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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의 검은 베일
토머스 소웰 지음, 박슬라 옮김 / 살림Biz / 2005년 5월
평점 :
품절
저자의 약력을 확인할 때 후버 연구소 상임학자란 프로필에서 그의 보수적 이력이 느껴졌다. 책 속에서 보이는 그의 보수적 사고의 핵심들은 미국은 물론 한국사회의 보수적 사고를 보는 것 같았다. 보수라고 학자적 품성이나 사고가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상대를 비판하는 것이 제대로 된 원칙에 따른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든다. 책에서 나름 합리성이 드는 부분이 있어도 전체적으로 저자의 의도가 과연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줄어들지 않음은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 같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책의 전체적인 내용은 정부나 사회, 혹은 그가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는 ‘결과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질 필요가 없는 제 3자’들은 그만 간섭하란 것이 저자의 요지다. 그러면서 그의 해결책은 모든 분야에서 문제가 터지면 시장의 원칙처럼 그냥 놔두면 된다는 것이며 이 점에서 그의 오류는 심각하다. 현재의 전세계적인 경제 위기의 주범인 시장을 그는 모든 문제의 해결점으로 내세웠단 것이다. 아쉽다면 왜 시장이 유일한 해결책인지 거의 제시되지 않는 것이다. 저자는 무조건적인 대전제인 시장원칙의 우위성 자체가 심각한 의문대상이란 것을 망각하고 있다.
현 세계의 경제문제를 터뜨린 신자유주의자들의 괘변처럼 토머스 소웰은 언제나 시장은 중요하다고 주장하지만 많은 보수학자들은 시장이 왜 모든 문제의 해결책인제 제대로 제시한 학자들은 없었다. 또한 극단적 보수주의자들이 비판하는 정부의 개입이야말로 시장의 불완전성을 증명하는 근거가 된다. 만약 시장이 두통거리가 아니라면 왜 정부가 나서겠는가? 1929년의 세계 대공황은 물론 현재 터지고 있는 세계적인 공황의 원인이 바로 시장원칙의 준수 때문에 터진 것을 생각해보면 시장 내의 행위자들의 불합리성과 탐욕을 제거하지 말자고 주장하는 극우적 시장주의자들의 진정한 참회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저자는 두 가지 점에서 책임은 지지 않는 무능한 제 3자의 개입을 비판한다. 첫 번째는 상류층에 대한 제 3자의 개입 비판이다. 즉 그들의 이익을 보호해주기 위해 정부와 같은 제 3자가 개입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여기에선 지역 사회의 집값이나 토지값, 그리고 비영리기관인 대학교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부분에서의 토웰의 비판은 피터 슘페터가 제시한 조합주의적 국가를 비판한 것으로 보인다. 참여과 경쟁보단 배제와 기득권을 옹호하는 사회 구성원들에 대해 어떤 학자들이나 충분히 비판할 수 있고 그 점에선 정당하다. 그러나 그의 해결책은 시장원칙을 지키자는 주장이다. 그런데 과연 기득권을 유지한 상위층들이 시장원칙을 통해 약자들과 같은 정글에서 경쟁한다면 과연 시장원칙이 약자들의 삶을 개선하고 과연 정치적 안정을 꽤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기득권을 위해 운영되는 법과 제도가 문제라고 해서 그것을 없애자는 의견은 우리에 있는 호랑이에게 고깃살 주는 것이 아깝다고 우리에서 풀어주는 사태와 다르지 않는 것이다. 차라리 기득권을 옹호해주는 법과 제도를 약자들을 위한 삶의 개선을 위한 쪽으로 바꾸자고 주장하는 것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이 점에서 정치권력이나 민주주의의 가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저자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배제하는 쪽을 선택했다. 국제적으로도 토웰의 주장은 미국이 여타 약소국들에게 워싱턴 컨센서스를 인정하라고 강요해서 많은 나라들이 경제적 고통을 당한 상황과 무척 유사하단 점에서 그의 보수적 사고의 문제점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다.
