옥이 탄생하는 것이다. 전쟁 속에서 이미 인간성을 상실해버린 인간들은 죽어가는 주인공의 독백 속에 지옥의 모든 것을 드러냈다. 그래서였을까? 중위 김수혁(고수)의 슬픔을 넘어 비극의 절정을 형상화한 ‘어머니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은 인간의 마지막 이상향인 어머니의 품조차 잊게 만드는 무서운 힘이 있었다. 정말 참혹한 곳이었다. 
 

 

  전쟁에서 이긴다고 그래서 생존했다 하더라도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그런 곳에서 전쟁 중에 낭만이 생겼던 것 같다. 아마도 가상현실이겠지만 적군끼리 서로 편지와 물품을 교류하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사실 남한의 군대만이 비슷한 고충을 갖고 있진 않았을 것이다. 북한군 역시 이 지긋지긋하고 공포스런 전쟁에서 승리보단 생존이 우선인 상황이 전개됐을 것이다. 그리고 남북한 군대는 서로를 잘 아는 동포였고, 서로간에 인간미도, 우정도, 나눌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러기에 상대편이지만 부탁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 부탁을 잘 처리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싸우도록 만든 것은 사실 그들 자신이 아니었고 남이 그렇게 강요해서 한 것일 뿐이다.
  어떻든 그들은 그래도 서로 싸웠다. 하지만 그 싸움에서 벌어지는 인간관계는 더욱 슬프게 했다. 포항에서 자기들만 살겠다는 충동 속에서 벌어진 사건과 그로 인한 트라우마, 그리고 생전 보지도 못한 여인을 사랑한 남자에게 다가온 슬픈 인간관계는 그 많은 사랑이야기보다 더욱 슬펐다. 그것을 알면서도 전쟁에서 총과 칼로 상대를 제압해야 하는 불운한 인간관계, 동료보다 상부지시에 따라야 할 것을 요구하는 상관에게 했던 부하들의 반항, 그러면서도 살려고 발버둥치는 괴로운 군인들의 처절한 몸부림, 이 모든 것들이 애록고지 한 곳에서 터지고 있었다. 특히 왜 자신의 부대가 악어부대인지를 설명하면서 승리보다 생존을 더 강조하는 대위 신일영(이제훈)의 마지막 연설은 전쟁이 얼마나 추악하고 무서우며, 고통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가련한지를 실감나게 보여줬다. 전쟁은 인간의 목숨만 앗아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따뜻한 인성도 앗아감을 너무 슬프게 보여줬다. 
 

 

  누구에게나 불행이 닥칠 수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볼 수 없이 당하는 것이 어쩌면 가장 비극적인 것이다. 내몰린다는 것은 환경에 좌절하는 인간의 가장 나약함을 의미한다. 감독 장훈은 이런 음울한 모습들을 매우 냉정하고 담담하게 앵글에 담고 있었다. 실제 전투인양 벌어지는 고지전투는 지금까지 봐왔던 그 어느 전쟁장면보다 현실적이었다. 또한 그런 환경 속에서 볼 수 있는 인간들은 너무 사실적이었다. 종종 전쟁영화에서 볼 수 있는 낭만적 개성이 얼마나 허구적이고 현실에서의 참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보여준 것 같다. 이런 것 덕분에 영화는 더욱 인간미의 가치를 잘 확인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또한 배우들의 열연은 이 영화가 보여준 또 다른 가치다. 고수와 신하균은 이미 검증됐고 뛰어났지만 이번 영화에서 그들의 가치는 더욱 빛났다. 특히 인간성이 파괴됐으면서도 동료를 살리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하려는 이중적 성격을 한 몸에 갖고 있는 김수혁 중위 역을 맡은 고수는 전쟁영화 캐릭터에서 새로운 고전을 만들었다. 향후 김수혁이란 캐릭터는 한국영화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존재가 될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인간적 트라우마를 간직하는 대위 신일영 역을 맡은 이제훈은 앞으로 많은 이들이 눈여겨봐야 할 최고의 수확이 될 것이다. 고독과 강인함을 동시에 갖춘 그의 연기력은 이 영화의 가치를 역시나 한 단계 높여줬다 할 수 있다. 여기에 전쟁터에서 어느 한 남자의 낭만을 만들어줬으면서도 그 누구보다 공포를 만들었던 2초의 김옥빈 역시 그녀의 매력을 잘 살린 연기자로서 남게 될 것이다. 이 영화 거꾸로 봐도 감동받을 만큼 한국의 고전이 될 것임이 분명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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