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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지대
쑤퉁 지음, 송하진 옮김 / 비채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10대들의 성장 소설이라고 하기엔 너무 참혹했다. 도리어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현실고발을 하는 사실주의 문학이다. 암담한 경제적 현실 앞에 휘둘리는 인간군상, 그 속에 있는 비극의 다양한 형태들, 그리고 그렇게 살면서도 어떻게든 변화해야 하지만 방법을 몰라 헤매는 마을주민들의 모습은 처량하다 못해 우습기조차 했다. 그런 환경 속에서 결코 변할 수 없는 힘든 세상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어린 10대들의 불운을 담은 소설이다. 해방구 없는 현실 속에서 청소년들은 암울한 현실을 살고 있고, 성숙한 어른은 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 속에 살고 있는 어른들이 역시 어른스러운 것도 아니다. 어른스럽지 못한 어른들이 그냥 아빠, 엄마가 된 것뿐이다. 그냥 나이만 먹었을 뿐, 그들을 위로해줄 수도 없음은 물론 그런 여력도 마음의 준비도 없는 공간인 성북의 참죽나뭇길은 그래서 비극을 양산시키고 순환시킨다.
어른스럽지 못한 것들로 가득한 곳에서 성장을 해야 할 이들의 불운이 소설 전반에 넘쳤다. 시기적으로 중국의 문화대혁명 이후 피폐해진 어느 작은 마을은 결코 행복한 공간이 아니었다. 지상의 낙원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건전한 사회건설을 위해 마련된 화학공장은 안락함과 풍요를 만들어주지 못했고 도리어 공장폐수와 불안한 삶의 환경을 만들었을 뿐이다. 경제적 삶 역시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공안정국처럼 권위적인 압력이 도처에 흔했고, 사람들 사이엔 의심과 불신이 만연됐었다. 그들의 유대관계 회복을 위한 것을 사라져 버렸고, 그들은 갈등과 억지스런 봉합에 힘든 사회적 삶까지 살았다. 경찰서도 있었고, 중학교란 학교도 있었지만 사회적 폭력과 긴장은 도처에 흔했다. 폭력이 차라리 가장 흔한 해결책이었다.
어른이 되는 것엔 과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성숙한 어른이 되도록 이끄는 것은 없었으며, 그냥 나이를 먹는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한 것 같다. 그래서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인간관계에서의 미숙한 일 처리가 일반적이었고, 따뜻한 감성으로 서로 보듬어주는 것이 가족의 이상향이라면 이 소설에선 전혀 그런 것들이 눈에 띄지 않았다. 부부는 물론 부모자식 간에도 언어적, 물리적 폭력이 만연했고, 가족 간의 불신도 심했다. 동펑 중학교에서 자주 발표되는 퇴학생들의 명단은 사회가 쉽게 배제는 할지언정 보듬고 달랠 그런 여력이나 마음가짐이 없다는 것을 보여줬다. 배제된 이들이 그런 것을 너무 쉽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면 사회는 불건전한 위기로만 치달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배제는 일상사였다. 참죽나무길에선 딸을 팔아 잠깐의 요기와 즐거움을 때운 이가 있었고, 객기 아닌 객기를 부리다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한 이도 있었다. 전혀 통제할 수 있는 정신적 수양의 부족으로 강간을 한 10대의 탈선이 있었고, 유부녀와의 사통 뒤에 벌어지는 가족 간의 치정과 불화, 그리고 비극은 점입가경이었다.
이런 이야기들은 마치 비참한 골목길 이야기를 모두 모아 둔 듯 하다. 자신이 일하는 지역이 과거 최악의 지방이란 것만을 연상할 뿐, 그 누구도 무엇을 해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지 고민하지 않았다. 설사 한다 해도 쉽지 않지만 너무 쉽게 성북지대를 포기했다. 그래서 소설 속에 비춰진 마을의 대화는 욕설과 비속어가 가득했고, 사회적으로도 살인, 강간, 그리고 죽음이 흔하게 드러났다. 마치 무법천지와도 같았다. 거친 폭력은 가족 내부에서도 흔했다. 이런 긴장과 폭력에서 개인적인 해결책은 억지였고, 상대에 대한 입장이나 객관성을 유지하지도 못했다. 일이 터지면 다 남의 탓이었고, 결국 치기 어린 증오만 남았다. 화해도 용서도 없었다. 솔직함보단 분노를 보이는 것이 흔한 동네이기에, 모든 이들의 아픔을 여과 없이 분출하고 그래서 학대 받은 이들이 다시 다른 이들을 학대하는 악순환만 재생산됐다. 그런 곳이 성북지대이다. ‘성동은 난폭하고, 성서는 흉악하고, 성남은 살인 방화, 성북은 똥통이로구나’라는 어느 경찰의 독백은 이 소설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넋두리이다.
이런 공간에서의 성장이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친구와의 대화에서 날 선 이야기들과 상대에게 못질을 하는 단어들이 넘쳤다. 위로와 배려는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고, 그냥 그런 관계들이 불필요하게 나열되고 있었다. 상대에 대한 질시와 멸시는 친구관계를 이루는 기본구도처럼 보였다. 함께 놀 친구 정도일 뿐, 서로간의 감싸 안은 것이 전혀 없는 그들은 그래서 누구 하나 없어져도 아쉬운 정도일 뿐, 최선을 다하는 관계는 기대할 수도 없었다. 가족이란 울타리가 이런 친구관계를 넘어서는 것도 아니다. 도덕적 윤리는 고사하고, 서로 버리고 버림받는 상황 앞에서 부모자식간의 관계는 황폐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종종 이야기되는 화려한 조상의 이야기는 나오지만 그것이 현실화되지 않았고, 가족간의 반목과 비웃음이 넘쳤다. 그야 말로 관계의 파탄, 그런 것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는 것이다.
유년기의 경험이 이런 것이라면, 참 참혹한 것이리라. 작가 쑤퉁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하지만 그의 직접경험보단 간접경험을 통해 얻은 내용들을 근거로 쓴 것이란 옮긴이의 말이 있어 차라리 안도의 마음이 들 정도였다. 직접경험이라면 쓰디쓴 과거로 인한 Trauma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린 악동들의 이야기라고 하기엔 현실감이 무척 컸으며, 아마도 그가 살았던 어느 동네에서 실제로 일어났을 것이라는 것도 부인하기 힘들다. 그 때는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위로 받지 못했기에 난폭하게만 행동한 아이들은 사실 지금도 있으며, 그것은 중국이란 범주를 이야기할 필요 없이 우리 주위에도 흔하며, 지금은 점차 많아지고 있다. 오늘의 현실이 녹녹하지 않기 때문이다.
위로해주고 싶고, 위로 받고 싶다. 행복한 사회란 것은 결국 치유를 할 수 있는 시공간이 존재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힘들고 어렵고, 그래서 난폭해지는 경우는 있다. 문제는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고 그냥 놔둘 때, 그 상처는 혼자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어른이 되어서 재생산되고 반복되기 때문이다. 주변 역시 위험해지긴 마찬가지이겠지만 말이다. 사회의 건강함이 매우 긴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성장하기에 어려운 것들을 보듬을 수 있는 사회의 그 무엇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든다. 혼자로는 힘든 치료이기 때문이다. 오늘, 이 소설을 통해 그런 것들 것 왜 필요한지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