두 번째의 문제점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억측이다. 이 부분은 소득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위 20% 세대의 소득이 이전소득 등을 고려하지 않아 그들의 빈곤이 더욱 과장된 측면이 있으며 그것을 입증하는 것으로 그들이 과거엔 소유하기 힘들었던 전자레인지나 비디오 레코더 등을 소유함으로써 그들의 부가 줄어들지 않고 도리어 늘었음을 이야기한다. 어느 점에선 수긍하지만 여기엔 문제가 있다. 이들이 갖고 있는 전자레인지가 상류층 제품과 수준차이가 적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말로는 같은 종류의 상품같지만 가격이나 수준에서 엄청난 차이를 지닌 것들이다. 마치 상류층은 2009년 최신을 갖고 있는 반면 하류층은 1981년 것을 갖고 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같은 상품이지만 노후화되고 위험한 제품들을 사용해야 하는 하위계층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상류층이 골동품을 모으지 않는다면 위험을 무릅쓰고 당장 폭발할 수도 있는 전자제품 쓰라면 좋아할 리가 없을 것이다. 바로 그런 것들을 하류층들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전자레인지 가격대를 살핀다면 그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는데 전자레인지란 품목 하나에 집착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층계급도 에어컨을 소유하고 있으니 가난에서 벗어났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중고품 위주의 가전제품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아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또한 저자는 빈곤이 사회적 관계의 차단이 있을 수 있으며 그렇게 차단된 사람들은 노숙자들 등으로 계속 사라지고 있음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노숙자들의 사망률이나 숫자들을 확인했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램이 생기기까지 했었다. 그가 그렇게 주장하는 경험적 사례에서 이런 사례들은 희한하게도 벗어나고 있었다. 그의 빈곤층은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을지 몰라도 현실에서의 빈곤층은 중산층이나 그나마 버티는 사람들이 하위로 내려오는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백인이 인구학적으로 비율이 줄어들고 있는 지 모른다. 이 때문에 이방인들을 끌어들이는 것 아닌가?
이 부분에의 또 다른 문제는 중산층 이상도 이런 저런 이유로 각종 이전소득을 얻고 있단 점이다. 저자가 제시한 대학교수들이 하류층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그들은 상류층이다. 그와 같은 대학교수들이 이런저런 특혜를 받고 있음을 저자는 지적하면서 문제점을 이야기한다. 즉 그들도 이전소득과 마찬가지의 혜택을 받고 있다. 그런 점을 비판하고 있는 저자는 하류층의 이전소득을 비판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고 이것은 저자로선 문제점이 있는 사고의 오류다. 여기에 마치 상위 20% 이상이 순수하게 자신들의 노력으로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다른 계층에 비해 은행에서 더욱 많은 돈을 빌릴 수 있고 이런 혜택은 다른 계층과 달리 더욱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단 장점이 있다. 하위 계층에게 돈을 많이 빌려줄 수 없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런 것들 것 빼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사실 왜곡인 것이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것은 상위 20%가 하위 20%와 경쟁을 하고 있으며 여기에 탈락된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매장되거나 죽음으로 사장되고 있음을 간과하고 있으며 중산층 등에서 하위로 하락하는 사람들 역시 많음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주급에 대한 통계상의 오류로 지적되는 것이 현재의 월급에 대한 평균치를 상근 근로자와 비상근 근로자의 월급을 합한다고 주장한다. 얼핏 이유 있는 것 같지만 결국 비상근 근로자의 비율이 계속 늘어나고 있고 비상근 근로자의 월급을 함께 계산한 이유를 간과한 것이다. 즉 비상근 근로자가 너무 많아져 그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미국 월급에 대한 오해가 발생하고 경제적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즉 울며 겨자먹기로 비상근 근로자, 즉 Part-time workers의 고용 현실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야 정책 수행에 있어 정확도를 훨씬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앞의 개별적인 사례 이외에도 다시 한 번 경험적 사례를 살펴봐야 할 부분들이 많다. 인종문제라든가 제 3세계 문제 등이 그것이다. 그의 주장에 대해 일면 수긍할 수 있지만 이미 만들어논 기존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함부로 끌어들인 경험적 사례들은 다시 재고찰해야 할 것들이다. 그런 점에서 Economic Facts and Fallacies란 책의 제목은 그의 분석에 대해서도 해당될 수 있다. 솔직히 그가 주류경제학이 맞는지도 의심스럽다.
그에 대한 비판의 핵심은 그가 정부의 간섭에 따른 실패사례만을 적극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시장의 실패는 없었는지 묻고 싶다. 특히 정부의 간섭에 따른 불확실성을 예로 들지만 시장만능주의는 불확실성이 없을까? 결국 정부의 간섭에 따른 불확실성은 인간 본연의 문제이지 제도상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불확실성은 주류경제학이 성스럽게 생각하는 시장의 본질이기도 한 것이다. 시장의 불확실성으로 세계적인 불황이 터널로 밀어놓은 것이 한두 번은 아니다. 그 시점에서 정부의 간섭이 사회전체적으로 요구됐고 지금도 그 시점 한 가운데 있다. 세상살이 자체의 불확실성을 오직 한 곳으로만 몰아가는 것은 그 의도의 순수성을 의심받게 한다. 비판을 위해 부정적인 사례를 드는 것은 인류 역사에 언제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부정적인 결과에 대한 해결책을 아직 검증받고 허락받은 이론이 아닌 것으로 제시한다는 것은 더 큰 위험이 따르기에 이 책의 보수적 사고는 무척 위험해 보이기까지 한다.