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옆에 있다고 한다. 우리가 사랑하고 기댈 사람들이.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알아채지 못하고 있기에 세상은 거칠게만 느끼고 또한 불행만 느끼고, 그래서 떠날 생각까지 하게 된다. 미련이 없기 때문이다. 사회적 Loser들은 더욱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래서인지 주인공은 죽기 위해 살고 있다.
자살, 어느덧 자연스레 듣게 되는 이 단어는 거의 매일 듣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거의 매일 누군가의 자살 소식이 들린다. 유명인의 자살이 화재거리라서 크게 회자되지만 이름 모를 어느 누군가의 자살은 거의 매일 있는 다반사의 시대다. 특히 미디어를 통해서 접하기 쉬운 슬픈 내용이어서인지 방송매체의 발전에 기인한 이 슬픈 현실은 차라리 방송 없는 곳이 더욱 행복한 세상이란 착각까지 들도록 한다. 방송 없는 곳이 낭만적인 세상이 되어버린 현실, 그 누구도 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소통부재가 차라리 행복의 조건인지 모르겠다.
사회의 Loser들이 살기엔 이 세상은 각박하고 외롭다. 자살하겠다는 표현이 자연스러워 보인 세상은 사실 그렇게 척박한 현실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다. 외롭다는 것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단 의미이고, 자신이 필요로 한 사람도 없단 의미이다. 그냥 사라져도 특별히 이상할 것이 없는 세상은 모두에게 삶의 진미를 느끼도록 하지 못한다. 생명은 귀하지만 Loser의 생활이 정말 그만큼 귀할까?란 질문이 자연스레 나오게 된다. [헬로우 고스트]란 영화는 바로 이런 물음 속에서 시작된 것이다.

귀신이 존재한다. 그것도 바로 그의 옆에 말이다. 한국적 사고를 통해 상상된 이 구조에서 출발한 이 영화에서, 죽기 위해 하루하루 살아가는 외롭고 불쌍한 남자 ‘상만(차태현)’에게 뜻하지 않게 귀신이 더부살이하겠다고 온 것이다. 즉 변태귀신, 꼴초귀신, 울보귀신, 초딩귀신. 울기만 하면서 소원을 들어달라는 유일한 홍일점 귀신이 함께 살자고 한다. 왜 그랬을까라는 질문을 하기도 전에 영화는 그들과 헤어지기 위한 상만의 의지와 계획으로 시작된다. 혼자여서 죽고 싶었던 상만이 그들과 헤어지기 위해 자신의 자살의 시간을 좀 더 지연하게 된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상만의 몸을 통해 들어주면서 알게 되는, 그들이 왜 상만에게 왔을까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게 된다. 그 속엔 영화의 감동을 배가시키는 특별한 서사가 있다. 어지간히 냉혹한 관객이 아니라면 어느 순간 촉촉히 젖는 눈시울을 느낄 만한 전개다.
영화는 곳곳에 웃음을 장치하면서 극을 진행한다. 귀신과 헤어지기 위해 고스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줘야 한다는 미션에 따라 상만은 귀찮은 함께 살기를 하게 된다. 귀신이 원하는 것은 왜 이리도 상만에겐 힘들고 괴로운 것인지. 심지어 상만에겐 부적격한 것들로 이루어진 것도 있다. 하지만 고스트들의 꿈을 하나하나 찾아가면서 함께 사는 가치와 동료애도 느끼고, 함께 사는 온기도 동시에 누리게 된다. 그리고 고스트들이 아닌 현실의 여인에게 느끼는 동질감과 사랑은 확실히 진부해 보이는 설정이지만 어느 순간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확실히 고전적인 방법이 진부하긴 해도 효과는 만점인 법인가 보다. 진부한 것을 함부로 비판하는 것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확실히 들었다.

영화의 공간엔 호스피스 병동이 있다. 그곳은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가는 곳이다. 들어가면 결코 살아서 나오기 힘든 것이다. 기적은 말 그대로 기적일 뿐, 인간세상에서 기적을 바란다는 것이 얼마나 쓸데없는 것인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공간인 것이다. 문제는 그곳으로 들어간 사람들에 대한 무관심 역시 무섭긴 마찬가지다. 인간들의 소통부재로 인해 괴로워하는 모습과 외면 받는 고통 앞에 인간은 죽기 전에 죽은 것이다. 임종은 결국 그의 부재를 확인하는 시간일 뿐이다. 아직 죽지 않은 자들을 죽은 자 취급하는 세상의 세태는 많이 익숙해진 모습임에도 슬프긴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귀신이라도 필요했는지 모르겠다. 살아있는 자들에게 기댈 수 없다면 귀신이라도 나타나 가족애를 확인시키고 남과 더불어 사는 가치와 행복을 만끽하도록 해주었으며 하는 바람 말이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비현실적 동화를 사용해서 현실의 풍자로 돌변한다. 그리고 잃어버린 것들의 가치를 너무 쉽게 회복하지 못한 인간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가족애를 확인할 수 있다면 귀신이라도 괜찮다는 역설, 죽은 자들이 다시 우리 곁에 와야 하는 억지스런 이유인 것이다. 그래도 좋았다. 그렇게라도 됐으면 말이다. 추운 날씨에 마음까지 추워져선 안 되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